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명의 애인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8. 제가 폴리아모리 감별사는 아니지만요

알다폴리아모리관계

두 명의 애인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8. 제가 폴리아모리 감별사는 아니지만요

승은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폴리아모리스트 채니와 대화하던 중, “세 분은 폴리아모리 모범 사례잖아요”라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들은 우리는 경악했고, 격하게 거부했으며, 모범이란 무엇인가를 화두로 밤늦게까지 머리를 싸맸다. 그날 밤, 우리는 나대지 말자는 결론을 내렸다. 각자의 상황에 따라 N개의 폴리아모리 관계가 존재하는데, ‘감히’ 대표성을 갖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종류의 질문도 자주 듣는다. “저는 진짜 폴리아모리스트가 맞을까요?” 그럴 때마다 나와 애인들은 선을 그으며 말한다. “저희가 폴리아모리 감별사는 아니어서요…….”

모범이란 뭘까

모범적인 폴리아모리. 진정한 폴리아모리는 뭘까. 폴리아모리는 모노아모리처럼 수많은 관계의 형태 중 한 종류일 뿐이다. 모노아모리가 중심인 세계이기에, 그 외의 관계는 ‘논모노아모리’라는 큰 범주로 정리할 수 있다. 논모노아모리 안에는 소위 말하는 바람, 오픈 메리지, 캐쥬얼 섹스, 폴리아모리 등 다양한 관계 맺음이 속해있다. 그 안에 있는 범주들은 뚜렷한 경계가 나뉘었다기보다는 겹치고 교차한다. 캐쥬얼 섹스를 즐기는 폴리아모리스트가 있고, 오픈 메리지 관계 속에서 한 사람은 모노아모리일 수도 있다. ‘젠더’의 정의가 매순간 경합하며 확장되고 변화하는 개념이라는 주디스 버틀러의 말처럼, 폴리아모리도 몇 가지 단어로 정의할 수 있는 고정불변한 개념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진정한’ 폴리아모리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와 같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사례를 접할 때면 ‘이건 좀 아닌데’ 싶은 순간이 있는 것도 사실이어서 갈등하게 된다. 그런 사례를 입 밖에 꺼내는 일은 마치 나대지 않겠다는 다짐을 어기고, 감별사를 자처하는 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위치에서 느끼는 점을 공유하는 정도라는 점을 밝히고 조심스레 이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나의 기준이고 당신의 기준은 다를 수 있다’는 안전선을 긋고, 이야기를 이어가겠다는 소심한 고백이다.

폴리아모리를
오용하지 마시오

나에게 폴리아모리의 개념을 처음 알려준 사람은 추교수였다. 그는 내가 대학생 때 만난 시간 강사였다. 당시 40대 초반이었던 추교수는 나를 참 예뻐했다. 상담을 전공했던 그는 우리 집 가족 문제를 상담해주겠다며 나에게 다가왔다. 주말마다 나를 불러내서 춘천의 변두리 음식점과 카페에 데리고 다녔다. 추교수가 하는 말의 80%는 자기 자랑이었으며, 2%는 나의 가정 상담, 나머지 18%는 ‘쎅쓰’에 대한 이야기였다. 입에 침을 가득 머금고 말하던 추교수의 “쎅 쓰” 발음을 기억한다. 추교수는 나에게 궁금한 점이 많았다. 특히 잠자리에 관해서. 승은아, 쎅쓰 해봤니? 쎅쓰 남자친구랑만 해? 어느 날, 나는 ‘폴리아모리’ 개념과 아주 근접한 말을 그에게 듣게 되었다. “승은아, 연애한다고 한 사람과만 사랑하라는 법은 없어. 연애도 계약이다? 쎅쓰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그 사람만 만나려고 하지 말고, 여러 사람을 만나봐. 너 젊고 얼마나 좋을 나이니. 나도 연애하고 싶다.” 나는 “교수님도 연애 하세요~”라고 말했고, 교수는 자기가 맞선 본 여자들의 이력을 줄줄 읊으며, 그들은 교양 있는 여자들이지만 나이가 많고 허벅지가 얇아서 싫다고 했다. 추교수와 내 대화는 딱 거기에서 멈췄다. 추교수가 아파트 앞에 나를 데려다 준 날, 차 안에서 갑자기 내 입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댔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나는 추교수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가끔 나는 상상한다. 폴리아모리라는 언어를 장착한 세상의 수많은 추교수가 위계를 이용하여 상대에게 쎅쓰를 말하고, 쎅쓰를 유도하는 장면을 말이다. 내가 ‘건전한’ 폴리아모리를 꿈꾸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자신의 권력과 위치를 자각하지 못하고(혹은 너무 잘 알고서) 휘두르는 언어적 신체적 접근을 폴리아모리라는 이름으로 포장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한 번은 가까운 동료, 연못이 나에게 미안하다며 고백한 적이 있다.

일러스트 이민 

승은님, 정말 죄송해요. 원래 저는 폴리아모리에 대한 편견이 있었어요. 사실 바로 전에 만났던 애인이랑 잘 만나던 중에…… 갑자기 애인이 수업에서 ‘폴리아모리’ 개념을 듣고 왔다면서 이제부터 자신은 폴리아모리를 하겠다는 거예요. 너무 일방적인 통보라 어이가 없고, 이게 뭔가 싶어서 저는 이별을 택했어요. 폴리아모리가 뭔지 제대로 고민하기도 전에 상대의 무례한 행동에 질려버린 거였죠. 근데 승은님이 폴리아모리를 한다고 하고, 그 뒤로 차근차근 공부해보니까 편견을 가질 일이 전혀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요.

나는 연못의 말이 공감되었고, 만약 모노아모리 관계를 맺던 연인이 갑작스럽게 폴리아모리를 일방적으로 통보하면 상대방이 받을 충격이 어떨지 상상해보았다. 나에게 폴리아모리 관계의 ‘합의’는 무조건 솔직하게 다 털어놓고 받아들이는 몫은 상대에게 떠넘기는 게 아니다. 솔직하되, 그 과정을 차근차근 함께 밟아나가는 노력에 방점이 찍혀있다고 생각한다. 준비되지 않은 상대에게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강요한다면 그건 폴리아모리 이전에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는 행위일 테니까.

언젠가는 이런 상담을 들은 적도 있다. “제 존재의 본질에 대해 고민이 돼요”라는 말로 서두를 꺼낸 그는 곧 결혼할 애인이 있는데, 다른 여자들과의 섹스가 너무 좋아서 참지 못하고 하고 다니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것이 존재의 본질에 대한 고민이라고요..? 나는 조금 놀랐으나 그는 자신이 폴리아모리인 것 같다며, 애인에게 이 사실을 밝히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그도 같은 말을 했다. “저 아무래도 폴리아모리스트 아닐까요?” 아마 그는 이미 답을 내리고, 나를 통해 일말의 죄책감을 덜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그의 질문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나를 찾아와서 ‘나 폴리아모리스트 아닐까요?’라고 묻는 게 아니라, 애인에게 자신의 상황을 어떻게 전달할지 고민해야 했다. 차라리 나에게 ‘어떻게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면 훨씬 나았을 거다. 폴리아모리의 방식 중에는 ‘DADT'가 있다. Don't Ask, Don't Talk. 서로 묻지도 말하지도 않기. 애초부터 서로에게 다른 애인이 생길 수 있다는 전제를 합의하고, 만나는 중에 어떤 끌림이 있어도 묻거나 알리지 않기로 협상하는 방식이다. 서로에게 그 부분을 공평하게 협상한 상태라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건 당연하다. 하지만 자기 혼자 다른 사람을 만나면서 ’내가 폴리아모리일까. 폴리아모리라서 괴롭다. 몰래 만나서 괴롭다‘는 식의 고민만 하고 있는 태도는 위험하다. 나는 그 고민이 부디 기존의 애인과 소통하고, 협상할 노력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언젠가 폴리아모리 정기모임에 다녀온 뒤, 나는 이런 메모를 남겼다.

폴리아모리 커뮤니티 정기 모임에 다녀왔다. 시험을 앞둔 지민은 못 가고, 승희 우주와 함께 갔다. ‘ㅁ’자로 스물다섯 명이 둘러앉아 무려 네 시간을 쉴 틈 없이 대화했다. 오픈 메리지, 모노인 애인에게 아직 털어놓지 못한 사람, 좋아하는 사람이 폴리아모리스트여서 고민하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역시 ‘폴리아모리’라는 기호로 뭉뚱그릴 수 없는 다채로운 이야기가 흘렀다.

자기소개 시간에 우주는 애인과 애인의 애인과 셋이 함께 살고 있다고 말했고, 나는 애인 두 명과 함께 산다고 했고, 승희는 공동체에서 함께 산다고 답했다. 그 말이 왜곡돼서, 어떤 이는 나를 중심으로 승희와 우주가 내 애인이라고 생각하곤 승희에게 진지하게 “질투는 안 나세요...?”라고 물었다. 어떤 이는 우주를 중심으로 승희와 내가 우주의 애인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모임에서 새삼 느낀 점은 내가 무척 안전하고 투명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점이었다. 폴리아모리 관계를 드러내도 딱히 편견을 갖거나 고나리질 하는 사람 없는 환경에서 사는 건 나에게는 평범한 일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 (물론 바깥은 여전히 시끄럽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주위 사람에게 말했다가 이상한 소문이 나거나 전혀 이해받지 못하길 반복하다 지쳐서 이곳에 찾아왔다고 했다. 그만큼 아웃팅, 커밍아웃도 중요한 화두로 논의되었다. 외로웠던 만큼 서로의 존재를 갈망하고 고마워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서로를 이해하는 안전한 공동체가 왜 필요한지 실감했다.

다만, 궁금했던 점은 그곳에 찾은 기혼자는 왜 남성만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기혼 여성은 왜 이곳을 찾지 못했을까. 한 참여자가 아내에게 말을 꺼냈는데 “당신은 남성이니까 가능하지. 그런 생각도 더 자유로울 수 있는 거야. 생각해 봐. 나는 정말 괜찮을까?”라고 되물었다는 이야기가 마음에 남는다. 폴리아모리가 특정성별, 혹은 특정한 조건을 가진 사람만 가능한 사랑 방식이 아니면 좋겠다. 여러 생각이 교차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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