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은 없다> : 빅 픽처의 부품이 아닌, 저마다의 강렬한 서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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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은 없다> : 빅 픽처의 부품이 아닌, 저마다의 강렬한 서사로

SECOND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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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미 감독의 <비밀은 없다>(2016)의 첫인상은 기존의 스릴러와 비슷해 보인다. 영화의 중심이 되는 사건은 김연홍(손예진)과 국회의원 김종찬(김주혁)의 딸 김민진(신지훈)의 실종이다. 영화는 극의 초반, 민진을 납치한 범인이 종찬과 라이벌 관계에 있는 노재순(김의성) 의원일지 모른다는 단서를 슬쩍 흘린다. 사건의 실마리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경찰과 형사 등 전문가가 투입되고, 연홍은 그들을 따라가는 형식이다. 관객은 여기서 힘 있는 정치가들의 사회적 스캔들을 기대한다.

그러나 재순에 대한 단서는 사실 맥거핀1 이었고, 극은 관객이 예상한 정치적 스캔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민진이 실종된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민진과 그녀의 친구 최미옥(김소희)은 민진의 담임이었던 손소라(최유화)와 종찬의 밀회 장면을 목격하게 되고, 이를 동영상으로 찍어 소라를 협박하게 된다. 그리고 협박을 견디다 못한 소리가 청부업자에게 이 둘을 살해해달라고 사주한다. 이 과정에서 일이 꼬여 민진만 죽고 미옥은 살아남은 것이다.

이분법 구도를
탈피한 스릴러

일러스트 이민

영화의 중심인물은 연홍, 민진, 미옥, 소라 총 네 명으로 압축할 수 있다.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주인공인 연홍은 공부머리가 없고, 어렸을 적 가수가 되겠다고 가출을 한 적이 있는데다가 흥분하면 더욱 두드러지는 광주 사투리를 구사하는 인물이다. 민진 역시 제 엄마의 말을 빌리자면 “날 닮아서 공부머리가 없는 애”, 그리고 워싱턴에서 오래 살았다며 대뜸 영어로 말을 거는, 또래들에게는 “그냥 딱 재수 없는 애”였다. 또래와 원만하게 어울리지 못했을 뿐더러 미성년자 출입이 금지된 클럽에서 놀면서 가출도 잦았다. 미옥은 자신의 아빠가 친구인 민진의 집에서 운전기사로 일한다는 것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고, 영어로 말을 거는 민진에게 “좆까”라고 응수할 만큼 뾰족한 구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심적으로 의지할 사람이 민진 뿐이기도 하다. 미옥은 소라가 고용한 청부업자가 민진을 차로 치어 죽이는 장면을 목격한 뒤 곧바로 틈을 타 같은 방법으로 업자를 죽여버리는, 대단히 충동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중심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소라는 교사의 신분으로 유부남과 관계를 맺고 민진과 미옥에게 성관계 영상으로 협박을 당하자 살인을 청부한다.

그 동안 우리가 익숙하게 접했던 스릴러에서는 ‘범죄자’와 ‘피해자’ 구도가 뚜렷한 플롯 속에서 각 캐릭터가 잘 맞춘 부품처럼 뻔한 역할을 해낸다. 남성 캐릭터가 주로 맡는 범죄자 역할은 범죄자답게 잔악무도한 면이, 여성 캐릭터가 주로 맡는 피해자는 피해자답게 아무 죄가 없고 순수한 면이 부각된다. 간혹 피해자를 ‘창녀’로 설정해 문란함을 징벌하는 한국적 서사가 추가되는 정도랄까. 그러나 <비밀은 없다>에서는 이런 이분법적 구도가 두드러지지 않는다. 이경미 감독은 범죄자와 피해자를 나누는 대신에 중심인물에게 각자의 이야기를 부여해 선악의 경계를 흩트리고, 그 이야기들을 충돌시켜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냈다.

선악이 아닌
설득력으로

기존의 스릴러 문법을 따른다면 민진은 착하고 순진한 딸로서 엄마 연홍의 분노를 정당화시켜줄 도구로 기능했어야 한다. 그러나 민진은 단순히 ‘억울하게 희생된 착한 딸’이라는 평면적 설정에서 벗어나 자기 나름의 이야기를 가지고 전체 서사를 흔들어 놓는다. 민진이 죽은 이유는 소라를 꾸준히 협박했기 때문이고, 소라를 협박 한 이유는 소라가 종찬, 즉 민진의 아버지와 관계를 맺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민진은 소라에게 협박으로 얻어낸 돈을 가난한 친구 미옥에게 주고 싶어한다. 민진이 행하는 일들을 모아놓고 보면, 민진을 ‘착하고 불쌍한 아이’라거나 혹은 ‘악랄하고 뻔뻔한 아이’ 중 어느 쪽으로도 판단하기 힘들다. 민진은 스스로 벌이는 일에 그럴만한 이유와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결국 영화를 이끌어 나가는 데에 선악의 구분은 중요치 않다. ‘이유’와 ‘정당성’, 다시 말해 설득력이 있다면 충분하다.

소라와 민진,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된다. 소라는 종찬과 불륜 관계였고, 민진이 미옥과 함께 자신에게 협박을 하자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하여 둘을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그뿐만 아니라 종찬에게도 복수를 할 요량으로 그에게 자신을 협박하는 사람이 민진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는다. 자신이 저지른 짓을 연홍이 알게 되었을 때도 반성은커녕 “네 자식새끼가 얼마나 악마새끼인지 알게 해 주마”라며 마치 자신이 입은 피해가 압도적으로 큰 것처럼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여주기도 한다. 민진은 소라와 종찬이 맺은 불륜 관계에서는 피해자가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소라에게 입에 담지 못할 만큼의 욕설을 하고 1억이라는 거액을 요구하며 협박하는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이 관계에서 일방적인 가해자나 일방적인 피해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의 중심에 놓여 있는 사건은 머리를 쓰는 게임이나 유희가 아니라, 인물과 인물간의 개인적인 감정과 순간적인 충동에서 유래한다.

여성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스릴러 감성

일러스트 이민

혹자는 스릴러에서 감정에 치우친 서사를 보는 것이 어색하다고 한다. 그러나 <끝까지 간다>(2013), <좋은 친구들>(2014) 등과 같은 영화처럼, ‘남성’들이 순간의 잘못된 선택이나 감정적인 선택으로 파국에 빠지는 과정을 그리는 작품은 종종 찾아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비밀은 없다>와 유사한 서사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다만 그 서사가 여성에게만 허락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간의 스릴러는 대개 여성을 범죄자와 추적자가 만들어 나가는 서사의 진행을 위한 피해자, 즉 도구로만 소비했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여성이 이야기의 중심으로 들어가 각자의 서사를 지닌 채 질주하며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 내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여성들이 강렬한 의지 속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모습을 조명한 서사는 찾아보기 몹시 힘들었다. 특히 ‘한국상업영화’에서 이러한 이야기가 다뤄졌다는 것은 아주 이례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비밀은 없다>는 개봉 당시 ‘떡밥만 잔뜩 던져 놓고 나몰라라 하는 영화’라는 평을 적지 않게 들었다. 물론 스릴러의 기존 구조를 안전하게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방향으로 달려나가는 만큼 영화에 매끄럽지 않은 부분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 새로운 방향을 개척하는 것이 바로 ‘여성’들이라는 점이 <비밀은 없다>를 마음속 깊이 응원하게 만들어주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1. 소설이나 영화에서, 어떤 사실이나 사건이 매우 중요한 것처럼 꾸며 독자나 관객의 주의를 전혀 엉뚱한 곳으로 돌리게 하는 속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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