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드웨이를 이끄는 여성 캐릭터들 11. 크리스틴 다에

알다여성 주인공뮤지컬

브로드웨이를 이끄는 여성 캐릭터들 11. 크리스틴 다에

이응

일러스트레이션: 솜솜

뮤지컬 <Phantom of the Opera>

초연 브로드웨이 Majestic Theatre(1988 - 공연중)
작곡 Andrew Lloyd Webber
작사 Charles Hart, Richard Stilgoe
대본 Richard Stilgoe, Andrew Lloyd Webber
원작 Gaston Leroux
연출 Harold Prince
무대,의상 디자인 by Maria Björnson
Tonys Awards 수상 경력
1988년 작품상, 스코어상,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 무대 디자인상, 무대의상상, 무대조명상, 안무상, 연출상 수상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뉴욕 브로드웨이 상연 30주년이 훌쩍 지나갔다. 런던 웨스트앤드에서는 오는 9월에 32주년을 맞는다. 시리즈물 제목과 달리 <오페라의 유령>의 여성 캐릭터 크리스틴 다에는 30년이 넘도록 바뀐 게 없다. 연출가인 해롤드 프린스가 "보이지 않는 손길이 작용한 것 같았다"고 인터뷰에서 말했을 정도로, 이 작품의 흥행신화는 작품 내용처럼 미스테리다. 

주인공인 ‘유령’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존재다. 원작 소설에는 이 유령이 돈과 명성을 쌓는 과거가 그의 옛 동료의 입을 통해 나름 상세하게 등장한다. 그러나 뮤지컬에서는 그저 이미 많은 것을 이룬 그의 마지막 나날들, 즉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 이후의 모습만을 그린다. 쉰이 넘은 그가 사랑에 빠진 사람은 이제 막 스물이 된 크리스틴 다에다. 

뮤즈의 조건?

크리스틴 다에의 겉모습은, 후편이라고 할 수 있는 <Love Never Dies>의 표현을 빌리자면 "애 엄마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처녀 같으며 번개가 치는 듯이 눈이 멀듯한 아름다움"을 지닌 사람이다. 비록 뮤지컬 속에서 유령인 에릭이 크리스틴 다에가 혼자 노래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그 목소리에서 가능성을 발견하여 교육을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눈이 번쩍 뜨일 아름다움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크리스틴의 이 아름다움은 작중에선 오직 두 남자에게만 작용한다. 유령인 에릭과 크리스틴의 어린 시절 친구였던 라울 드 샤니 자작. 이 두 남자는 누가 더 크리스틴의 아름다움을 칭송할 수 있는지를 경쟁이라도 하듯 크리스틴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소유권'을 주장한다. 크리스틴이 작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는 것이 바로 '둘 중 누구를 더 사랑할 것이냐'에 대한 응답이다. 크리스틴이 선택한 것은 잘생기고 젊은 라울 드 샤니 자작이고, 이는 유령이 지닌 광기를 모두 끌어올려 광분에 휩싸이게 만든다. 

오페라의 유령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파리 오페라 극장의 발레이자 코러스인 크리스틴은 남몰래 유령에게 노래 공부를 '당하는' 중인데, 극장주가 바뀌며 주연 배우가 유령으로부터 모욕을 당하고 극장을 떠나자 크리스틴이 주연으로 올라선다. 하지만 유령의 정체가 음악의 천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크리스틴이 유령이 아닌 소꿉친구 라울과 사랑에 빠져 함께 도망칠 것을 결의한다. 분노한 유령은 크리스틴을 납치하고 라울을 죽이려 들지만, 크리스틴의 키스에 마음이 녹아 모두 살려주고 자신은 몸을 감춘다는 이야기다. 원작에서는 결말부에 유령의 시신을 발굴하지만 뮤지컬에서 마술 같은 그의 능력으로 그저 사라질 뿐이다.

누구를 위한 순진함인가

크리스틴은 원작 소설에 묘사된 바에 의하면 "열 다섯 살짜리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영혼의 소유자"다. 열 다섯살이 과연 순수하고 깨끗한 나이인가에 대한 의문은 뒤로 하고, 이 묘사가 의도하는 바는 명확하다. 처녀라는 의미다. 크리스틴은 극중에서 마약이나 환각제에 취하기라도 한 듯이 유령에게 휘둘리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럴 수 있는 원인도 순진함이다. 그 순진함을 보여주는 가장 결정적인 장치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긴 유언을 사실이라고 믿는 모습이다. 바이올리니스트이자 크리스틴의 영혼의 단짝이었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며 "너에게 ‘음악의 천사’를 보내줄게"라고 말했던 것이다. 크리스틴은 모습을 보이지 않고 목소리로만 자신을 훈련시키는 유령이 바로 그 음악의 천사이며 아버지의 친구라고 제멋대로 굳게 믿고 있다. 

하지만 이미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극 초반부, 유령이 처음 등장하기 전부터 크리스틴은 친구인 맥에게 그가 무섭다고 고백할 정도로 질려 있는 상태다. "그는 모든 곳에 존재하며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듣고 자신의 모든 것을 감시해서 무섭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가 모든 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친구의 "너의 선생님은 누구야?"라는 단순한 질문 한 방에 자신의 선생이 들으면 화낼 만한 말들을 술술 털어놓는다. 크리스틴은 이런 식으로 ‘순진’한 인물이다. 

크리스틴은 처음 유령에게 납치되어 파리의 지하 하수구에 자리잡은 그의 작업실에서 눈을 떴을 때, 이미 유령이 자신과의 육체적인 결합을 원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아니, 차라리 원하는 것이 그것 뿐이면 모를까, 유령이 원하는 것은 결혼이다. 크리스틴은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기절해 버린다. 억지로 외면했던 사실이 눈 앞에 현실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크리스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던, 유령이 음악의 천사가 아니라는 진실이. 아버지가 보낸 '음악의 천사'라면 이러면 안되는 것 아닌가.

남성이 욕망하는 뮤즈, 크리스틴

순진함은 종종 무식함, 혹은 멍청함과 동일시된다. 이는 오랜 남성 중심적 서사에서 남자와의 섹스를 경험하지 못한 여성 인물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즉, 남성과의 섹스를 경험하지 못한 여성은 세상의 가장 중요한 경험을 하지 못한 존재로 치부되는 것이다. 이런 여성 인물들과 사랑에 빠지는 남성인물은 전지전능하고 나이는 아버지뻘이다. 그들의 특징은 ‘노련함’이다. 그는 그러한 노련함 덕분에 여성의 손에 사로잡히지 않고 인생을 보내다가, 어리고 아름다운 여주인공에게 반해버린다. 주로 그간 자신이 알아왔던 여성들과 다르다는 게 이유인데, 이런 사실을 깨닫기까지 그는 산전수전 공중전 우주전에 이르는 다양한 경험을 쌓은 덕분에 자신의 감정에 매우 확신을 가진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명료하게도 다른 남성의 손길이 닿지 않은 ‘처녀지’일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여성이 종종 남성 예술가의 '뮤즈'이자 동시에 욕망의 대상이 된다. 뮤즈란 원래는 여신의 이름이기에 대부분 손에 잡히지 않는 인물들이지만, 순진한 어린 여성이 뮤즈가 될 때 그 대상은 강렬한 소유욕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크리스틴 다에는 이러한 공식에 전적으로 들어맞는 인물이다. 

크리스틴을 정의할 수 있는 단어라면 무엇이 있을까. 천진난만함, 순수함, 타고난 재능의 소유자. 여기에 유령은 자기 멋대로 ‘교활함’을 더한다. 자신을 이용하기만 하고 없애려 했다는 이유로. 그러나 과연 그것은 교활함일까? 아니면 순진무구한 크리스틴이 갖고 있었던 유일한 '무기'이자 자주성일까? 유령이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아마 크리스틴이 극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자신의 의사로 했던 일이 바로 유령의 제거를 위한 행동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무대 위에서 유령의 가면을 벗겨 정체를 만인 앞에 드러낸 것이다. 

크리스틴은 극장 여기저기 숨은 사수들 앞에 유령의 정체를 드러내 그들의 행동을 촉구하지만, 실제로 총을 쏴야 할 인물들은 눈 앞의 유령 앞에서 굳어버리고 크리스틴은 다시 익숙한 납치를 당할 뿐이다. 크리스틴이 할 일을 했을 때,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사람들은 바로 그 크리스틴을 구해주겠다고 호언장담했던 남성들이다. 당장 원작에서는 크리스틴의 애정을 얻고 보호하기 위해 많은 일을 하지만, 뮤지컬에서는 오로지 말만 하는 '남주인공' 라울부터가 그렇다. 

납치가 지겨워 유령의 가면을 벗겨버린 크리스틴

과연 크리스틴은 순진무구하고 수동적이기만 한 캐릭터일까? 드라마에서 크리스틴이 자신이 의지로 하는 선택은 단 둘 뿐이다. 노래를 배워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고 싶다는 성공에 대한 욕망, 그리고 라울에 대한 사랑이다. 뮤지컬은 라울과의 인연을 과거 소꿉친구 시절부터로 거슬러 올라가 이 사랑이 단지 그의 재력과 잘생긴 외모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보여준다. 크리스틴의 순수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작품 속에서 크리스틴은 모든 사건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지만, 그의 역할은 납치당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납치로 끝난다. 이 납치의 반복을 끊기 위해 크리스틴은 유령의 가면을 무대 위에서 벗겨버린다. 가면을 벗은 유령에게 어떤 일을 당할지 잘 알면서도 감행한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비록 그 용기가 무색하게 곧 납치당하지만). 두 번째로 자발적인 모습을 보여줄 때는 더욱 성장해 있다. 유령에게 목 졸려 죽을 위험에 처한 라울을 살리기 위해, 크리스틴은 스스로 유령에게 다가가 입을 맞추는 장면을 통해 극적인 성장을 보인다. 게다가 이전에는 유령의 음악만 들으면 마약이라도 취한 듯이 몽롱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크리스틴의 정신은 또렷하다. 

심지어 크리스틴은 유령을 뒤로 하고 지하세계를 떠나다가 다시 돌아와 유령이 자신에게 준 반지를 돌려준다. 유령이 자신을 다시 납치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없다면 돌아올 수 없었을 것이다. 유령에 대한 자신감이 아니라 크리스틴의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안타깝게도 크리스틴의 성장은 여기까지다. 뮤지컬이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 들여다 보면, 너무 강렬한 두 남성 인물들의 사이에서 휩쓸리면서도 크리스틴은 자신의 목표를 위해 조금씩 나아간다. 이 남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남자를 선택한다는 소극적 반항을 하면서도, 더 큰 배역을 맡아서 흔들림 없이 노래하는 모습에서는 강단 있는 예술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실제로 처음 납치되었을 때 그 자리에서 결혼당하지 않고 무사히 돌아온 것도 크리스틴이 유령과의 기싸움에서 지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더 강한 크리스틴을 기다리며

자세히 뜯어보면 크리스틴의 면면은 사실 그리 바보같지 않을 수도, 그리 순진하지 않을 수도 있다. 크리스틴은 무서운 유령의 위협에서 자신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가 무엇인지 직관적으로 깨닫고 행동하는 여성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뮤지컬 속에서 보여지는 크리스틴은 근본적으로 수동적이고 선택당하는 인물이다. 그가 성장해 가는 것은 그저 단편적으로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심지어 한국 공연에서는 인물의 수동성과 순진함이 더욱 더 강조되어 오로지 ‘무고함’을 주장하는 무기로만 사용된다. 

작곡가 앤드류 로이드 웨버는 급기야 속편까지 만들어 유령과 크리스틴의 사랑이 실제로 존재했던 진짜 사랑이었음을 웅변하지만, 속편은 잊자. 이 길고 긴 초연이 끝나는 날에는, 이 세상 어딘가에서 자신의 발로 성큼 성큼 무대 위를 걷는, 생각하는 인간으로서의 크리스틴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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