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미녀와 야수(Beauty and the Beast)>
벨(Belle). 프랑스어로 아름답다는 뜻의 형용사. 동시에 뮤지컬 <미녀와 야수>의 주인공 이름이다. 벨은 2017년 리메이크 버전 디즈니 영화에서 자기 입으로 "난 공주가 아니야"를 외치지만, 소용없다. 벨은 전형적인 디즈니 공주다. 어차피 이야기 끝에는 왕자의 아내가 되어 왕궁을 차지하니까.
미녀와 야수 이야기는 프랑스의 오랜 전설이다. 전설 속에는 벨에게 질투심 많은 두 언니가 있어서 유복한 생활을 망가뜨리고 싶어한다. 디즈니는 옛날 이야기를 그대로 남겨두는 법이 없는 것으로 유명한데, <미녀와 야수>는 질투심 많은 언니들을 지우는 대신 ‘우매한’ 마을 사람들을 투입하고, 야수의 성에도 마법에 걸린 시종들을 투입한다. 그래도 나름 전설의 기승전결은 충실하게 따른다.
뮤지컬 <미녀와 야수>의 벨은 여기가 아닌 또 다른 세상을 꿈꾸는 당찬 성격의 소유자로, 책에 코를 박고 인생을 허비하기에는 지나치게 예쁜 얼굴을 지녔다. 덕분에 마을의 여성들이 모두 선망하는 가스통의 사랑을 한 몸에 받지만, 벨은 가스통의 청혼을 단박에 거절할 정도로 ‘껍데기’에는 관심이 없다. 벨의 평화로운 나날은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야수의 성에서 밤을 보내며 깨진다. 벨이 원하던 장미 한 송이를 꺾은 죄로 아버지는 감옥에 갇히고, 벨은 아버지 대신 성에 남기를 자청한다. 처음에는 도망갈 궁리만 하던 벨과 짐승의 습성을 못 버린 난폭한 야수는 사사건건 대립하지만, 탈출을 시도하던 벨이 늑대에게 습격 당할 때 달려와 구해준 야수 덕분에 둘 사이는 점점 가까워진다. 모든 성의 식구들은 성급한 해피엔딩을 꿈꾼다.
그러나 야수가 보여준 거울을 통해 아버지가 정신병원으로 잡혀갈 위기에 처한 모습을 보고 발을 동동 구르는 벨에게 야수는 그 거울을 쥐어주고 아무 조건 없이 보내준다. 벨이 마을 사람들에게 아버지가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거울을 들어 야수를 보여주자, 가스통은 야수를 없애고 벨을 차지할 속셈에 마을 사람들을 부추겨 야수의 성으로 쳐들어온다. 가스통의 야비한 싸움에 말려 목숨을 잃어가는 야수를 붙들고 벨은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그 순간 성을 옥죄고 있던 저주는 풀리고 야수는 왕자로 변신하여 벨과 결혼한다. 1991년에 개봉한 영화와 1994년에 개막한 뮤지컬은 내용에 있어서 거의 차이가 없다. 만화냐 아니냐의 차이만 있을 뿐 의상이나 분장, 무대 디자인도 영화를 충실하게 재현했다.
가해자를 사랑한 피해자?
사실 따지고 보면 이 뮤지컬의 내용은 전형적인 '스톡홀름 신드롬'이다. 납치 당한 피해자가 납치한 가해자와 동화된다. 원작에서는 마법에 걸린 성에선 아무것도 가지고 나가면 안된다는 룰이라도 있었지만, 뮤지컬에서 벨은 그저 벨의 아버지가 꺾은 것이 하필 장미라는 이유로 납치된다. 야수로 변한 왕자는 자신이 그런 저주를 받게 된 이유가 장미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내내 원망하고 있었기에, 자신에 비하면 벨이 평생 갇히는 건 가벼운 벌이라고 생각한다. 야수는 자신의 비극이 세상에서 가장 큰 비극이라고 서슴없이 믿는 독선적인 인물이다. 그에게 아름다운 벨이 나타난다. 야수는 벨의 아름다움에 흔들린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사람이 야수인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벨은 아버지 대신 영원히 성에 갇히겠다고 하지만 언젠가는 탈출할 수 있을 거라 굳게 믿는다.
재미있는 것은 벨의 성격이다. 벨은 처음 등장하는 그 순간부터 완전무결한 인물이다. 호기심 많고 책을 좋아하는 성격은 비록 그 시대에는 걸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현대의 관객 눈에는 마을 사람들이 틀리고 벨이 옳다. 게다가 성격은 밝고 똑부러져서 자신의 남성적인 외모만 믿고 프로포즈하는 가스통을 비웃기까지 한다.
가스통과 벨은 이 작품 안의 주요 등장인물 가운데 처음 성격을 마지막까지 그대로 밀고 나가며 전혀 변함이 없는 인물이다. 벨은 눈꼽만큼도 변하지 않는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아무리 요동쳐도 벨의 생각이나 성격은 변할 데가 없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세팅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변하는 것은 야수와 아버지다. 이 두 남자는 벨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사이좋게 같은 길을 걸어간다. 둘 다 처음에는 벨을 과하게 보호하다가,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길로 보내준다. 사랑하기 때문에.
이 모든 ‘과감’한 성격은 야수를 마주쳤을 때 당당하게 기죽지 않고 맞서기 위해서 필연적인 요소다. 누구도 벨에게 싫어하는 일을 강요할 수 없다. 가스통도 아버지도 야수도 마찬가지다. 벨은 뮤지컬 내내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 모든 인물들은 벨의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벨은 너무나 옳기에 심지어 야수마저도 잘생긴 왕자로 탈바꿈하여 벨에게 주어지는 상처럼 보일 지경이다.
당차고, 멋지고, 완벽한 여자?
벨의 유일한 단점을 굳이 꼽자면, 그것은 호기심과 충동적인 성격이다. 호기심은 벨을 저주 받은 장미가 있는 서쪽 탑으로 이끄는 장면에서, 충동은 사람들 앞에서 야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이조차 명백하게 악의가 없는 행동이다. 오히려 벨의 행동은 클라이맥스를 이끌기 위한 필수 요소다.
사실 벨의 성격에서 가장 큰 약점은 선량함 그 자체다. 그는 자신과 아버지를 번갈아 가둔 야수로부터 탈출하다가 만난 늑대로부터 지켜주었다는 이유로 야수에게 호감을 품고 야수를 부축해 성으로 돌아온다. 현실적으로 야수 없이 늑대가 우글거리는 숲을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판단도 있었겠지만, 그 이후 벨은 야수의 매력을 찾고 그를 용서하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벨은 등장하는 모든 인물을 가르치고 깨닫게 하고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지만 정작 그 자신이 정말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다. 첫 장면에서 벨은 그저 여기가 아닌 다른 곳, 더 넓은 곳으로 가기를 원한다고 노래한다. 2017년 리메이크 영화에서는 아예 학교를 가지 못하는 여자 아이들에게 책을 가르치기도 한다. 그럼에도 결국 벨이 진짜 되고 싶은 것,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단지 벨이 등장하는 첫 장면을 통해 벨이 편견이 없으며 외모보다는 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며 몽상가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
그토록 완벽해 보이는 벨이 갇혀서 죽을 때까지 나올 수 없었던 성은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는 그 낡디 낡은 문구다. 야수는 올바른 벨에 의해 사랑을 깨닫고, 마을 사람들은 벨의 용기로 자신들의 무지와 편견을 깨닫는다. 언뜻 아름다워 보이는 풍경이지만, 그 안에는 폭력의 피해자가 가해자를 변화시켜야만 한다는 틀이 있다.
벨이 완벽하고 멋진 성격이었기에 가해자였던 야수는 멋진 남편으로 변신한다. 만약 내 곁에 있는 남자가 야수라면 그 책임은 야수가 아닌 나의 것이다! 이 작품이 말하는 무서운 결말은 이것이다. <미녀와 야수>는 결국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는 왜 맞고 사니, 너는 왜 너의 남자를 변화시키지 못하니, 너는 그만한 능력이 없는 거나 충분히 선하지 않은 게 아니니? 그 중심에 벨이 있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완벽한 ‘여성’이. 2017년의 ‘페미니즘’ 적 해석을 새로이 가미했다고 주장하는 실사 아닌 실사 영화도 이 사실을 피해 가지는 못한다.
이토록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뮤지컬 <미녀와 야수>는 십년을 넘게 롱런했다. 하워드 애쉬먼의 위트 넘치는 가사와 알란 멘켄의 귀에 쏙 들어오는 멜로디에 담긴 캐릭터들이 주는 매력이 만만치 않다. 전형적인 스톡홀름 신드롬인 줄거리는 밀크 초콜렛을 씹다 딸려 나오는 아주 작은 은박지 조각인 듯 가볍게 외면하고 계속 먹고 싶게 만들 정도다. 그것은 동화의 힘일까, 춤추는 촛대 뤼미에르의 매력일까. 차마 알고 싶지 않을 정도로 이 작품을 좋아하고 있기에, 벨이 야수의 성에서 안주하지 않기를 그나마 간절히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