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드웨이를 이끄는 여성 캐릭터들 31. 롤라와 로렌

알다여성 주인공뮤지컬

브로드웨이를 이끄는 여성 캐릭터들 31. 롤라와 로렌

이응


뮤지컬 <킹키 부츠>

초연 2013년, Al Hirschfeld Theatre
대본 Harvey Fierstein(원작영화 "Kinky Boots")
작사/작곡 Cyndi Lauper
연출/안무 Jerry Mitchell
무대디자인 David Rockwell
의상디자인 Gregg Barnes
조명디자인 Kenneth Posner
음향디자인 John Shivers
수상 2013 토니상 뮤지컬 작품상, 스코어상, 남우 주연상(Billy Porter), 안무상, 연출상, 오케스레이션상, 음향디자인상

 

뮤지컬 <킹키 부츠>의 시작은 BBC의 다큐 시리즈였다. 망해가던 영국 노스햄턴의 신발 공장이 남성들도 신을 수 있는 하이힐인 ‘디바인’ 시리즈를 내놓으면서 새로운 성공을 일군 이야기다. 고전적인 남성 정장 신발을 만들어왔지만, 정장 구두의 입지가 점점 줄어들면서 새로운 활로를 찾다 틈새시장을 찾아냈다는 내용의 다큐에 드라마를 얹었다. 신발 공장에 전혀 관심없었던 방탕한 아들과 그에게 영감을 주는 드랙퀸이라는 상상의 존재다. 사실 신발공장에서 드랙퀸용 하이힐을 만들어낸다는 뼈대를 제외하면 완전히 새로 쓴 드라마다. 이 모든 아이디어의 출발점은 드랙퀸용 하이힐이다. 

이 뮤지컬은 토니상 역사상 최초로 여성이 작사가에게 주는 스코어상을 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바로 “Girls Just Want To Have Fun" 으로 유명한 팝가수 신디 로퍼다. 한 때 마돈나와 쌍벽을 이루었던 바로 그 사람.


줄거리

주인공 찰리는 대대로 살아온 노스햄턴을 벗어나는 게 꿈이다. 여자친구 니콜라와 런던의 부동산에 취업해 고향을 떠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부고를 받고 다시 고향의 아버지의 신발 공장으로 돌아온다. 공장을 곧 정리하고 런던으로 돌아가리라 마음 먹었지만, 어쩐 일인지 공장은 계속 돌아가고 그는 직원들의 월급을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하지만 경영 악화는 막을 수 없는 일. 직원들에게 해고 공지를 하다 로렌으로부터 틈새시장을 찾든가 하라는 충고를 듣는다. 

찰리는 런던의 친구에게 도움을 구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불량배에게 쫓기던 여성을 구해주려다 오히려 머리를 얻어 맞고 그 여성으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챨리를 번쩍 들어서 자신의 캬바레로 데리고 온 여성의 이름은 롤라. 드랙퀸 클럽을 운영하는 드랙퀸이다. 권투로 성공하라는 아버지의 바람을 깨고 게이라고 커밍아웃을 한 뒤 절연당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 찰리 역시 신발 공장을 이어받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바람을 거부했었다. 

롤라는 찰리에게 신발굽이 너무 잘 부러진다고 불평을 한다. 여기서 영감을 얻은 찰리는 공장으로 돌아가 로렌에게 도움을 구해 스틸레토 힐을 생산하기 시작한다. 롤라는 디자인 담당으로 공장에서 일을 시작하지만, 직원들은 낯선 롤라를 기피하거나 놀린다. 과거 복싱 챔피언이었던 롤라는 공장의 터프 가이인 돈과의 경기에서 일부러 져주면서 돈의 환심을 사고, 체면을 지켜주며 그들 안에 받아들여진다. 밀라노의 패션쇼에 신발을 선보이기 위해 런던의 아파트도 약혼자 니콜라 몰래 저당 잡혔던 찰리는 결국 니콜라에게 파혼 당한다. 

찰리는 로렌에게 애정을 느낀다. 하지만 과도한 스트레스로 롤라에게 ‘정상’적으로 입고 행동하라고 화를 내고, 롤라는 자신을 이해해 준다고 생각했던 찰리로부터 정체성을 거부당하자 찰리를 떠난다. 밀라노 패선쇼에 설 드랙퀸 모델들도 없이 혼자 휘청거리며 스틸레토힐을 신고 무대에 섰다가 쓰러진 찰리의 뒤로 롤라와 드랙퀸 엔젤들이 등장한다. 찰리는 로렌과의 사랑을 확인하고 롤라는 자신감을 되찾는다.

두 세계에 걸쳐 있는 사람, 롤라

원작 영화 <킹키 부츠>와 뮤지컬 <킹키 부츠>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점이 있다. 여성 캐릭터의 구현 방식이 다르다. 원작 영화는 찰리의 약혼자를 니콜라는 사치를 원하는 속물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뮤지컬 속의 니콜라는 자신의 꿈을 찾아 런던으로 향하는 인물이다. 찰리가 자신과 같은 꿈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지만, 막상 찰리는 그저 니콜라가 원하는 대로 따랐을 뿐이라며 비겁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니콜라는 변명을 일삼고 잠수를 타는 찰리를 견디지 못하고 이별을 선언한다. 

영화와 달리 니콜라는 자신의 동기와 꿈이 명확한 인물이다. 주인공 찰리가 시종일관 우유부단한 성격을 보여주는 데 반해 니콜라, 롤라, 로렌은 두 발로 지상에 단단히 서 있는 인물들이다. 이 작품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정말 강한지 확신하지 못하는 인물들은 모조리 남성들이다. 찰리의 소꿉친구이자 공장과 도시의 가장 강한 남자로 유명한 돈 역시 마찬가지다. 롤라를 보고 한 눈에 반해 추파를 던지는 돈은 남성이 여성의 옷을 입을 수도 있다고 상상조차 하지 않는 클래식한 마초다. 때문에 롤라가 ‘원래’는 남성이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롤라를 변태, 정신이상자의 분류함에 던져 넣고 쉴 새 없이 혐오를 분출한다. 그가 롤라에게 ‘굴복’하는 것은 권투에서 지고나서다. 그렇다. 그는 굴복한다. 힘 앞에서. 롤라의 관대함은 돈의 굴복 없이는 의미가 없다. 돈은 힘의 순위라는 철저한 남성 세계의 계급에 익숙해져 있는 인물이다.

힘 앞에서 한없이 유약한 남성 캐릭터들 사이에 겉으로는 강해 보이지만 내면은 한없이 연약하고, 아버지의 기대를 거부하면서도 아버지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이중적인 자아를 지닌 롤라가 있다. 롤라는 두 세계에 모두 걸쳐 있는 인물이다. 힘으로 남성의 세계에서 인정 받고, 성적 정체성으로 지닌 약점 때문에 여성들의 세계에서도 받아들여진다. 공장의 여성들은 롤라를 병균처럼 여기는 남성 노동자들과 다르게 롤라를 처음부터 자신들의 편으로 인정한다. 어떤 남자도 알아주지 않았던 자신들의 내면과 욕망을 롤라처럼 속시원하게 표현해주는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립하지 않는 여주인공, 로렌

그리고 이 여성들의 세계 안에 롤라의 사랑의 라이벌일 수도 있는, 아니,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로렌이 있다. 원작 영화 속의 로렌은 숏커트에 바지만 입는 보이쉬한 모습을 하고 있다. 뮤지컬 속의 로렌은 긴 머리의 직설적이고 재미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지나간 남자 관계를 줄줄이 주워섬기며 찰리와의 관계도 과거와 다르지 않을 거라는 알지만, 그러면서도 찰리에게 빠져드는 자신을 바보같다 생각한다. 청순하거나, 내숭을 떨거나, 아무것도 몰라요를 외치는 수많은 작품들 속의 여주인공들과 확연히 다를 지점에 서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낯선 인물도 아니다. 즉,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여성이다. 

로렌의 대표곡 "History of the Wrong Guys"의 도입부

특별한 롤라와 평범한 로렌이지만 무대 위에서는 오히려 로렌이 더 특별해 보인다. 뮤지컬의 여자 주인공이 갖추어야 할 장점으로 꼽히는 미덕들을 비웃고 있기 때문이다. 로렌과 롤라는 반목하지 않는다. 서로를 처음부터 인정하고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롤라가 이렇게 자신을 백 퍼센트 이해해 주는 로렌과 사랑에 빠지지 않고 찰리에게 빠지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어쩌면 주인공으로서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롤라는 주인공으로서 착실하게 성장해 나간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와 아버지로부터의 정신적인 독립을 이루어내고 자신감을 회복하고 자신의 드랙클럽으로 돌아간다. 로렌 역시 자신 안의 잠재성을 찾아내고 회사 안에서 중요한 위치에 오르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서슴없이 찰리에게 롤라에게 전화하라고 충고하기도 한다.

둘이 합쳐 한 사람?

영화에서나 뮤지컬에서나 연인으로서의 스파크와 영향력을 주고받는 것은 찰리와 롤라다. 그런데 왜 로렌이 불쑥 등장하는 것일까? 찰리가 로렌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로렌의 역할은 없다 해도 영화의 스토리가 진행되는 데는 거의 무리가 없다. 영화가 개봉한 해는 2005년이다. 뮤지컬이 개막한 해는 2013년이다. 성소수자라는 정체성이 더 이상 물 밑으로 가라앉을 소재도 아닌 시기에 나왔지만 여전히 스트레이트와 게이의 사랑은 먼 일이다. 

로렌은 롤라를 대신해 연애를 하는 인물이다. 실제였다면 가장 피 튀기게 찰리를 두고 신경전을 벌였어야 할 롤라와 로렌이지만 실제로 두 사람은 단 한 번도 의견이 어긋나지 않는다. 영화에서 공장의 사람들이 신발을 만드는 데 성공하고 샴페인을 마시는 동안 롤라는 로렌에게 손을 내밀어 춤을 신청한다. 이층 사무실에서 내려다 보는 찰리를 올려다 보며 롤라와 로렌은 한 몸처럼 한 방향으로 끌어 안고 함께 찰리를 바라본다. 

찰리가 롤라와 사랑에 빠졌어도 스토리에는 무리가 없다. 하지만 그랬다면 이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을 수도 있다. 영화는 극단적인 퀴어 영화로 분류되고, 그 안의 장점들은 모두 무시당했을 수도 있다. 뮤지컬 대본을 쓴 하비 파이스타인은 로렌을 없애는 대신 로렌에게 새로운 지위를 준다. 있어도 없어도 좋은 대리 연애를 하는 캐릭터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찰리에게 먼저 손 내밀 수 있는 인물로 바꾸고, 니콜라를 비롯해서 공장의 다른 여성들에게도 허리에 두 손 얹고 직언을 하는 캐릭터로 바꾸었다. 

정해진 운명?

사실 영화에서 롤라가 등장할 때 부르는 노래 ‘Whatever Lola Wants'는 뮤지컬 <Damn Yankees!> 에서 여자 주인공인 롤라가 부르는 노래다. <Damn Yankees!>는 파우스트를 각색한 코믹 뮤지컬인데, 남자 주인공은 악마와 계약을 해서 젊음과 야구 실력을 얻어 우승을 코 앞에 둔다. 하지만 약속 기간 안에 다시 늙은 몸으로 돌아가야 그의 영혼이 악마의 계약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걸 막기 위해 악마는 오래 전에 자신에게 영혼을 판 매력적인 여성 롤라를 불러내어 남자주인공인 짐을 유혹한다. 

그 때 롤라가 부르는 노래가 바로 영화 <킹키 부츠>에서 롤라가 찰리와 로렌 앞에서 부르는 이 노래다. 이 노래를 부를 때 이미 롤라의 운명은 결정지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Damn Yankees!>의 롤라는 짐을 유혹하는데 실패하지만 짐과 사랑에 빠져 그에게 악마의 유혹을 벗어날 방법을 알려준다. 뮤지컬 속의 롤라 역시 주인공인 찰리와 사랑에 빠지지만 그의 사랑을 얻을 수는 없다. 처음부터 롤라와 찰리는 이루어질 수 없는 운명임을, 이 오래된 뮤지컬 넘버가 알려준다. 

롤라와 로렌은 함께 찰리를 사랑하고 돕고 찰리를 성장시킨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찰리가 "네가 나를 더 나은 사람이 되게 만들어줘" 라고 말하는 사람이야말로 실제 연인이 되어야 한다. 그건 롤라다. 구출을 당하고 눈을 뜨게 해주고,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고,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해 준 사람. 하지만 찰리의 연인은 로렌이다. 두 주인공 사이에서 뮤지컬 대본을 쓴 하비 파이어스타인이 얼마나 줄타기를 잘 했는지는 이 뮤지컬의 상업적 성공이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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