영화 <호커스 포커스(Hocus Pocus)>
자매들이여, 노래하자!
할로윈이다. 멕시코의 명절 ‘죽음의 날(Dia de muertos)’을 배경으로 한 디즈니 에니메이션 <코코> (2017)가 가장 먼저 떠오를 수도 있겠지만 이 애니메이션에서 여성은 철저하게 배경으로 밀려나 있으니, 여기서 다룰 일은 없을 듯 하다.
디즈니 영화 가운데 할로윈을 배경으로 한,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있다. 1993년 개봉작인 <호커스 포커스(Hocus Pocus)>다. 세 명의 마녀가 영원한 아름다움과 젊음을 얻기 위해 온 마을을 뒤집어 놓다 들켜서 교수형을 당하지만, 현대의 할로윈에 살아나 또 한 번 소동을 일으키는 영화다. 당연히 세 명의 여성이 주인공이고 이들은 능력 또한 출중하다. 이들은 각자 성격적인 결함도 있다. 욕망하는 여성이며, 완벽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실패하지만 그들의 목표를 위해 매진하는 인물이다.
작품 속의 남자들 또한 어찌나 현실적인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남자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은 여자다. 또한 이 작품은 명백한 코미디 영화다. 과거에서 온 세 마녀들의 현대생활 적응기는 그 자체가 웃음을 자아낸다. 이 영화는 처음 개봉한 이후 내내 무대 뮤지컬로 논의되어 왔지만 결국 무대 뮤지컬로는 만들어지지 않고 디즈니는 1993년의 뒷이야기인 속편 제작을 발표했다. 물론 주인공은 그 때 그 사람 베트 미들러 말고는 상상할 수 없다.
줄거리
300년 전 마녀사냥으로 유명했던 세일럼의 옆 마을. 마녀인 샌더슨 세 자매가 데커리 빙의 여동생 에밀리의 생기를 먹어치우고 들켜서 교수형을 당한다. 위니프래드(위니), 메리, 세라는 목이 매달리면서도 히죽히죽 웃는다. 위니는 죽기 전 저주 같은 예언을 남기는데 할로윈 날 숫총각이 인간의 기름으로 만든 검은 초에 불을 붙이면 다시 돌아와 목적을 이룰 것이라는 내용이다.
누가 봐도 현실성 없어 보이는 이 복잡한 저주가 삼백년이 지난 1993년에 실현된다. 그 마을에 전학 온 맥스는 여동생 다니와 함께 동네를 돌아다니며 사탕을 얻으러 다니다 허세를 부리며 마녀의 집에 놓인 초에 불을 붙인다. 다니는 기를 쓰며 만류하지만 듣지 않는 맥스. 다니는 되살아난 마녀들에게 잡혀 생기를 빼앗길 뻔하지만 위니가 죽지 않는 검은 고양이로 만들어버린 데커리 빙의 도움으로 위니의 마법책을 챙겨 마녀의 집에서 도망치는데 성공한다. 다니와 맥스, 맥스가 마음에 둔 지적인 여학생 알리슨을 묘지로 이끈 데커리 빙은 과거의 이야기를 해준다.
한편 마법의 책을 되찾으려고 뒤따라 나온 샌더슨 마녀 세 자매는 검은 아스팔트를 검은 마법의 강물로 착각하는 등의 현대생활에 대한 착오를 겪으면서도 하늘을 나는 지팡이를 타고 묘지로 쫓아온다. 묘지에 발을 디딜 수 없는 마녀들은 대신에 위니를 배신하고 사라와 바람을 핀 죄로 묻힌 빌리를 불러내 샌더슨 남매와 알리슨을 쫓아 책을 찾아오게 만든다. 그 시간 동안 아이들을 준비하기 위해 찾아나선 샌더슨 자매는 마을에 도착하지만 할로윈 분장을 한 아이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착오를 겪는다.
그 사이 다니와 맥스, 알리슨은 파티장에서 즐기는 부모를 찾아 위험을 예고하지만 누구도 그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 그곳에 따라온 샌더슨 자매를 본 오누이는 그들을 지목하며 위험을 예고하지만 오히려 사람들을 더욱 즐거워 하고, 자기에게 유리한 상황을 알아차린 위니는 무대 위에 올라가 온 마을 사람들에게 춤을 멈추지 않게 만드는 주문을 걸어버린다.
학교로 도망간 아이들은 학교의 소각장으로 마녀들을 끌어들여 태워버리는 데 성공하고 승리를 만끽하지만 세 마녀는 연기가 되어 소각장을 빠져나와 마법책을 부르고 다니를 납치해 간다. 다니를 되찾기 위해 마녀의 집으로 다시 향하는 맥스와 알리슨. 최후의 결전을 벌인 후 결국 세 마녀는 새벽 햇살에 파괴되어 버리고 마을 사람들에게 내린 춤의 저주도 풀리고 알리슨과 맥스는 가까워지고 데커리 빙은 삼백 년 전에 잃어버린 누이동생과 만나 안식의 길로 떠난다.
우선 이 작품은 벡델테스트를 거뜬히 통과한다. 샌더슨 세 자매들은 물론 다니와 알리슨의 대화에도 사랑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 영화의 대사들의 대부분은 압도적으로 여성 인물들의 입에서 나온다. 이 영화는 흔치 않은, 디즈니의 여성 중심 서사를 지니고 있다. 지금부터 이 영화가 무대화 되어야 하는 이유를 몇 가지 꼽아본다.
1. 능력 있는 여성들의 동맹
샌더슨 자매가 마을 사람들을 통채로 저주로 몰아넣는 장면 'I Put A Spell On You'
마녀들은 오래 전부터 퇴치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병든 사람을 치유했고 실연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한 죄로 화형당했다. 남자 의사들은 손을 깨끗이 씻고 도구를 소독하면 산욕열을 예방할 수 있다고 충고했던 나이 든 조산사들을 무시하다 수많은 아이들과 산모를 저승으로 보냈다. 그러나 충실하게 도구를 끓는 물에 소독하고 손을 잿물에 씻은 뒤 아이를 받아내고 아이도 산모도 잃지 않았던 조산사들은 마녀로 고발당해 불에 타 죽곤 했다.
물론 이 영화에 나오는 위니, 메리, 사라는 ‘진짜’ 마녀로 그들의 어머니도 마녀였다. 인간의 가죽으로 만든 마법책에는 온갖 주문이 새겨져 있는데 그 중 최고는 영원히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약물 제조법이다. 그 약물을 어린 아이에게 먹이고 해가 뜨기 전에 아이들의 생기를 빨아먹으면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 노쇠한 세일럼 옆 마을의 세 마녀 자매는 데커리 빙의 동생 에밀리를 납치해 에밀리의 생기를 빨아들이고 함께 젊어진다.
이들의 악행을 비호할 생각은 전혀 없다. 이들은 어린 아이의 생명을 빼앗으면서도 일말의 가책도 없다. 메리는 자상한 얼굴로 ‘나는 아이를 좋아해’ 하고 말한다. 마치 ‘나는 피자를 좋아해’하고 말하는 것처럼. 그야 당연히 이들은 영화 속에서 악역이고 코미디의 주인공들이니까. 그들은 욕망의 집합체같은 인물들이다. 영원히 살고 싶고 부자가 되고 싶고 아름다워지고 싶다.
그리고 이들은 그에 맞는 강력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첫째인 위니는 셋 중 가장 머리가 좋고 메리는 어린들의 냄새를 맡아서 찾아낼 수 있고 세라는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노래로 아이들을 불러 모을 수 있다. 셋 중 하나만 모자라도 이들의 목표는 삐걱인다. 그 중 가장 큰 능력의 소유자인 큰 언니 위니는 핵심 부분을 담당한다. 마법책으로 마법의 약을 조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니는 아이에게 그 약을 먹여서 생기를 빨아먹을 수 있게 되자 악인답지 않게 두 자매를 불러모아 손을 맞잡고 함께 한다. 두 동생은 감격한 듯 언니에게 고마움을 표시한다. 사이좋게 젊어진 마녀들은 바로 마을 사람들에게 잡혀 교수형을 당한다. 이 때도 두 동생은 언니인 위니의 힘을 믿는다. 이들은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삼백년 뒤 귀환한다.
2. 조언을 듣지 않는 공포물 속의 남자
흔히 공포영화는 늘 주의력 산만한 젊은 여자로부터 시작되곤 한다. 고등학생이거나 대학생인 젊은 여성은 ‘아무 생각 없이’ 놀려서는 안 될 자격지심 덩어리인 괴물을 무심코 놀리거나 영역을 침범한 뒤 괴물을 깨우거나 첫 번째 희생양이 되곤 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유일한 남자 인물인 맥스다. 존재감이 크지 않은 학생인 맥스는 전학 오자마자 불량학생들에게 새 신발을 빼앗기고 양말만 신고 집에 돌아오는 인물이다. 친구는커녕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새로 이사 온 동네에서 세상 아웃사이더인 동생 다니를 데리고 할로윈 캔디를 받으러 다녀야 하는 신세가 된다. 지루해 하던 그에게 희망이 생기는 것은 찾아갔던 집에서 은근히 마음에 두고 있던 알리슨을 만나면서다.
하지만 알리슨을 집 밖으로 끌어내는 것은 맥스가 아니라 맥스의 동생 다니다. 다니와 알리슨과 맥스는 전설의 샌더슨 자매의 집에 이른다. 샌더슨 자매의 집에는 이 영화가 코미디 가족 영화가 아니었다면 아주 소름 돋았을 설정이 두 개나 있다. 하나는 악마가 위니에게 주었는 마법책으로 인간의 가죽을 벗겨 만들었다는 책으로 온갖 사악한 주문은 다 들어있다. 두번째는 교수형을 당한 인간의 기름을 굳혀 만든 초로 불을 붙이면 검은 불꽃이 올라온다. 그리고 보름달이 뜨는 할로윈에 동정인 남자가 이 초에 불을 붙이면 샌더슨 자매가 살아서 돌아오는 것이다. 단 하룻밤만.
이렇게 어려운 조건이 삼백년 만인 1993년의 10월 31일에 현실이 된다. 경고문이 다 허구라고 허세를 떠는 맥스 때문이다. 극중에서 가장 어리지만 가장 영리한 다니는 정색을 하고 오빠인 맥스를 말린다. 얼빵한 오빠가 아직 동정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데다, 그 집의 불길한 기운을 다니만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니가 정색을 하면 할수록 맥스는 더욱 고집을 피우고 기어코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인다. 불꽃이 검게 일어나는 순간 그의 눈은 공포로 커지지만 이미 늦었다. 번쩍이며 샌더슨 자매가 이미 집 문 앞에 도착해 문을 열고 둘째인 메리는 바로 어린이의 냄새를 킁킁대며 맡아서 다니를 찾아낸다.
그들이 다니를 솥에 집어넣으려고 할 때 맥스는 동생을 구하기 위해 나서지만 아무 대책도 없는 그는 마녀들에 의해 꼼짝없이 죽을 팔자인데, 그 때 이 오누이를 구해내는 사람이 바로 알리슨이다. 알리슨은 비명을 지르거나 숨거나 도망가는 대신 마녀의 빗자루와 묵직한 무쇠팬으로 마녀들을 공격해 다니와 맥스를 구해낸다. 맥스의 어리석음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데, 영화 말미에 이르러서 마녀들을 물리쳤다고 믿고 악마의 책을 펼쳐서 내용을 읽어보겠다는 허세를 부리다가 결국 마녀들을 불러들여 다니가 납치되게 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3. 플레이보이를 전복시킨 세라
세라가 어린이들을 잡아먹기 위해 유혹하는 노래 Come Little Children
사라 제시카 파커가 연기한 셋째 세라는 아름답고 섹시한 마녀로 마음에 드는 남자는 누구라도 유혹할 수 있는 인물이다. 세라의 능력은 유혹이기 때문이다. 세라는 천진난만할 정도로 자신의 욕구에 충실하다. 어린 아이를 꼬셔서 목숨을 빼앗는 것이나 자신이 남성을 유혹해 섹스를 즐기는 것이나 세라에게는 똑같은 즐거움의 하나일 뿐이다. 세라는 과거에는 언니의 약혼자였던 빌리를 유혹했고 현재에서는 버스 운전사부터 악마 분장을 한 할로윈 파티의 중년 남성, 그리고 온 마을의 아이까지 모두 유혹할 수 있는 유혹의 화신이다.
플레이보이의 여성형은 플레이걸이 아니라 창녀였다. 노는 남자는 호탕한 존재지만 여성이 놀아나면 창녀가 됐다. 성을 가지고 노는 것은 남성만의 권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세라는 남성을 유혹하고 아무 의미 없이 버린다. 심지어 버릴 때조차도 달콤하다. ‘아침이 되면 날 미워할 거야.’ 하고 말하는 세라에게 버스기사는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고 맹세한다. 나쁜 남자의 전용 대사를 유혹의 달인 세라가 서슴없이 내뱉는다.
세라는 가부장제가 제도 아래 처박아두기를 원하는, 사실은 두려워하는 여성상인 마녀와 창녀의 이미지 두 가지 모두를 전복시킨다. 마녀를 떠올릴 때 특히 서구에서는 여전히 사마귀로 뒤덮인 사팔뜨기 노파를 떠올린다. 하지만 세라는 젊고 아름답고 무구하고 욕망에 더할 나위 없이 솔직하며 미안한 줄 모른다. 남성들이 번식은 수컷의 본능이라고 외칠 때 세라는 방싯 웃으며 자신의 본능을 실현한다. 그리고 심지어 영화 속에서 세라는 나쁜 여자조차도 아니다.
4. 알리슨과 다니
알리슨과 다니는 실제 창작자들이 의도했든 안했든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는 존재들의 상징과도 같다. 그것은 바로 어린 여자. 성인이 되지 않은 알리슨과 아직 어린이인 다니는 극중에서 가장 영민하고 과감하며 뛰어난 결단력까지 갖췄지만 어른들은 물론 처음에는 다니의 오빠이자 알리슨의 고등학교 동기인 맥스조차도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하지만 맥스는 이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던 그 위치에 반대로 자신이 놓이게 된다. 그것은 할로윈 파티장의 어른들 앞에서 샌더슨 마녀 자매를 고발할 때다. 어른들은 할로윈에 마녀를 고발하는 ‘어린’ 맥스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부모님과 사회자 등의 어른들의 모습에 답답해 가슴을 치지만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이 경험을 통해 맥스는 비로소 다니와 알리슨과의 진정한 동지 관계가 된다.
알리슨과 다니는 맥스가 검은 불꽃 초를 켜려고 할 때 만류할 뿐만 아니라 모든 반격은 이 둘에게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니는 심지어 무시무시한 세 마녀에게 둘러싸였던 샌더슨 자매들과의 첫 만남에서조차 자신이 할로윈 의상으로 입은 마녀 의상을 빌미로 마녀들에게 ‘언니들, 돌아오기를 기다렸어!’ 하고 임기응변을 발휘하는 미래가 기대되는 영민함을 발휘한다. 알리슨이 마녀의 빗자루로 메리를 공격하고 후라이팬을 휘두르자 서슴없이 자신의 사탕바구니를 휘둘러 위니를 때려눕히고 위기를 벗어난다. 게다가 극중에서 가장 어린 만큼 가장 열린 마음의 소유자인 만큼 말하는 고양이를 보고 무서워하기보다 환호하고 좀비가 한 편으로 들어오자 환한 웃음을 지어보인다.
비록 알리슨이 다니의 오빠인 맥없는 맥스와 마지막 즈음에서 입을 살짝 맞추긴 하지만 실제로 이 안에서 더욱 끈끈한 관계인 사람은 다니와 알리슨이다. 알리슨은 알리슨대로 처음 마녀들과 대면했을 때 혼자 도망치지 않고 용감하게 마녀들을 공격할 뿐만 아니라 납치된 다니를 구하기 위해 자동차 해드라이트를 이용해 아침 해로 위장할만큼 영리하다. 마녀들의 대화를 듣고 마녀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할로윈 단 하룻밤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마법책을 해석해서 소금을 뿌려 만든 원이 마법을 무력화 한다는 것을 알아내는 것도 알리슨이다.
알리슨은 단 한번도 꺄아 하고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알리슨은 극중 내내 몸을 움직이기 편한 슬렉스와 따듯한 셔츠 차림이다. 어린 다니가 검은 고양이의 모습을 한 데커리 빙, 좀비로 살아난 빌리 등과 콤비 플레이로 활약할 때 든든하게 그 뒤를 받쳐주는 것은 오빠인 맥스가 아닌 알리슨이다.
5. 샌더슨 자매의 ‘원’
샌더슨 자매들의 우애는 상당한 깊이를 지닌다. 성격 급하고 욱하기 일쑤인 위니지만 두 자매를 살뜰하게 챙긴다. 비록 말로는 두 동생이 걸림돌이라고 하지만 위니의 모든 행동은 두 자매와 함께 영원히 살기 위해서다. 위니는 막내인 세라가 자신의 약혼자와 바람이 나지만 단 한 번도 세라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 책임은 오전히 빌리에게 묻고 자신을 배신한 빌리의 입을 꼬매고 산 채로 매장해 버릴지언정 세라와의 사이에는 변함이 없다. 메리는 급한 마음에 화를 내는 위니를 진정시킨다. 그 방법은 그들만의 ‘원’을 만드는 것이다. 세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고 원을 그린 뒤 심호흡과 서로에 대한 격려와 웃음으로 심신을 가라앉히고 다시금 평정을 되찾는다. 이보다 더 서로를 아끼는 자매들이 어디 있단 말인가.
6. 샌더슨 자매에게도 결점은 있다.
결점 없는 인간이 어디 있던가. 아니 무엇보다 그들의 결점은 그들이 악마를 섬기는 마녀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 할로윈 코미디 영화의 주인공들은 마녀인 것을. 마녀로서 그들이 지난 단점은 제각각이다. 위니프래드는 못생긴 외모에 대한 열등감으로 인한 복수심이 문제라서 눈 앞에 놓인 쉬운 먹잇감을 버리고 자신을 모욕한 다니를 쫓는다. 때문에 외모를 평가당하면 분노한다. 샌더스 자매들을 보고 ‘못생긴 여자들이 꼭 마지막까지 남는다’고 조롱한 마을의 불량배들은 새장 속에 갇힌다. 이 세 마녀는 타인으로부터 평가받기를 결코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물론 외모에 대한 위니의 열등감은 이들을 마녀로 만드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이들 역시 탄탄하고 완벽한 마녀들은 아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그러한 사실마저도 이들을 흠 많은 코믹 캐릭터로서 완전하게 만들어주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마녀로서 메리의 약점은 너무 인간적인 긍정적인 성격이고 세라의 약점은 놀기를 너무 좋아하는 점 정도다. 이 세 사람은 삼백년 전 마녀로 몰려 불태워지기보다는 차라리 반사회적인 짓을 해서라도 영원한 삶을 살기를 원했다. 그들은 이승도 함께, 지옥도 함께, 저승도 함께 한다. 마지막 순간 이들이 서로에게 안녕을 고하는 장면의 아스라함은 결코 악당의 최후라고 볼 수 없을 정도다.
마녀들이 새벽 햇살에 소멸되는 마지막 장면. 맥스가 처음으로 동생인 다니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을 통해 오누이는 서로에 대한 애정을 확인하기도 한다.
7.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마녀의 열등감과 욕망이 영원한 삶 그 자체보다 지나치게 외모에 치중되어 있는 것은 어쩌면 디즈니사의 한계라고 생각하기로 하자.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비록 이 영화가 디즈니가 제작한 것이라 해도 단 한 명의 공주도, 왕자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안에는 평범한 복장의 십대가 평범하지 않은 할로윈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이 담겨있지 않은가. 비록 이 영화가 가족애의 회복과 고난을 함께 극복한 십대들의 짝짓기로 귀결되기는 하지만 그 모든 과정에서 주체적이고 유머러스하며 배꼽 잡게 웃긴 여성 인물들이 가득하다. 이 사랑스러운 영화가 부디, 배트 미들러의 말처럼 ‘더 늙기 전에’ 무대 뮤지컬로 만들어지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