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d (Feminist) Scientists 1. 예미산 여신이 노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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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 (Feminist) Scientists 1. 예미산 여신이 노하지 않도록

하미나

일러스트레이터: 이민

과학 기자로 일할 때였다. 첫 지방 취재를 가게 되었는데 강원도 정선에 있는 예미산이었다. 이곳에서 국내의 한 연구소가 ‘우주의 미스터리’로 불리는 암흑물질을 탐지하기 위해 지하 1100m 깊이에 지하실험실을 건설하는 중이었다.

도착해보니 철광이었다. 도착한 날은 하필 예미산 여신에게 고사를 지내는 날이었다. 철광 관계자는 담배를 피우며 “갱도를 뚫을 때면 여신을 괴롭힌다는 생각에 늘 고사를 지낸다”고 말했다.

최첨단 과학실험장치가 설치되는 곳에 여신이라니. 같은 2019년에 살아도 실은 서로 다른 시기가 공존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학 = 남성, 자연 = 여성?

암흑물질 검출기는 철광 수직 갱도 옆에 부록처럼 끼워져 건설되는 중이었다. 천문학자에게 예미산은 암흑물질 신호 검출 과정에서 생기는 우주의 ‘잡음’을 차단해주는 거대한 돌덩어리지만 철광 관계자에게 예미산은 자원을 나누어주는, 그러므로 그녀가 노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 여신이었다.

이처럼 자연은 그 의미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역사적으로 변화한다. 각각의 개인은 자신이 태어난 사회를 통과하면서 나름대로 자신과 자연과의 관계를 형성한다. 특정 시대와 특정 공간에서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고대에서부터 자연은 자주 여성으로 인식되었다. 왜일까. 이는 역사적으로 자연을 탐구하던 자들의 압도적 대다수가 남성이기 때문일 수 있다. 남성 과학자는 자신의 상대자로서 자연을 여성으로 설정했다.

근대 이전의 자연은 유기체, 살아있는 존재로 여겨졌다. 자연 혹은 지구는 양육하는 어머니의 이미지로 자주 재현됐다. 이러한 자연의 모습에는 두 가지 상반된 면모가 공존했다. 질서정연하고 계획된 우주에서 인간에게 자원을 내어주는 친절하고 자비로운 어머니의 이미지. 그리고 폭풍과 가뭄, 해일처럼 끔찍한 자연재해를 불러일으키는 거칠고 통제되지 않는 여성의 이미지다.

여성을 이분법적으로 보는 관점이 자연에도 반영된 셈인데, 어쨌건 자연을 어머니로 보는 한 무분별하게 자연을 이용하는 것은 지금보다 좀 더 꺼려졌다. 가령 분별없는 광업은 어머니의 내장을 파헤치는 것과 같았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에서처럼 자연을 유기체로 보는 관점은 오늘날에도 남아있다.

일러스트 이민

근대과학의 탄생과 여신의 죽음

과학은 그 탄생부터 여성과 친하지 않았다. 프랜시스 베이컨, 윌리엄 하비, 르네 데카르트, 아이작 뉴턴과 같은 근대과학의 ‘아버지’들은 ‘과학이 아닌 것’을 규정하고 배제함으로써 ‘과학인 것’을 만들어냈는데 이 과정에서 ‘과학이 아닌 것’에 속한 것이 여성 그리고 소위 여성성이다.

이중 프랜시스 베이컨은 근대적 연구기관을 최초로 고안하고 귀납적 방법을 제안해 오늘날 이루어지는 것과 같은 과학의 기틀을 다진 학자로 여겨진다. 그는 처음부터 남성적인 과학을 주창했다. 베이컨은 자연을 살아있는 유기체로 보는 세계관,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여자처럼 나약하고 수동적이며 무기력하다고 비난했다. 베이컨이 착상해 설립된 영국 런던 왕립학회 역시 명시적으로 남성적 철학의 위상을 높이는 것을 그 목표로 삼았다.

이들이 말하는 남성적 철학의 특징은 프랑스어가 아닌 영어를, 사변이 아닌 경험을, 이론이 아닌 실험을 중시하는 것이었다. 왕립학회 학자들이 보기에 프랑스의 지식생산 문화는 너무 여성적이었는데 이유는 지식 생산의 중심이 되었던 파리지앵 살롱에서 프랑스 귀부인들이 두드러진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연을 여성으로 설정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들이 말하는 ‘여성적인 것’이 본질적으로 여성과 관계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이 새로운 기계적 세계관을 정립하는 데 있어서 추구한 가치들(객관성, 합리성, 건조한 표현, 공적인 것 등)을 남성적인 것으로, 그 반대에 해당하는 가치(감수성, 섬세함, 유려한 표현, 사적인 것 등)를 여성적인 것으로 치부했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다.

마녀를 사냥하라

베이컨이 새로운 과학의 방법론을 소리높여 외칠 시기는 유럽 전역에서 마녀재판이 횡행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마녀는 자연의 난폭함을 상징했다. 합리성과 객관성을 새로운 무기로 내세운 남성 지식인에게 마녀는 폭풍을 부르고, 질병을 일으키며, 또 어린아이를 죽이는 혼란스런 존재였다.

여성의 성욕은 마녀가 마법을 부린 것으로 여겨져 재판을 받는 빌미가 됐다. 당대 사람들은 마녀가 악마와 성교한 것을 실제로 목격했다고 자주 보고했다. 마녀 혐의로 기소된 희생자들은 몸에서 악마의 흔적을 찾아내기 위해 전신의 체모가 깎이고 음부를 검사받았다. 기소 이유는 다양했지만 어쨌건 재판에 서게 된 여성은 주로 사회의 최하위층에 속했다.

마녀사냥과 과학실험

흥미롭게도 프랜시스 베이컨이 새로운 과학의 목적과 방법을 서술하는데 사용한 메타포들은 마녀재판에서 쓰인 표현과 매우 닮아있다. 베이컨은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자연을 정복하고 통제하기 위해서는 실험 도구처럼 기계적인 도구를 이용해 자연의 비밀을 캐내야 한다고 보았다. 그에게 자연에 가하는 실험은 마녀재판에서 이루어지는 고문 혹은 심문과 같았다.

당신은 뒤좇고 이를테면 그녀가 방황할 때 자연을 사냥개처럼 추적해야만 하고, 같은 자리에서도 다시 그렇게 하고 싶은 때는 앞서거나 뒤서거나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가사의의 역사에서 마술, 마법, 주문, 꿈, 점 등과 같은 미신 이야기들, 거기에는 사실의 확신과 명확한 증거가 있는데, 그것들을 모두 몰아내야 한다는 것이 내 의견은 아니다. …… 그런 기술의 사용과 실행이 처벌받아야 할지라도, 그들의 심사숙고로부터 …… 이런 실행의 책임자들의 범죄에 대한 진정한 판단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자연의 비밀의 폭로 같은 것을 위해서도 유용한 빛을 얻을 수도 있다. 진실의 심문이 그의 전적인 목표일 때, 남자가 이들 구멍과 구석으로 들어가서 관통하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 폐하가 당신 자신의 예에서 보여주셨던 것처럼.1

일러스트 이민

자연은 그녀를 그대로 내버려둘 때보다 기술의 괴롭힘과 심문 하에서 더 명확하게 그녀 자신을 드러낸다. 2

새로운 과학적인 인간은 “자연의 심문이 어느 부분에서도 저지되거나 금지되는 것”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자연은 “봉사하게 하고”, “노예”로 만들고 “속박하여” 기계적 기술로 “조형”해야만 한다. “자연의 탐색자와 밀정들”은 그녀의 계획과 비밀들을 발견해내야 한다.3

미국의 에코페미니스트 철학자이자 과학사가인 캐롤라인 머천트는 이처럼 근대과학이 탄생하면서 자연과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가 허락되었고, 그 과정에서 자연과 여성 모두 함께 ‘죽음’을 당했다고 본다. 그러므로 머천트가 보기에 자연에 가해지는 폭력과 여성에 가해지는 억압은 서로 밀접하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과학을 남성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여성해방이 자연해방과 함께 가야 한다고 볼지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겠다. 에코페미니즘은 자주 조소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쨌건 근대과학이 형성되는 과정을 되돌이켜보며 알 수 있는 건 꽤 분명한 것 같다. 바로 우리가 자연을 보는 어떤 설명 틀을 고를 때는 그것과 연관된 가치 판단이 언제나 함께한다는 것이다. 예미산 여신 뱃속에 갱도를 뚫는 것이 위험한 일이라는 가치 판단처럼, 우주의 미스터리를 푸는 것이 인간에게 필요하다는 가치 판단처럼 말이다. 사실과 가치의 관계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각주

1. Bacon, “De Dignitate et Augmentis Scientiarum,”(1623), Works, ed. James Spedding, Robert Leslie Ellis, Douglas Devon Heath, 14 vols.(London: Longmans Green, 1870), 캐롤라인 머천트, “자연의 죽음”(서울: 미토, 2005), 261쪽에서 재인용, 강조는 하미나의 것.

2. Bacon, “De Dignatate,” Works, 4권, 298쪽, 캐롤라인 머천트, “자연의 죽음”, 262쪽에서 재인용.

3. Bacon, “The Great Instauration”(1620), Works, 4권, 20쪽; “The Masculine Birth of Time,” Benjamin Farrington, ed. and trans., The Philosophy of Francis Bacon(Liverpool, England: Liverpool University Press, 1964), 62쪽; “De Degnitate,” Works, vol. 4, 287, 294쪽, 캐롤라인 머천트, “자연의 죽음”, 262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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