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가은의 등장은 한국영화의 발견이다. 도전, 패기, 실험과 같은 수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특별한 시선이 존재한다.
- 제 36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감독상 심사평1
한국 영화계에 윤가은의 등장은 새로운 시선의 제시, 새로운 장르의 개척과 다름없었다. 윤가은은 영화 <우리들>을 통해 아이들의 세계를 관객들에게 열어젖혀 보여주었다. 스크린은 아이들의 순진무구한 얼굴 대신 갈등하는 표정으로 가득 찼다. 영화는 어른이 쓴 대사가 아닌 아이가 직접 뱉은 말로 살아 움직였다. 탁월한 심리 묘사와 관계의 통찰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다. 윤가은 감독은 영화 <우리들>이 개봉한 해에 청룡영화상과 부일영화상에서도 신인감독상을 거머쥐었다.
<우리들> 이후 아이들의 성장을 다룬 영화에는 ‘<우리들> 이후 최고의’ 혹은 ‘<우리들>에 비견될 만한’이라는 수식어가 상찬처럼 따라붙었다. 국내 유수 영화제에서도 심심치 않게 아이들의 세계를 그린 작품을 만나볼 수 있게 됐다. 올해의 기대작인 김보라 감독의 <벌새>와 안주영 감독의 <보희와 녹양> 역시 10대의 관계와 성장을 다룬 영화다. 제20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단편경쟁 부문 총평에서는 “아이들이나 중고생들의 시선으로 세상의 이치와 관계를 바라보는 영화들의 약진”2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도 한다. 윤가은 감독 이후 한국 영화계에 어린이청소년 영화의 계보가 새로 쓰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세인 감독 역시 그 계보 안에 있다. 영화 <컨테이너>로 제44회 서울독립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김세인 감독은 관객들로부터 “<우리들>을 떠오르게 하지만 또 다르다”3는 평을 듣고 있다. 감독은 수재로 컨테이너에서 지내게 된 경주와 은애의 이야기를 통해 아이의 마음 안에 자리 잡은 불안과 분노를 섬세한 연출력과 강렬한 이미지로 보여주었다. 영화 <컨테이너> 이외에도 <햄스터>와 <불놀이>를 통해 각각 어린아이와 청소년의 성장과 관계 맺기를 다루었다. 세 작품 모두 단편영화로 그 해 미쟝센단편영화제에 진출해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윤가은 감독이 장편으로 데뷔하기 이전 단편 <콩나물>과 <손님>을 통해 국내외 관객들과 만나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찬란하고도 서늘했던
유년의 뜰,
윤가은과 김세인
씨네 페미니즘 매거진 <세컨드>와 여성영화 상영 플랫폼 퍼플레이는 지난 5월부터 유명 여성 감독과 신진 여성 감독의 초기작을 함께 묶어 보는 ‘따따블 상영회’를 개최했다. 여성 감독의 계보를 잇고 신진 여성 감독을 소개하자는 취지에서다. 지난 6월 19일에 열린 두 번째 상영회에서는 윤가은 감독의 <콩나물>과 김세인 감독의 <컨테이너>를 함께 상영했다. 윤가은 감독 이후 다수의 어린이청소년 영화가 제작됐으나 김세인 감독의 <컨테이너>에 주목한 이유는 윤가은 감독과 같은 계보에 있으나 ‘다르다’는 점에서다. 두 감독은 아이들이 주인공인 영화를 만든다는 점에서만 같을 뿐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과 연출 스타일 면에 있어서는 큰 차이를 보인다. 이 차이가 어린이청소년 영화의 토양을 양적, 질적으로 풍요롭게 만든다. 두 번째 상영회의 이름인 ‘찬란하고도 서늘했던 유년의 뜰’은 이 차이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영화 <콩나물>:
처음 만난 세계를
마음껏 헤매기
윤가은 감독의 영화 <콩나물>은 7세 소녀 보리가 생애 처음 혼자 심부름을 떠나는 이야기다. 할아버지 제삿날 어른들이 음식 만드느라 바쁜 틈을 타 제삿상에 올릴 콩나물을 사오겠다며 탈출을 감행한 것. 윤가은 감독 스스로가 표현했듯 영화는 ‘동네액션 어드벤처’ 다운 면모를 선보이며 콩나물을 향한 보리의 발걸음을 온갖 장애물과 유혹들로 가로막는다. 길 한 가운데를 막고 있는 공사 현장, 주인 잃은 개, 시장에 데려다주겠다는 택배 아저씨, 떨어진 빨래를 던져달라는 언니,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까지.
어른들에게는 장애물도 아닐 것들이 보리에게는 그렇다. 온갖 것들이 처음이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무섭고 무엇보다 재밌다. 보리의 진짜 장애물은 어른들에게는 없는 ‘호기심’일 지도 모른다. 콩나물을 향해 힘차게 내려가던 발걸음이 호기심에 이끌려 슬금슬금 옆길로 빠지다가 우왕좌왕하며 엉켜 들더니 마침내 동화 속 환상의 세계에 이끌리듯 해바라기가 가득한 집을 향해 올라간다. 콩나물은 잊힌 지 오래고 아이의 발걸음과 발걸음이 머물던 자리들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애초에 영화의 목적은 콩나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콩나물>은 집중력 없는 아이의 심부름 실패기가 아닌 호기심 많은 아이의 동네 모험기다. 아이의 세계에서 결과보다 더 중요한 건 과정이고 효율보다 더 중요한 건 체험이다. 보리가 집 밖을 나오는 순간 외부 세계와의 만남은 시작됐다. 첫 만남이기에 모든 것이 가치 있다. 사소한 마주침이 만남이 되어 찬란한 기억의 조각으로 보리에게 남는다. 아이를 지켜봐 주고 기다려주는 세계에서 보리는 기억의 조각들을 이리저리 엮어 의외의 재치를 발휘하며 난관을 헤쳐나가고 기발한 상상력으로 모두를 감동시킨다.
영화 <컨테이너>:
알 수 없는 타인에게
온 마음으로 부딪히기
현실의 세계에는 아이들을 기다려주지 않는 어른들도 있다. 타인을 배려할 여력 자체가 없는 어른들의 세계에서 아이들은 곧잘 약자로 전락한다. 김세인 감독의 영화 <컨테이너> 속 세계다. 수재로 컨테이너에서 지내게 된 경주는 그곳에서 평소 친하게 지내고 싶었던 동네 언니 은애를 만나게 된다. 은애는 몇 주 전 단둘이 살던 할머니를 잃고 혼자가 됐다. 할머니와 집 모두를 잃은 은애는 컨테이너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채 겉돈다. 그렇지만 누구도 은애를 위로하거나 챙겨주지 않는다. 오히려 ‘일을 하지 않으면 밥 먹을 자격이 없다’는 어른들의 룰을 은애에게 적용시킨다.
다 같이 여유 없는 처지여서 오히려 서로에게 가혹한 컨테이너, 이 좁은 세계에서 은애에게 관심이 있는 건 오직 또래인 경주뿐이다. 영화는 경주의 시선에서 은애를 보여주고, 관객들은 경주와 함께 은애의 위치를 파악하며 컨테이너 안 권력 관계를 이해한다. 경주는 자신을 보호해줄 어른이 있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은애보다 강자이지만, 은애와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이 그보다 더 중요하다. 경주는 은애에게 계속 거부당하지만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은애를 따라나서고 끝까지 곁에 있는다.
경주와 은애 중 내면에 더 많은 이야기와 갈등을 지니고 있는 인물은 은애로 보인다. 그럼에도 영화가 경주를 주인공으로 삼은 이유는 타인과 관계를 맺으려는 욕망이 은애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 <컨테이너>에서 중요한 건 관계다. 자연재해 앞에서 자기 자신 하나 챙기기에 벅찬 인물들이 이기적인 면모를 드러낼 때 유일하게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타인과 관계 맺으려는 인물은 경주뿐이다. 영화는 경주가 끝끝내 은애에게 거부당할지라도 은애를 위한 선택을 할 수 있을지, 그 선택의 순간을 향해 달려간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시선이
필요하다
<콩나물>이 아이가 세계와 처음 만나 이것저것 체험하며 자아를 확장해가는 시기의 이야기라면, <컨테이너>는 어느 정도 자아가 형성된 아이가 타인과 관계 맺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자신을 희생하고 현실과 타협하는 시기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아이들의 연령대가 두 영화의 차이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두 감독의 전작을 모두 아울렀을 때 이는 표면적 이유에 불과하다. 우리는 두 감독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에 더 주목해야 한다.
윤가은 감독의 세계에서 어른들은 아이들을 이해하지 못할지언정 나무라지는 않는다. 살갑게 말을 걸며 이해하려 시도하거나 먹을 걸 챙겨주고 상처를 치료해주는 등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도 한다. 사는 일이 바빠 많이 관심 갖지 못할 때도 있지만 오히려 적당히 방임하는 효과를 거두어 아이 스스로 직접 겪고 배울 수 있도록 한다. 아이들끼리도 자신이 맞다며 싸우지만 느리게나마 서로를 이해하고 한발 뒤로 물러나 같이 놀며 성장한다.
반면 어른들의 무관심이 도를 지나쳐 아이를 방치하는 수준에 이르는 것이 김세인 감독의 세계다. 심지어 자신이 여유 없다는 이유로 상대적 약자인 아이에게 화를 내고 어른들과 같은 룰을 적용시킨다. 그 과정에서 아이는 애정을 갈구하거나, 반대로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며 자신을 지키려고 한다. 주변 또래 친구에게 의지해보려고 시도하지만 서로 다른 가정환경 때문에 이해받지 못하거나, 같은 아픔을 지녔어도 서로를 어떻게 위로할지 몰라 상처 입힌다. 감독의 전작 <햄스터>에서는 집에 홀로 남겨진 아이가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놀이터로 도망친 다른 아이와 만나 서로를 위로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아이를 둘러싼 세계는 어떠한가. 아이가 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따뜻한 시선으로 기다려주는 세계일 수도, 아니면 아이라고 해서 봐주는 것 없는 무자비한 세계일 수도 있다. 이 두 영화적 세계가 현실에는 공존한다. 어린이청소년 영화는 이미 커버린 관객들에게 잠시나마 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기회를 제공한다. 관객들은 어렸을 적 자신에게 말을 걸고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폭을 넓힌다. 아직 어린 관객들은 나만 이런 일을 겪는 것 같은 외로움에 빠지지 않고 조금이나마 위로받을 수 있다. 어린이청소년 영화의 토양이 더 풍요로워져야 하는 이유다.
비슷한 맥락에서 더 다양한 연령, 성별, 성적 지향, 인종의 인물들이 영화 속에서 시선을 부여받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영화들이 늘어날수록 현실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폭 역시 넓어진다. 그렇기에 이전까지 괄목할 만한 성과가 없던 소수 장르에서 전혀 다른 시선을 보여주는 두 여성 감독의 출현이 진심으로 반갑다. 더 많은 여성 감독의 등장이 더 풍요로운 영화계를 만들 것이라 믿으며 다음 상영회도 계속된다.
글. 세컨드 매거진 정경희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