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회 전주국제영화제가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매진작이 많아 현장 예매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했다. 씨네 페미니즘 매거진 <SECOND>가 보고 온 작품 가운데, 꼭 함께 나누고 싶은 영화들을 꼽아보았다. 故아녜스 바르다 감독의 다정한 마지막 인사에서부터 한평생 품어온 꿈을 위해 불 앞을 떠나지 않는 아버지와 그로부터 불을 물려받으려는 딸의 이야기,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신예 감독들의 복잡한 관계를 포착하는 내밀한 시선까지. 저마다의 매력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작품들을 소개한다.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의 마지막 영화>
아녜스 바르다 / 2019년 / 프랑스 / 115분 / 시네마톨로지
지난 3월 28일, 우리 곁을 떠난 아녜스 바르다 감독이 남기고 간 마지막 작품이다. 이 영화를 통해 아녜스 바르다는 남은 이들에게 다정한 인사를 건넨다. 내가 떠나도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영화는 65년 여에 걸친 아녜스 바르다의 예술 여정을 차근차근 따라간다. 그가 작품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세 가지, ‘영감’, ‘창작’, ‘공유’가 일어나는 과정을 충실히 담았다. 무엇보다 좋은 건 아녜스 바르다가 직접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점이다. 덕분에 우리는 아주 생생하게 그의 지나온 삶과 작품을 감각할 수 있다.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 <행복>,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 등 잘 알려진 영화 뿐만 아니라 그가 했던 설치 예술, 전시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영감을 주고 받은 사람들과의 일화까지도 모두 담아냈다. 이 작품을 보고 나면 어떤 수식어로도 아녜스 바르다를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지난 영화의 35mm필름으로 오두막을 만들어 새로운 전시를 열고, 먼저 세상을 떠난 고양이 구구를 위해 알록달록한 조개와 꽃으로 장식한 무덤을 만들어 주는 이 예술가에게 ‘거장 영화감독’ 같은 단순한 수식어는 어쩐지 밋밋하다.
그만큼 아녜스 바르다는 영화 그 자체, 예술 그 자체의 삶을 살다 간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나타내려는 메시지를 위해 사람들을 이용하지 않았다. 대신 보통의 사람들과 걸음을 나란히 하고, 호흡을 맞춰, ‘함께’ 작품을 만들어갔다. 우연을 친구로 만들어 새로운 이야기 발굴하기를 즐겼던 사람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로 인해 웃음 짓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영화 속에도, 영화 밖에도.
아녜스 바르다의 눈에 발견되고, 그의 손을 거쳐가면 어떤 사소한 것도 의미있는 예술작품으로 변모했다. 이제 당신도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변화하는 바르다의 예술을 보며 놀라움을 경험하길 바란다. 여성의 권리를 위해 외치고, 여성들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담으며 연대해왔던 페미니스트 바르다의 모습도 고스란히 담겨 있으니 기대해도 좋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최초로 공개된 이 영화의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기분 좋은 예감에 사로잡혔다. 이 영화가 그의 작품을 빠트리지 않고 챙겨본 팬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선물이자, 바르다를 잘 몰랐던 이들에게는 ‘본격 바르다 입덕영상’이 될 거라는 강한 예감이었다.
영화는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라는 제목으로, 아녜스 바르다가 태어난 날인 5월 30일에 개봉한다.
불숨
고희영 / 2019년 / 한국 / 93분 / 전주시네마프로젝트
전주국제영화제의 거리를 장식하는 깃발과 돔에 한 부녀의 모습이 실렸다.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아버지와 그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딸. 영화 <불숨>의 한 장면이다.
영화 <불숨>은 마음에 꽂힌 조선 막사발을 만들기 위해 한평생을 살아온 도자기 장인, 천한봉 장인과 그의 곁에서 불을 물려받기 위해 숨을 죽이고 살아온 딸이자 제자, 천경희 선생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서민의 개밥그릇’이라고 멸시하는 막사발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의 국보가 되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공개조차 될 수 없는 귀한 몸이 되었다. 보기에는 울퉁불퉁하고 못나 보이지만 그만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그 막사발을 만들기 위해 천한봉 장인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도자기들을 구워왔다. 그것만으로도 영화의 내용이 훌륭해질텐데, 영화의 시선은 그 뒤에서 묵묵히 제자의 길을 가고 있는 천경희 선생을 함께 비추어낸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게 아버지이자 스승인 관계인 것 같아요. 아버지는 저를 딸로만 보시지, 제자로 보시지는 않거든요.
천경희 선생의 이 말에 응답이나 한 듯이,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천한봉 장인은 ‘아버지’로서의 모습을 보인다. 남자도 무거워하는 걸, 저가 하고 있으니 얼마나 애달픈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젓고, 혹시라도 무언가를 잘못 건드릴까봐 뒤를 지키고 서있다. 하지만 천경희 선생은 그에 대해 무언의 반항도 하지 않고 묵묵히 받아들일 뿐이다. 아버지가 걸어온 그 길을 이어 받는 ‘딸’의 모습. 불을 이어받아 장인이 되고자 하는 그의 의지는 피어오르는 불만큼이나 강렬하다.
사실 한국 장인 세계에서 유산을 이어받는 것은 당연히 아들의 몫이었다. 천한봉 장인도 이 기술을 장남에게 물려주고 싶어했다. 하지만 아들이 교통사고로 허망하게 죽고, 그의 누나였던 천경희 선생이 도자기를 전공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가업은 그녀의 몫이 되었다. 하지만 천경희 선생은 ‘나는 동생의 삶을 대신 살고 있어요’라고 이야기하며 눈물 짓고, 자신이 그 자리를 정말 대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이미 반평생 세월 동안 도자기를 구웠고, 아버지의 길을 따라 걷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위축되어 있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똑같은 행동을 수 만 번씩 반복하며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아주 천천히, 단련되어 간다. 일렁이는 불에 대한 강렬한 욕망으로, 결국 영화의 말미 천경희 선생은 불을 넘겨받는다. 천한봉 장인으로 시작했던 영화는, 여전히 못미더운 아버지와 어머니의 불안한 시선을 딛고 서서 도자기를 구워내는 천경희 선생의 모습으로 끝이 난다.
이번 20회 전주국제영화제에 올라온 영화들 중, ‘중년 여성’의 욕망을 다루는 영화가 몇몇 눈에 띄었다. 하지만 영화가 바라보는 중년 여성의 욕망은 거의 대부분이 성욕에 관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숱한 영화들이 중년 여성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과 크게 다르지 않음에 실망을 느꼈기에, <불숨>이 보여준 천경희 선생의 이글거리는 불에 대한 욕망이 그렇게 반갑게 느껴졌나보다.
<불숨>은 이야기의 결이 매우 다양한 영화다. 궁극의 예술을 만들고 싶어하는 예술가의 이야기와, 관계의 복잡성에 대한 이야기, 여성 장인의 이야기가 모두 담겨 있다. 하지만 이 영화를 연출한 고희영 감독이 GV에서 직접 얘기했듯, 이 영화는 ‘1300도의 불길 속에서 단단히 구워지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유약하면서도 강인한, 불길을 담은 한 여성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큰 위안이 된다.
<차대리>
<다정을 위한 시간>
<차대리> - 김진화 / 2019년 / 한국 / 13분 / 한국단편경쟁
<다정을 위한 시간> - 김지현 / 2019년 / 한국 / 32분 / 한국단편경쟁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단편경쟁에 오른 26편의 작품 중 11편이 여성 감독의 작품이었다. 여성 감독들은 다양한 소재와 캐릭터로 여성 서사의 밝은 전망을 보여주었다. 특히 여성 캐릭터를 피해자의 위치로만 그리지 않은 점이 주목할 만하다. 여성 안에서도 각자의 위치와 상황에 따라 권력 관계가 다변화한다는 점을 놓치지 않고 그 양상을 내밀한 시선으로 포착해 보여준다. 여기 세 여성이 각기 다른 위치와 상황 속에서 아슬아슬한 관계를 맺는 두 작품을 소개한다.
영화 <차대리>의 주인공 차대리는 인턴 민지씨와 함께 팀장님을 모시고 본부장님네 상갓집으로 향하는 길이다. 차대리는 허팀장님의 후배 직원이자 민지씨의 상사로 둘 사이에 끼어 적절히 처신하기 위해 노력한다. 팀장님의 까탈스러운 비위를 맞추면서도 민지씨의 의욕을 적절히 컨트롤하는 중간 관리자의 역할은 에어컨이 고장 난 차를 장시간 모는 것보다 그를 더 힘들게 만든다.
가장 어려운 것은 두 사람 모두 나쁜 사람이어서 속 시원히 비난할 수도 없다는 점. 오히려 차대리는 두 사람 모두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어 괴롭다. 다년간의 회사 생활로 신입 직원의 노력과 함께 능력도 단번에 간파할 수 있게 된 팀장, 그리고 어떻게 노력해야 좋을지 몰라 일단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인턴. 팀장이기도 인턴이기도 한 차대리는 이중적 정체성 속에서 그래도 다시 한번 민지씨와 나란히 서서 담배를 피운다.
영화 <다정을 위한 시간>은 이보다 더 복잡한 관계의 양상을 보여준다. 계약직 직원 하나는 휴가를 떠난 비서 대신 악명 높은 사장 정선을 보필하게 된다. 부하 직원에게 물컵을 던지고 ‘저능아’라는 말까지 서슴지 않는 그는 유명 항공사의 갑질 사건을 떠오르게 만든다. 그러나 그에게 발달장애인 딸 다정이 있음이 밝혀지며 영화는 다른 국면을 맞는다.
퇴임을 앞두고 다음 보직을 찾아야 하는 정선과, 그런 정선과 함께 생일을 보내고 싶은 다정, 그리고 정선에게 하루 동안 다정을 보살펴 달라는 부탁을 받는 하나. 정선과 하나라는, 어찌 보면 깔끔한 갑과 을의 관계에 다정이 끼어들며 장애인과 비장애인, 애증의 부녀 관계가 한 데 엉켜든다. 좀처럼 풀릴 것 같지 않은 이들의 관계는 다정한 4월의 눈이 내리며 조금은 느슨하게 연결된다.
<차대리>와 <다정을 위한 시간>은 직장을 무대로 세 여성의 복잡다단한 관계를 보여준다. 누구 한 명을 가해자로 지목하고 비난할 수도, 그렇다고 두둔할 수도 없는 어려운 상황은 이 세계와 닮았다. 그렇지만 영화가 끝내 보여주는 결말은 부질없을지라도 작은 위로를 건네고, 각자의 자리에서 따로 또 같이 눈을 맞는 일이다. 영화는 각자 다른 위치와 상황 속에서 서로 반목할지라도 다시 한번 느슨한 연대를 꿈꾸는 여성들을 응원케 한다.
여성 감독들이 있기에
영화제가 끝나고, 전보다 벅찬 마음을 안고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앞서 언급한 여성 감독들의 영화 덕이었다. 영화를 매개로 메시지를 전하는 여성들이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각자의 자리에서 분투하고 있다는 사실이 적잖은 위안과 용기를 주었다. 여성 감독들이 담아내는 여성 캐릭터의 모습이 전형성에 갇히지 않고 더욱 다양해지고 있다는 점 또한 고무적이었다. 이는 여성서사에 목말라있던 관객들에게도 기쁜 소식일 것이다.
얼마 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제 72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아 화제가 됐다. 머지않아 수상의 영예를 거머쥘 여성 감독 또한 나오지 않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