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아이다>
뮤지컬 <아이다>가 처음 개막했을 때, 뉴욕타임즈의 공연 수석 비평가인 밴 브랜틀리는 이 작품에서 볼만한 것이라고는 아이다역을 맡은 배우 헤더 해들리 뿐이라며 온갖 빈정거림을 쏟아냈다. 그리고 그 빈정거림 가운데 "이 약간의 페미니즘을 첨가한 작품"이라는 표현도 스치듯 지나간다. 그 때도, 어쩌면 지금까지도 그는 젊은 여성의 힘을 과소평가하고, 남성이 주인공인 작품을 칭송하며, 여성이 권력을 잡거나 바느질이나 요리 외의 일을 하는 역할로 등장할 때면 현실감이 없다는 비난을 서슴지 않으며 그것이 자신의 시니컬한 유머감각이자 현실감각이라고 만족하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그는 아이다 역을 맡기 전 <라이언 킹>의 사자 날라 역으로 토니상 여우 조연상 후보에도 올랐던 해더 해들리에게 "라이언 킹과 다른 점이라고는 타이즈와 사자 발톱을 버린 것뿐"이라고 폄하했고 암네리스 역을 맡은 쉐리 르네 스캇에게는 "쏟아질 것 같은 모자에 눌려 고개 가누기도 힘든 의상의 희생자"라며 빈정댔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두 배우의 한없이 진지한 연기 덕분에 원색의 애니메이션과도 같은 세상에 사실성이 부여되었고 진지한 드라마가 실현되었다.
그의 악평에도 불구하고 아이다는 흑자를 기록하며 4년 넘게 롱런했고, 밴 브랜틀리는 뮤지컬 <맘마미아>에 이어 그가 악평한 뮤지컬이 관객들에겐 사랑을 받아 다시금 비평가로서의 체면을 구기게 되었다. 뉴욕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인 뉴욕타임즈의 수석 비평가인 그는 신랄하고 시니컬한 문체로 유명하다. 2018년에는 브로드웨이 최초로 트랜스젠더 배우인 페퍼민트가 주연을 맡은 뮤지컬 <Head Over Heels>의 리뷰에서 트랜스젠더 혐오를 드러내는 발언을 해서 결국 뉴욕타임즈가 나서서 사과문을 개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뉴욕타임즈의 수석 비평가로 활동 중이다.
줄거리
암네리스는 이집트왕의 딸로 재상의 아들인 라다메스와 약혼한 사이다. 아름다운 외모와 화려한 옷이 자신의 무기라고 생각하며 따뜻한 물에 둥둥 뜬 듯한 기분으로 그와의 결혼과 행복한 미래를 꿈꾼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누비아 정찰을 다녀온 약혼자는 누비아 출신의 아이다라는 노예를 자신에게 선물해 주었을 뿐, 지나가는 말로라도 다정한 말 한 마디를 해주지 않는다. 노예는 더 필요없다고 거절하는 암네리스에게 아이다는 자신의 손재주를 어필해서 곁에 남을 수 있게 된다.
파라오는 라다메스와 암네리스의 결혼식을 일주일 뒤에 올린다고 선언하는데 어쩐 일인지 라다메스의 얼굴은 어둡다. 아이다는 라다메스가 이 곳이 아닌 다른 곳을 꿈꾸는 마음을 십분 이해하고, 이심전심이 통한 둘은 강렬한 이끌림에도 불구하고 적국이라는 이유 때문에 가시 돋친 말로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특히 아이다는 라다메스에게 선택권이 있는 자유인이 노예에게 위안을 바라지 말라고 쏘아붙여 오히려 라다메스가 아이다를 자신과 동등하게 여기며 대화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만든다.
이런 일들을 알 리가 없는 암네리스는 병세가 완연한 아버지를 걱정하며 공주로서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한탄하고, 아이다는 세상 걱정 없이 사는 줄 알았던 암네리스도 자신과 다를 바 없이 가족과 나라의 의무로 인해 걱정하는 걸 보며 무뚝뚝하지만 속 깊은 위로를 건넨다. 노예로부터 그런 위로를 받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던 암네리스는 아이다를 친구로 여긴다.
라다메스가 아이다에게 화해를 건네기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노예들에게 나눠준 것을 본 암네리스는 라다메스가 자신을 용서하고 관대함을 보인 것으로 착각한다. 하지만 결국 라다메스가 아이다에게 자신과의 결혼을 취소하네 마네, 사랑하네 마네, 같이 도망가네 마네 하는 대화를 들은 암네리스는 자신이 가장 믿었던 두 사람이 사랑하는 사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결혼이 얼마나 의미 없는지를 깨닫는다.
그토록 기대했던 결혼식 날이 다가왔건만 정작 당사자인 암네리스의 얼굴은 장례식장이라도 가는 듯 어둡기만 하다. 결국 결혼식은 올리지 못한 채, 아이다가 누비아 왕의 딸이며 그 왕과 도망치려는 것을 라다메스가 도와주다 두 명이 모두 잡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게다가 라다메스의 아버지 조세르는 자신의 아버지인 파라오에게 독을 먹여 건강을 악화시킨 장본인이라는 사실도 덤으로 따라온다.
어떻게 해도 사형을 면할 수 없는 처지가 된 라다메스와 아이다를 보며 암네리스는 왕위 계승자로서의 첫 명령을 내린다. 두 사람을 사막에 함께 매장하라고.
철부지, 왕이 되다
아이다와 암네리스는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중압감에 대한 공감대를 나누면서 백델 테스트를 거뜬히 통과한다. 암네리스는 극 후반부에 자신이 파라오가 되었다고 말한다. 혹자는 이집트 역사 상 여왕은 없었다며 고증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는데, 그런 말은 클레오파트라 앞에서는 삼가기로 하자.
운명
다른 이와의 관계를 통한 것이 아닌 인물 스스로의 운명이 있는가? 그 운명을 따르거나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가?
Yes, but...
1막까지만 해도 암네리스의 운명은 그렇게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암네리스가 처음 등장했을 때는 아이다와의 대척점에 있는 팔자 좋은 공주의 삶을 보여주기 위한 인물처럼 보인다. 약소국인 누비아의 공주로 태어나 무술은 물론 온갖 일을 다 배우고 해본 아이다와 달리, 강대국 이집트의 외동딸 암네리스는 수많은 시녀들에게 둘러싸여 놀고 먹으며 라다메스에게 사랑 받는 삶을 꿈꾸는 여성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 가진 듯 보이는 사람에게도 고민은 있다. 암네리스에게는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난제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아버지요, 나머지 하나는 약혼자다. 아버지는 좀처럼 병이 낫지 않고 점점 약해져가고, 약혼자의 마음은 점점 암네리스를 떠나간다.
애당초 라다메스의 마음은 암네리스에게 예의 말고는 없기도 했다. 라다메스는 하지 말란 놀이는 더 하고 싶은 어린아이처럼 자신이 속한 곳이 아닌 곳에서 자유를 맛보고 싶다는 ‘부잣집 어린이’ 다운 상상을 하는데, 그 상상에 공감하는 사람이 사실은 아이다 뿐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라다메스는 미처 알지 못한다. 가지지 못할, 가져서는 안 되는 장난감과도 같았던 아이다의 매력 앞에서 라다메스는 암네리스를 과소평가하고 알려고 노력하지조차 않는다. 라다메스가 끝내 아이다가 장난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두 사람은 이미 너무 깊이 서로에게 빠져든다. 두 사람에게 주어진 장애의 크기가 장난이 아닌 만큼, 열정도 활활 불타오른다.
반면 암네리스의 운명은 그들의 운명과는 다른 길을 걷는다. 사실 디즈니는 비극적인 동화나 원작의 이야기를 해피앤딩으로 바꾸는 데 전혀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 회사가 아니다. 인어공주는 물거품이 되기는커녕 바닷속도 지키고 사랑도 지키고, 헤라클레스는 불에 타지 않으며, 심바는 죽지 않고 왕이 되어 대를 이어가고, 콰지모도는 에스메랄다와 페뷔스의 사랑을 이어준다.
하지만 아이다는 원작의 비극적인 결말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암네리스는 질투에 불타 라다메스와 아이다를 옭아매는 대신, 자기 자신을 돌아본다. 자신이 정말로 라다메스를 사랑했는지, 자신은 이 결혼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암네리스에게 질문들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온다.
뮤지컬 속에서 암네리스의 드라마에 아이다만큼 구체적으로 성장하고 좌절하고 고민할 만한 순간을 충분히 주지는 않는다. 암네리스의 열린 태도를 가진 자의 너그러움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질투가 아니라 자기성찰을 선택함으로써 암네리스는 주어진 좁은 틀을 벗어난다. 암네리스는 비열한 음모로 죽어가는 아버지를 대신해 이집트의 왕이 되겠다는, 그토록 벗어나고자 했던 거대한 책임감이라는 자리로 걸어 들어간다.
목표
자신만의 목표나 신념이 있는가?
Yes
암네리스는 처음에는 아주 단편적인 인물로 사라질 것처럼 등장해서 그저 책임감보다는 단맛을 즐기는 인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라다메스나 아이다를 대하는 태도를 통해서 암네리스가 ‘진짜’ 관계를 원하는 인물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자신에게 아부하는 사람들과 그 아부에 둘러싸여 아부가 사실이든 아니든 신경 쓰지 않는 '전형적인' 공주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다처럼 아버지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자신이 찾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나서는 인물도 아니다. 암네리스는 어떻게 보면 ‘착한’ 조연 역할의 공주라는 전형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권력을 쥐었지만 흔들 줄 모르고, 타인을 의심하기 보다는 믿고 타인을 배려하기까지 하는.
그러나 암네리스가 아이다와 친구가 된 것은 자신을 깊이 이해해주는 동년배의 사람을 처음 만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저 사랑받으며 행복하게 살기를 원했고, 그런 삶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던 암네리스의 삶은 아이다와 라다메스를 통해 통채로 흔들린다.
뮤지컬이 끝나기 전에 암네리스는 자신의 목표를 분명하게 정한다. 이집트의 왕위를 이어받겠다는 것. 그것이 외부적인 압력에 의한 것이었다 해도, 암네리스에게는 다른 선택지도 분명히 있을 수 있었다. 라다메스가 아닌 다른 남자를 선택해 그에게 왕위를 넘기는 것. 그러나 암네리스는 자신이 왕이 되기를 선택했고, 그것을 파라오 앞에서 위엄을 통해 증명해 보인다.
일관성
플롯에 의해 캐릭터가 붕괴되지 않는가?
Yes
사실상 아이다와 암네리스 가운데 누군가가 비교적 플롯에 의해 캐릭터가 붕괴된다고 말한다면 아이다가 더 가깝다. 아이다는 직구를 던지는 인물이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일과 조국 사이에서는 직구가 통하지 않는다. 게다가 아이다에게는 비극을 맞을 운명이 이미 마련되어 있다. 어떻게 아이다를 비극으로 몰아넣을 것인가? 어떻게 아이다로 하여금 라다메스와 함께 죽도록 할 것인가? 그 대답은 사랑 앞에서 망설이는 아이다였다.
처음 뮤지컬 아이다를 보았을 때 라다메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겠다고 우기는 아이다를 보는 시선은 메렙과 거의 비슷했다. 저 여자가 공주고, 저 여자를 구하기 위해 내가 이 모든 위험을 무릅쓰다니! 게다가 나라의 운명이 저 핏줄에게 달렸는데 자기 사랑만 생각하다니! 속 터지는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사랑에도 운명에도 직구인 아이다를 애써 쌓아 놓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장면에서 열불이 나거나 안타까워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인 관객이 한 둘이 아닐 터였다.
하지만 암네리스는 다르다. 암네리스에게는 죽음이라는 운명이 주어지지 않았다. 암네리스에게는 스스로의 운명과 스스로의 길을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 그런 면에서 뮤지컬 <아이다>의 두 여성이 돋보인다. 왜냐하면 둘 다 다른 선택지가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다른 선택지가 아닌 이 길을 가는 이유가 그들의 성격과 행동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암네리스는 자신의 운명을 타인의 손에 의탁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스스로 왕이 되기를 선택하지, 등 떠밀려 왕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왕이 되기 위해 암네리스가 아닌 다른 누구를 흉내내거나 갑자기 엉뚱한 사람이 나오지도 않는다. 게다가 왕이 되기로 결심한 계기 가운데 하나가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두 사람에게 가장 관대한 방식의 죽음을 선사하기 위함이었다. 그 순간, 암네리스보다 더 용감한 인물은 무대 위에 없다.
결정
연애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의사결정을 하는가?
Yes
암네리스가 아이다와 라다메스의 죽음을 결정할 때, 그리고 평화를 선택할 때 암네리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분명히 애정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라다메스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고는 하기 어렵다. 암네리스가 살아온 길지 않은 인생 전체의 경험을 통틀어 고려하고 내린 결정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의 사랑 때문이 아니라 아이다와 라다메스를 위한 이타적인 결정이기조차 했다.
발전
플롯 속에서 변화나 발전을 이루는가?
Yes
암네리스는 발전한다. 그것도 가파르게 발전한다. 처음에는 라다메스의 애정을 의심하면서, 그 다음에는 라다메스의 선물이었던 아이다를 통해서, 그리고 마침내는 스스로의 성찰을 통해, 암네리스는 발전한다.친구냐 애인이냐를 두고 고민할 사이도 없이 두 사람이 반역을 저지르며 순식간에 결정을 내릴 순간이 다가왔을 때, 암네리스가 권력을 쥐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으로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두 여성이 한 남성을 두고 머리 끄댕이 잡고 싸운다'는 진부한 형태에서 벗어나 그곳에서 한 발 떨어져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어쩐지 좋은 이야기만 가득한 것 같지만 실제로 뮤지컬 <아이다>를 브로드웨이에서 처음 보았을 때의 기분은 좋지많은 않았다. 우선 권력을 상징하는 이집트인들이 씻어놓은 백자처럼 하얀 백인들이라는 사실을 눈 앞에서 보면서 기분이 좋지는 쉽지 않다. 마치 실사영화 <알라딘>을 보면서 시장의 상인들이 아랍 억양의 영어를 쓰는 걸 보는 기분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같은 나라 사람들인데 왜 알라딘과 자스민은 평범한 영어를 사용하는데 상인들은 액센트가 있는 영어를 구사할까. 마치 이민이라도 온 사람들처럼. 이집트인들이 하얀 백인들로 설정되어 있는 것은 너무나 명확하게 권력은 오직 백인의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 모습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그것을 ‘현실’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밴 브랜틀리스럽지 않은가?
그런 면에서 의외로 한국에서 뮤지컬 <아이다>를 볼 때는 전원 한국인 캐스팅으로 인해 그러한 불편함이 자연스레 해소되는 면이 있다. 물론 아이다의 헤어스타일은 여전히 흑인의 것으로 남기는 해도. 여성이 주인공이고 여성이 주체적인 뮤지컬이라면 그러한 모습을 홍보문구나 한 두 마디의 뜬금없는 대사가 아니라 잘 쌓인 드라마 안에서 보고 싶다는 바람을 뮤지컬 <아이다>는 채워준다.
여담이지만 라다메스의 아버지 조세르라는 이름은 실제 이집트에 존재했었던 파라오에서 따왔다. 게다가 그가 묻힌 계단식 피라미드는 영화 <미이라의 저주>로 유명한 임모텝이 설계했다고. 부디 '이 조세르'가 반란에 성공해 '그 조세르'가 된 것은 아니었기를 웃자고 한 번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