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 병원의 한 병실, 여자가 누워있는 노인에게 살충제를 들이붓고 있다. 조용한 병실 안엔 액체가 억지로 넘어가는 소리와 여자가 흐느끼는 소리만 들린다. 한참 뒤, 갑자기 고요해진 주위에 여자가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린다. 뒤를 돌아보니 입에 흰 거품을 문 노인이 석고 대리상처럼 가만히 누워있다. 병실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 적막함이 흐른다.
한동안 노인의 곁에 망연히 앉아 있다 아무 일 없는 듯 병문을 닫고 돌아가는 여자, 그녀의 이름은 소영(윤여정)이다. 소영은 종로의 ‘박카스 할머니’로 성매매를 통해 생계를 유지한다. ‘죽여주게 잘한다’ 해서 많은 남자들이 그녀를 찾는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6일 전에 태어난 소영은 전쟁 통에 남한으로 내려온 ‘3.8따라지’들 중 하나였다. 전쟁고아로 자라 식모로, 공장 공순이로, 그 시대의 수많은 여자들이 그랬듯 그렇게 젊은 날을 보냈다. 그렇게 살아서도 여전히 가진 것은 몸뚱이 하나뿐이었기에 그녀는 동두천 미군 기치촌의 양공주가 되었다. 잠시 같이 살던 흑인 미군 병사는 틈만 나면 술주정에 그녀를 개 패듯이 때리곤 했다. 어느 날 한마디 말없이 그에게 버려지고, 소영은 홀로 아이를 돌볼 수 없어 돌도 지나지 않은 아들을 미국으로 입양 보냈다. 소영의 삶은 전쟁이 지나간 후 여성이 감내해온 그늘진 역사를 담고 있었다. 상처 아물 날 없는 인생이었다.
어느 날, 소영은 정말 ‘죽여주는 여자’가 된다. 세비로 송, 종수, 재우는 한 때 그녀를 자주 찾던 단골 손님이었다. 그러나 송은 중풍이 와 혼자서는 거동조차 할 수 없게 되었고, 독거노인 종수는 치매에 걸려 점점 기억을 잃어가고, 재우는 아내를 먼저 보내고 최근엔 성기능 불구가 되어 더 이상 성욕마저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녀에게 화대를 지불할 만큼 재력이 있고, 가족이 있기도 했다. 연금과 직업을 가지고 있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돌봐주는 이 하나 없이 몸은 망가지고 삶은 무기력해져 남은 삶을 짐스러이 여겼다. 혼자 죽을 수 있는 용기는 없었기에 그마저도 소영에게 죽여달라 부탁한다. 소영은 자신마저 위험하게 만들 수 있는 그들의 비겁하고 이기적인 부탁을 끝내 거절하지 못한다.
아무도
속사정은
모르는 거거든
사연 많은 삶을 살았지만 그런 그녀의 곁에도 삶을 함께하는 이들이 있다. 어느 날 소영은 거리로 도망쳐 나온 코피노 아이 민호를 얼떨결에 집으로 데려왔다. 그녀는 갈 곳 없는 민호를 잠시 돌보기로 하고 일을 가야 할 땐 함께 사는 아랫집 도훈과 윗집 티나에게 민호를 맡기기도 한다. 소영이 세 들어 사는 집의 주인인 티나는 트렌스젠더로 이태원 바의 마담이다. 아랫집에 사는 도훈은 성인 피규어를 만들어 파는 작가로 한 쪽 다리를 사고로 잃었다. 그들은 담배와 농담을 나누며 같이 고기를 구워 먹기도 하고 소풍도 가면서 어울려 살아간다. 소영은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그들의 삶에 대해 각자 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기 마련이라 여긴다. “저 사람도 무슨 사연이 있겠지. 아무도 속사정은 모르는 거거든. 다들 거죽만 보고 대충 지껄이는 거지.” 다 같이 임진강으로 마지막 소풍을 갔던 날 소영이 한 말이었다.
이는 상처 많은 그녀가 타인의 삶과 그들의 드러나지 않은 고통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이기도 했다. 그녀가 고단했던 삶을 대하는 방식은 누군가를 돌보고 자신의 이웃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상대한 남자들의 처지마저 공감하고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도와준다. 평탄치 않았던 인생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사연 많은 과거에 대해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건 그녀가 자신의 삶을 버린 남자들과 가장 다른 점이었다.
선녀관음
이런 이유인지 지난해 홍콩국제영화제 초청 당시 영화의 중국어 제목은 <선녀관음>이었다. 중국인들에게 관음보살은 자비의 신이자 창녀의 신을 의미한다. 그들의 눈에 소영은 타인에 대한 연민으로 자비를 베풀고 희생하는 관음으로 비춰졌을 것이다. 영화를 본 많은 이들 역시 그녀의 행동이 이타적 희생이라고 말하며 성녀나 보살에 비유했다. 사실 소영이 보여준 연민이나 돌봄, 희생의 가치는 오랜 세월 동안 사회의 관습 아래 소위 ‘여성적 속성’으로 여겨져왔다. 그것은 실제 여성들의 삶 속에서 족쇄가 되어왔고, 여성을 표현하는 스크린 속의 캐릭터에게도 정형화된 굴레로 작용해왔다. 이런 오랜 사회적 통념과 젠더 프레임의 부정적인 영향으로 인해 돌봄, 연민, 희생 등의 가치는 원래의 의미에 비해 평가 절하되어왔다.
그러나 바로 그런 가치가 소영 자신이 가혹했던 삶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 되었다. 타인의 속사정을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소영의 태도는 그녀가 누군가와 지속해서 관계를 맺고, 그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도록 했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은 그녀가 스스로 계속 살아가야 하는 원동력이 되었는지 모른다. 재우의 살해용의자로 잡혀가던 경찰차 안에서 그녀는 양로원 갈 형편도 안됐는데 차라리 잘 됐다며 자조한다. 그러나 돌봐줘야 하는 이도, 이기적인 부탁을 하는 사람도, 한 몸뚱이 건사하기 위해 하루하루 거리를 헤맬 일도 없는 교도소에서 그녀는 빠르게 늙어간다. 일을 공칠 걱정 없이 세 끼를 먹고 하늘을 바라볼 여유도 생겼건만 소영은 더 이상 삶의 의지를 잃은 듯했다. 누구도 그녀를 찾지 않고 그녀 역시 누구도 필요하지 않아졌을 때 그녀는 한 줌의 재가 되어 무연고자라 적힌 납골함에 담겼다.
어떻게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
영화는 어떻게 노년의 삶을 잘 보내고 잘 죽을 것인가를 묻는다. 재우, 송, 종수처럼 노년에 홀로 남겨져 삶의 의미를 잃고 죽음을 고민하는 이들은 점차 늘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나이든 이들만의 고민이 아니다. 각박한 사회에서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살지만 누구하고도 연결되지 않아 고립되는 젊은이들 역시 안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공감이나 희생, 돌봄이란 이타적 가치는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이나 환경과는 무관하게 서로에게 유대감을 형성한다.
유대감은 다시 연대의식을 만들고,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 고독한 삶들이 가득한 사회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지 않게 해주는 것. 이는 성별과 세대에 상관없이 이타적 가치가 모두에게 중요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타인을 위한 가치가 각자 고립되어 살아가는 개인을 서로 연결시킬 의미 있는 삶의 태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소영이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준 이타적 가치의 역설적 힘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