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재에서는 최초의 프로그래머가 여성이고, 이들이 컴퓨터과학 발달의 역사에서 매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이야기했다. 이번 글에서 다룰 이야기는, 여성의 영역이었던 ‘코더(coder·컴퓨터 프로그래머의 다른 말)’의 자리가 어떻게 남성의 자리로 대체되고, 긱geek 혹은 너드nerd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는지다.
1946년 최초의 대형 전자식 컴퓨터인 에니악(ENIAC·Electronic Numerical Integrator and Calculator)은 현대 컴퓨터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에니악 프로젝트에서 전자식 컴퓨터 시스템을 구상하고 디자인하는 일은 ‘설계자(planner)’의 일, 설계자의 아이디어와 문제 해결법을 컴퓨터가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번역하고, 실제로 컴퓨터를 작동하는 일은 ‘코더(coder)’의 일이었다. 코더의 일은 설계자의 일보다 기계적이고 단순 반복적인 일, 사소한 일로 취급되었고 이에 저임금을 받는 여성에게 맡겨지곤 했다.
그러나 처음 예상과는 달리 코더의 일은 생각보다 까다로웠고 이는 컴퓨터가 고도로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더욱 그랬다. 컴퓨터를 작동시키는 소프트웨어의 중요성이 나날이 커져가면서 코더를 채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덩달아 프로그래머의 몸값이 전과 달리 극적으로 치솟았다.
“진짜 프로그래머”를 찾아서
미국의 과학 잡지 ‘파퓰러 사이언스(Popular Science)’는 1965년 1월호에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기사를 싣는다. “컴퓨터에게 먹이를 줄 50만 명의 사람을 찾습니다(Wanted: 500,000 Men to Feed Computers)” 기사 내용은 이렇다. 다가올 미래에 당신이 전망 좋은 업계에 뛰어들기 위해서 고등학교 졸업장도, 대학 졸업장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만약 컴퓨터와 대화할 줄 안다면, 기회는 당신의 것입니다! 기사는 프로그래머를 컴퓨터와 말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면서 6년안에 50만 명의 프로그래머가 더 필요하게 될 것이라 호언장담한다.
프로그래머가 하는 일이 재조명 받으며 이들의 대우도 좋아지자 자연스레 이 직업에 뛰어드는 남성이 많아졌다. 이들이기존에 여성 프로그래머를 몰아낸 방법은 다양한데, 그중 하나는 “진짜 프로그래머” 이미지를 만들어 이를 남성성과 연결시키고이들에게 더 높은 전문성을 부여하는 식이었다.
이 무렵 업계에서는 천재적인 프로그래머 일화가 자주 회자되었다. 천재적인 프로그래머가 평범한 동료보다 몇배나 더생산성이 높다는 (허술한) 연구 결과까지 등장해 이 이야기를 뒷받침 하면서 채용 담당자들은 어중이떠중이 프로그래머사이에서 “진짜 프로그래머”를 찾고자 애썼다.
“진짜 프로그래머”의 특징이란,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너드와 긱의 이미지에 가깝다. 사람보다 기계를 더 좋아하고,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컴퓨터에 몰입하고, 다른 일에는 일체 무관심하며 어눌하고, 안티소셜하며, 성적으로 매력 없는 존재. 이러한 특성을 가진 프로그래머는 남성이었고, 이들만이 “진짜 프로그래머”로서 전문성을 가진 사람으로 여겨졌다.
안티소셜? 호모소셜!
어떤 분야에서 여성이 일정 수준 이상의 성과를 올릴 때 여성성은 방해가 되기 쉽다. 한 분야에서 뚜렷한 성과를 낸 5060세대의 여자를 발견해 기뻤지만, 그들이 명예남성인 것을 알게 되어 실망한 적이 있는지? 어찌보면 그것은 당연한 결과다. 이들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여성성을 버려야 했을 테니까. 이말은 거꾸로 생각하면 남성성이 직업의 전문성과 무척 연결되어 있음을 뜻한다.
어느 분야이건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해당 업계의 동료에게 인정받아야 한다. 곧 전문성이란 멤버쉽의 문제다. 그들만의 리그에 나를 끼워줄 것인가? 끈끈한 남성 연대는 여기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다시 볼 것은 너드와 긱이 과연 안티소셜한 존재였냐는 것이다. 당시 남성 프로그래머 꿈나무가 주로 활동하던 곳 중 하나는 대학 내 컴퓨터 센터였다. 산업 현장과는 달리 대학에서는 컴퓨터 사용 시간을 비용으로 환산해 관리하지 않았고 이 덕분에 학생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프로그래밍을 즐기기 위해 컴퓨터 센터라는 공간을 사용할 수 있었다. 1960-1970년대 여성의 대학 진학률은 현저히 낮았다. 여성 프로그래머가 활동하던 산업 현장과는 달리 학교 내 컴퓨터센터는 오직 남성만의 영역이었다. 여성이 참여할 수 없었던 이 공간에서 남학생들은 자원의 제한 없이, 또 누구의 제약도없이 컴퓨터라는 최첨단 기술을 실험해보는 일에 자유롭게 참여하며 열중할 수 있었다. 이 공간에서 그들은 서로 대화하고 경쟁하고 정보를 교환하며 서로를 키워 나갔을 것이다. 나아가 이들끼리의 문화가 점차 공고해졌을 것이다.
1970-1980년대를 지나며 컴퓨터 과학(혹은 컴퓨터 공학)의 규범과 문화, 기풍, 관행 등이 점차 단단히 만들어졌고 대학내 컴퓨터 센터는 이러한 문화의 산실이었다. 곧 컴퓨터 센터라는 공간은 남성 프로그래머의 독점적 공간이었고, 이 공간안에서 너드와 긱은 안티소셜이기는 커녕 대단히 뿌리 깊게 사회적인 사람들이었다. 다만 호모소셜(homosocial, 동성끼리만 교류하는)이었을 뿐.
지금까지 다룬 컴퓨터 과학의 역사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 컴퓨터 발달의 초기 역사에서 프로그래밍은 원래 여성의 일이었다.
- 프로그래밍이 돈이 되자 남성이 진입했고, 이들의 전략은 남성성을 전문성과 연결짓는 것이었다. (이는 다른분야도 마찬가지다)
- 남성 프로그래머를 키우고 문화를 만들어낸 대단히 사회적인 공간이 있었다.
이 이야기에서 내게 흥미로운 점은, 프로그래머들이 자신에게 붙은 부정적인 이미지(너드와 긱)를 자기 분야의 전문성을지키는 데 자원으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지우고 싶을 만한 단점을 정체성으로 가져와 자기 분야의 진입장벽을 높이는 데 사용한 점이다.
그렇다면 2020년 컴퓨터 과학을 새로 배우는 여성들은 이들이 세워놓은 세계에 어떻게 균열을 낼 수 있을까? IT 기업과정부가 ‘가성비’를 위해 (남성보다 돈을 적게 줘도 되므로) 여성을 지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성이 이 분야에 들어가서도 노동의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을까?
우리에게도 1970년대 컴퓨터 센터처럼 호모소셜한 공간이 필요하다. 이같은 고민을 나누고, 서로를 키우고, 때로는 싸우고, 정보를 교환하고, 작당 모의 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서로의 단점이라 여겼던 점을 다시 보기 위해서 말이다.
참고문헌
Ensmenger, Nathan. "“Beards, Sandals, and Other Signs of Rugged Individualism”: Masculine Culture within the Computing Professions." Osiris 30.1 (2015): 38-65.
Stanley englebardt, “Wanted: 500,000 Men to Feed Computers,” Popular Sci., January 1965
Margaret Rossiter, Women Scientists in America: Struggles and Strategies to 1940 (Baltimore, 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