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한 여성이 되어 돌아온 <컬러 퍼플>의 주인공 셀리
초연 Broadway Theatre (12/01/2005 - 2/24/2008)
재연 Bernard B. Jacobs Theatre (12/10/2015 - 1/08/2017)
대본 Marsha Norman
작곡/작사 Brenda Russell, Allee Willis, Stephen Bray
원작 Alice Walker
연출/무대 디자인 John Doyle
“어린 여자 아이들은 영원히 어리지 않다. 그들은 당신의 세계를 박살낼 강력한 여성이 되어 돌아온다.” 미국 체조팀의 주치의였던 래리 나사르에게 성폭행을 당했던 카일 스티븐스가 재판정에서 그의 범죄를 증언하며 한 말이다. 강력한 여성이 되어 돌아오기까지 때로는 오랜 세월이 걸리기도 한다. 뮤지컬 <컬러 퍼플>의 주인공 셀리처럼.
줄거리
뮤지컬 <컬러 퍼플>은 앨리스 워커가 1982년에 발표한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다. 1909년부터 1948년까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작품이 시작될 때 셀리는 아버지의 강간으로 두번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다. ‘파’라고만 불리는 아버지는 셀리의 아이를 돼지새끼 팔아 치우듯 순회목사 부부에게 넘겨버리고 셀리마저 이웃의 ‘미스터’에게 몇 푼의 돈을 받고 시집보내 버린다. 열 네 살 셀리에게 결혼은 명목일 뿐, ‘미스터’의 집에 묶인 무급 가정부나 마찬가지다. 셀리의 유일한 낙인 두 살 아래의 아름다운 동생 네티가 아버지의 강간 위협을 피해 찾아오자 미스터는 전에 없던 호탕함을 보이며 손님으로 받아준다. 미스터는 곧바로 네티를 강간하려 들고 네티가 거부하자 악담과 함께 쫓아버린다. 네티는 도망가며 셀리에게 목숨이 붙어있는 한 편지를 쓰겠다고 약속하지만 편지는 한 통도 오지 않는다. 결국 셀리는 네티가 죽었다는 비극적인 결론을 내리고 묵묵히 죽음같은 나날을 보낸다.
셀리보다 나이가 많은 미스터의 아들이 여자친구 소피아를 데리고 오면서 샐리의 인생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소피아는 누구도 자신을 때리지 못하게 하겠다는 여장부. 처음에는 그런 소피아가 낯설었던 셀리지만 이내 소피아의 존재는 셀리에게 남모를 환희를 안겨준다. 셀리는 서서히 변화해간다. 셀리를 한 명의 인간으로 각성케 하는 것은 남편의 정부인 가수 셕이다. 셕이 머물며 침실에서 쫓겨나게 된 셀리는, 오히려 아름다운 가수인 셕으로부터 인생은 즐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우고 셕에 대한 깊은 애정을 품게 된다. 셕이 미스터의 침대 밑에서 네티가 오랫동안 보내온 편지 꾸러미를 찾아낸 이후 셀리는 미스터를 용납하지 못하게 된다. 셀리를 강간했던 아버지가 죽자 셀리는 자신을 협박하는 미스터에게 통렬한 비웃음을 돌려주며 그를 떠나 옛집으로 돌아가 바지 전문점을 열어 성공한다. 혼자 남은 미스터는 과거를 후회하며 네티와 셀리의 아이들에게 연락해 셀리와 만나게 해주는 것으로 용서를 빈다.
열 네살의 셀리, 쉰 네살의 셀리
<컬러 퍼플>의 초연에서 셀리를 연기했던 라 샨즈와 재연에서 연기한 신시아 에리보는 둘 다 그 해의 토니상 뮤지컬 부분 여우 주연상을 거머쥐어 이 배역이 얼마나 강렬한 캐릭터인지를 증명해 보였다. <컬러 퍼플>의 셀리 역을 맡은 배우는 1909년의 열 네살부터 1949년까지의 쉰 네살까지를 연기해야만 한다. 십대부터 오십대까지 그야말로 질곡의 세월을 그려내지만 무대는 영화처럼 리얼하게 늙어갈 수 없기에 이는 전적으로 배우들의 몫이다.
셀리는 처음 등장해서 1막이 끝날 즈음까지 거의 자신의 의견을 입 밖에 내지 않는 인물이다. 셀리의 동생 네티는 똑똑하고 예쁘다는 이유로 학교에 보내지지만 셀리는 못생기고 내성적이라는 이유로 학교도 가지 못한다. 배울 곳이라고는 자신을 강간한 아버지밖에 없는 셀리는 학교를 다니는 네티를 통해 처음으로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배운다. 여자는 아이를 낳고 결혼을 원하고 집안 일이나 해야 한다고 알고 있던 열 네 살 셀리에게, 열 두 살 네티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기 전에 더 많은 세상을 알고 싶다고 말해 셀리를 놀라게 한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바닥을 닦으며 살던 셀리에게 하늘에 별과 달이 있고 그 별과 달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한 궁금함을 심어주는 것도 네티고 글자를 가르쳐주는 것도 동생인 네티다. 네티는 극 초반에 아주 잠시 등장했다가 마지막 순간에야 다시 등장하지만 셀리의 인생 전부를 지탱해주는 가장 강력한 인물이자 셀리가 생을 포기하지 않게 해주는 내면의 버팀목이다.
셀리에게 삶을 가르쳐 준 여성들
네티가 사라진 후 짙은 슬픔 속을 헤매던 셀리의 눈을 다시 뜨게 해주는 인물은 소피아다. 소피아의 아버지는 셀리의 아버지와 다를 바가 없는 인물이었지만 소피아는 참지 않았다. 집을 박차고 나와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자신의 마음에 드는 남자를 잡았다. 소피아가 말을 함부로 한다는 말을 듣고, 처음에 셀리는 아버지나 남편에게서 들은대로 ‘그런 여자는 때려줘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자 소피아가 소매를 둥둥 걷어올리고 셀리를 찾아와 아버지, 남자 형제들, 삼촌들, 사촌들과 싸워야만 했던 자신의 인생을 노래한다. 소피아는 셀리가 자신의 엄마처럼 얘기하는 것을 속상해 하며 말한다. "남자가 주먹을 들면 말해! ‘Hell No!' 라고." 이 노래는 소피아의 주제가와도 같은 노래다. 하지만 진짜 셀리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흔들 인물은 소피아 다음에 등장한다.
바로 미스터의 옛 여자친구이자 정부인 가수 ’셕‘이다. 미스터마저 집에서 애나 키울 여자가 아니라고 말할 정도인 셕은 자신의 매력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아는 여성이다. 셕은 셀리의 침대를 차지하고 미안해 하지만, 셀리는 지옥보다 싫었던 그 자리를 셕이 대신해 주어 감사한 마음 뿐이다. 게다가 셕은 아름답다. 셀리는 셕에게 반한다. 셕은 셀리에게 "신이 사람을 만든 이유는 인생을 즐기라는 것"이라며 컬러 퍼플의 의미를 알려준다. 눈가에 든 자주색 멍이 아니라 화려한 자주의 의미를, 그리고 셀리의 인생도 퍼플로 피어나야 한다고. 대체 셀리가 어떻게 하면 셕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1막에서 이렇게 다양한 인물들이 셀리의 인생에 끼어들어 가르치고 영향을 미친다면 2막에서의 셀리는 자신을 둘러싼 그 어떤 인물들보다도 단단하게 두 발을 땅에 딛고 서서 그들보다 훨씬 더 멀리 더 앞으로 나아가버린다.
나는 아름답다, 너는 필요없다
그렇다. 셀리는 강력한 여성이 되어 돌아와 자신을 옥죄던 가부장제를 상징하는 미스터를 박살내버린다. 자신의 유일한 행복이었을 네티의 편지를 숨겨두고, 자신을 물건처럼 취급했던 미스터. 셀리가 그를 벌레처럼 바라보며, 주먹을 올리는 그에게 ’Hell! No' 를 비수처럼 꽂아줄 때 낯선 옆자리 관객과 손을 맞잡고 환호하고 박수를 치게 되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결과다. 그 이후 셀리가 부르는 ’I'm Here' 에서 셀리는 사랑도 필요 없고 돌봄도 필요 없다고 노래한다. 한 때는 지친 몸을 지탱하는 유일한 공간이었던 의자가 이제는 자신만의 공간을 상징하는 의자로 변했고 감옥이었던 집도 이제는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진짜 집이 되었다.
그 안에서 셀리는 자신을 처음으로 돌아본다. 자신이 아름답다는 것을 발견한다. 평생 입어온 치마를 벗어던지고 바지를 디자인하는 여성이 된 셀리가, 당당하게 자신이 디자인한 노란 바지를 입고 돌아볼 때, 그곳에 있는 셀리는 아름답다.
<컬러 퍼플> 소설과 영화는 발표 직후 민권운동을 하던 사람들로부터 흑인 사회를 비하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작품 속의 흑인 남성들의 지독한 가부장제는 지독한 현실이기도 했다. 밖에서는 백인에게 억압 받아도, 집에 돌아오면 자신만의 노예인 여성을 부릴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가부장제이기 때문이다. 흑인 여성의 ‘해방’은 저 멀리 있는데도, 여성 운동은 흑인의 인권에 좋지 않다며 "해일이 밀려오는데 조개를 줍는다"는 식의 비난이 그 때에도 존재했었다. 기억할 수 있는 과거인 1980년대의 일이다.
원작자인 앨리스 워커는 아버지와 남편 배역에게 ‘애비’와 ‘남자’를 뜻하는‘pa'와 ’mister'를 붙이고 끝까지 이름을 불러주지 않음으로써 두 배역에게 엿을 먹임과 동시에 가부장제를 향한 냉소를 유지했고, 뮤지컬 대본을 쓴 마샤 노먼 역시 원작자의 기조를 충실히 이행한다. 마샤 노먼은 <Getting Out>, <'Night Mother> 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극작가로 <'Night Mother>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페미니스트 운동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