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국제영화제 추천작] 내 인생의 키를 쥔 여성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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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국제영화제 추천작] 내 인생의 키를 쥔 여성들의 이야기

SECOND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제20회 전주국제영화제가 오는 5월 2일 문을 연다. 씨네 페미니즘 매거진 <SECOND>가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꼭 봐야할 작품 다섯 편을 소개한다.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삶을 살기 위해 현실에 적극적으로 질문하고 분투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다. 이들은 주어진 상황에 쉽게 안주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더 나은 내일을 만들고자 한다. 인생의 키를 쥐고 달려가는 여성들의 모습에서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노량대첩

감독 김소현 / 2019년 / 한국 / 24분 / 한국단편경쟁

임용고시 오수생 연주는 그년의 ‘방울’이 거슬린다. 앞자리에 털모자를 쓰고 앉은 그년, 그년의 머리 위에서 흔들리는 털모자의 방울. 정중하게 털모자를 벗어 달라고 요청했지만, 돌아온 것은 “원래 인생은 원하는 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답변이다. 그년은 연주 마음 속의 빨간 버튼을 눌렀다. ‘아, 저 방울 때문에 내 인생이 안 풀리는구나.’

그렇지 않아도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해서 사소한 일탈이라도 저지르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은 연주다. 그런 연주에게 제대로 된 먹잇감이 나타났다. 연주는 자신의 답답함과 분노의 원인인 방울의 모가지를 쳐버리겠다고 다짐한다. 일생일대의 적을 눈앞에 둔 그는 임용 고시를 준비할 때보다 더 의지에 불타는 것 같다. 실체를 알기 힘든 미래의 불안보다 눈앞에서 흔들리는 저 방울이 더 뚜렷해서일까.

영화의 관전 포인트는 싸움을 받아 주는 그년, 미연의 태도다. 자신이 아무리 모자를 벗지 않았다고 해도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방울을 자르려는 연주가 무서울 법도 한데 신고를 하기는커녕 싸움을 받아 주는 모양새다. 미연은 오히려 모자에 방울을 더 단단히 묶고 싸움에 대비한다. “나한테 이 모자가 없으면 안 된다는 걸 안 거지”라고 읖조리면서. 연주가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는 답답함을 미연의 방울에 쏟아 냈다면, 미연은 방울에 의지해 불안을 버티고 있다. 필사적으로 방울을 자르려는 연주를 보며 미연은 방울의 효력을 더 확신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죄 없는 방울을 둘러싼 두 사람의 강박. 누구 하나 쉬이 물러나려 하지 않는 진흙탕 싸움의 승자가 될 이는 누구인가. 감독의 장르적 결기와 배우들의 광기, 미쳐 돌아가는 스토리가 경쾌하게 시너지 효과를 내는 작품이다.

에바를 찾아서

감독 피아 헬렌탈 / 2019년 / 독일 / 85분 / 프론트라인

주인공 에바는 성 노동자이면서 바이섹슈얼이고, 페미니스트이며, 뮤지션이자 작가, 그리고 이민자다. 패션 모델로 활동하기도 하고 정해진 거처 없이 친구 집이나 비앤비에서 묵는다. 에바는 수많은 정체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느 하나로 정의 내릴 수 없는 인물이다. 에바는 기성의 관습과 제도에서 자유롭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추구하는 밀레니얼이다. 영화는 그에 대해 판단하는 대신, 에바의 일상을 여과 없이 펼쳐 둔다. 남성(들)과의 잠자리, 엄마나 친구와 나누는 대화, 마약과 파티 등정이 그대로 담겨 있다.

에바의 삶을 표현할 수 있는 형용사가 있다면 ‘플루이드’가 아닐까. 독일 출신이거나 여성이며, 연인이 있다는 식의 자기 소개는 지루하다. 에바는 모든 순간 어떤 관계 안에 있을 뿐이며, 에바에게 삶이란 변화하고 흘러가는 과정 그 자체인 것처럼 보인다. 에바는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소셜 공간에 표현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에바라는 인물을 이미지로 표현하는 행위도 그에게는 정체성을 탐구하는 방법의 일부이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형식 면에서도 소셜 미디어의 스타일과 호흡을 취한다. 인스타그램 피드에 있을 법한 스타일로 차려 입은 에바가 사진처럼 가만히 화면을 응시하거나, 그의 소셜 계정에 달린 댓글을 화면 위에 삽입했다. 댓글은 에바를 동경하거나 비판하는 내용들이다. 짧게 화면 위에 있다가 사라지는 점에서도 소셜 미디어의 휘발성을 닮았고, 이와 같은 휘발성은 거처 없이 떠도는 에바라는 인물의 정체성을 강화한다.

소셜 미디어 시대에 정체성은 점점 더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 사람들은 타인과 언제나 연결되어 있는 사회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살고 싶으면서, 동시에 진짜 나를 찾고 싶다는 모순된 욕망을 지니고 있다. 영화는 에바를 통해 정체성의 의미를 묻는다. 에바의 정체성은 정의하기 힘들지만, 하나의 키워드로 모아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야말로 소셜 시대의 진짜 정체성인지 모른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까치발

감독 권우정 / 2019년 / 한국 / 90분 / 코리아 시네마스케이프

<까치발>은 감독이 자신과 딸 지후의 이야기를 담은 사적 다큐멘터리다. 지후가 까치발로 걷는 이유가 뇌성마비 때문일 수도 있다는 말을 들은 후로 엄마인 우정은 불안에 휩싸인다. 동시에 아이가 남들과 다를 수 있다는 두려움은 감독이자 엄마인 그를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우정은 장애를 가진 아이를 둔 엄마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팟캐스트를 만들어 그들이 목소리를 내도록 돕는다. 주기적으로 병원을 찾아 지후의 상태도 체크한다. 그러나 삶의 문제가 대부분 그런 것처럼 어느 누구도 속 시원한 해답을 들려주지 못한다. 전전긍긍하는 우정에게 남편이 던지는 한 마디는 뼈아프다. “다른 (장애 아동) 엄마들이 어떻게 답을 줘? 애가 장애가 아니라는 답을 거기서 얻고 싶었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정은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이 작품은 감독인 우정이 지후, 그리고 다른 장애아 부모들과 교류한 8여 년의 시간을 그러 모아 만든 다큐멘터리다. 조금 먼저 경험한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 중요한 이유는 그들의 질문과 답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볼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스스로의 상처를 보듬고 나서야 엄마는 까치발을 지적당할 때마다 속상했을 딸, 지후의 마음을 짐작한다. 우정이 지후의 발에만 눈길을 주는 대신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시작하면서 둘의 관계는 성장한다.

<까치발>은 에세이 다큐의 미덕을 잘 살린 작품이다. 감독은 애써 숨겨 왔던 불안과, 그로 인해 몸서리치는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8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묵은 고민에, 날것의 감정이 더해져 자연스럽게 진정성이 우러난다. 영화는 한 아이가 자라나는 시간에 대한 기록이자, 엄마의 성장담이다. 영화는 감독에게, 또 관객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괜찮아.”

지팡이소녀

감독 조한별 / 2019년 / 한국 / 23분 / 한국단편경쟁

민서는 집 나간 부모를 대신해 어린 남동생을 돌본다. 어느 날은 알바를 하려고 주민 등록증을 위조했다가 일진들의 담배 셔틀 노릇까지 하게 된다. 여기까지 보면, 영화는 현실적이기는 하지만 다소 상투적인 캔디물처럼 보인다. 그런데, 진부한 이야기의 단골 캐릭터인 동네 할머니가 지팡이 무술의 달인으로 밝혀지면서 영화는 전혀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좋은 사람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정신은 영 오락가락해서 신경이 쓰였던 할머니는 지팡이 무술로 민서를 괴롭히는 일진들을 가볍게 제압해 보인다. 현실의 그는 치매 노인이지만 할머니의 몸은 화려한 지팡이 무술을 기억하고 있다. 민서의 눈에 이제 그는 무소불위의 지팡이를 휘두르는 무림 고수다.

주목할 지점은 영화의 제목이 ‘지팡이 할머니’가 아니라 ‘지팡이 소녀’라는 점이다. 민서는 히어로 지팡이 할머니의 도움을 받은 뒤, 위기에 처할 때마다 지팡이 소녀가 되고자 한다. 할머니의 일터까지 쫓아가 지팡이 무술을 가르쳐 달라고 애원하는 민서의 태도는 필사적이다. 그러나 할머니에게 배움을 청하는 과정은 쉽지 않고, 설상가상으로 일진의 우두머리는 이달 말까지 돈을 가져오라며 칼로 위협한다.

민서는 무사히 지팡이 소녀로 거듭나 일진 우두머리를 처단할 수 있을까. 민서가 더 필사적이 될수록 영화는 더 여유롭고 경쾌한 호흡으로 상황을 즐긴다. 위트와 리듬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흩어진 밤

감독 김솔, 이지형 / 2019년 / 한국 / 81분 / 한국경쟁

도대체 다들 왜 저러는거야!

이혼을 결정한 부모, 세상일에 달관한 척 하지만 누구보다 예민하게 이 문제를 받아들이고 있는 중학생 오빠, 딸 부부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외할머니까지. 10세 소녀 수민은 이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이해할 수 없는 가족들의 태도에 분노하며 소리친다. 도대체 다들 왜 저러는지, 수민은 나름의 질문을 던지며 주어진 상황을 이해하고 극복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모든 결정을 끝낸 부모는 더 이상 어떤 설명도 해주지 않고, 어떤 대안도 제시하지 않은 채 누가 누구와 살아야 하는지를 결정할 일만 남았다고 한다.

수민은 그 누구와도 헤어지고 싶지 않아 부모님에게 “다시 친해질 수는 없냐”고 묻지만, 돌아 오는 답은 “사랑한다고 해서 꼭 같이 살 필요는 없다”는 무심하고 잔인한 말뿐이다. 부모는 누구를 따라갈 것인지에 대한 선택을 수민에게만 맡긴 채로 그의 뒤에 숨어 서로를 향한 원망을 늘어놓기 바쁘다. 수민이 이 관계를 반전시키기 위해 노력할수록 상황은 더 악화되고, 서로에 대한 감정은 어긋난다. 모두가 이 상황이 얼른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영화는 이혼을 앞두고 헤어짐을 준비하는 가족들의 갈등을 10살 수민의 눈높이에서 보여 준다. 부모가 다시 친해지기만 하면 헤어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어린이의 애처롭고 순수한 마음에 비친 현실은 비극적이다. 영화는 수민의 감정을 촘촘하고 섬세하게 포착하며, 어떤 미화도 되어 있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상황을 관객 앞에 펼쳐 둔다. 관객들은 수민이 어떤 결정을 하거나, 어떤 결정을 강요받을지 숨죽이며 지켜본다.

영화는 일생일대의 무거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수민의 감정을 넘겨짚지 않는다. 수민의 행동을 무기력이라는 단어 속에 가두지도 않는다. 10살 아이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울고 떼를 쓰고 화를 내는 것만이 아니다. 선택권이 없다고 해서 선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영화는 수민의 목소리와 행동을 통해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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