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명의 애인과 살고 있습니다 2. 어둠 속에서 춤을 출래

생각하다폴리아모리연애관계

두 명의 애인과 살고 있습니다 2. 어둠 속에서 춤을 출래

승은

일러스트레이션 : 이민

그날 아침 집을 나서려는 나에게 아빠는 백여덟 번째 당부를 했다.

승은아, 네가 어떻게 살아도 상관은 없는데 제발 폴리아모리인지 뭔지 하는 글은 쓰지 마라. 나중에 정말 어떻게 되려고 그러니? 남들이 뭐라고 하겠어.

대답하지 않으면 아빠가 끝내 나를 놓아줄 것 같지 않아서, 오랜만에 보는 아빠와 다투기 싫어서 마지못해 알았다고 답하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몇 시간 뒤, 나는 카메라 앞에서 섹스와 오르가슴, 폴리아모리에 대해 말했다. 프랑스 다큐영화 <휴먼>의 후속작 <우먼> 촬영이 있는 날. 촬영은 종로의 한 호텔 꼭대기 층에서 진행됐다. 방에는 한국 촬영감독과 프랑스 감독, 연출자가 있었다. 암막 커튼을 친 어두운 방에는 의자 하나가 놓여있었다. 그 의자에 앉으니 하얀 조명과 카메라가 오로지 내 얼굴에 집중됐다. 마치 연극배우가 된 기분이었다. 인터뷰가 시작됐다. 어린 시절 기억으로 가볍게 시작된 인터뷰는 점차 폴리아모리와 임신중단수술, 오르가슴과 섹스 판타지에 대한 이야기로 나아갔다. 처음에는 어색해서 쭈뼛댔는데, 몽롱한 분위기에 취해서 나는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신나게 떠들었다.

“섹스 판타지는 뭔가요?”
“음, 쓰리썸? 언젠가 여러 명과 해보고 싶어요.”
“당신에게 오르가슴이란?”
“‘나’를 잊고 온전히 육체에 집중하는 시간이요.” (이때 나는 눈꺼풀까지 파르르 떨었다.)

두 시간의 촬영이 끝나고 서로 수고했다고 인사하는데, 프랑스 감독 프랑이 자신도 폴리아모리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나는 불어를 못하기 때문에 중간에서 한국 촬영 감독이 통역을 해주었다. 프랑은 자신은 오픈 메리지 관계이며, 아들이 있는데 남편과 합의 하에 각자 애인을 만난다고 말했다. 프랑은 한국에서 폴리아모리스트를 만나니 반갑다고 웃으며 악수를 권했다. 말은 한 마디도 안 통했지만, 깊은 연대감을 느낀 프랑과 나는 진하게 손을 맞잡았다. 생전 관심 없던 불어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촬영과 이후 식사 자리는 유쾌했다.

암막 커튼을 친 어두운 방. 작은 불빛 하나만 존재하던 그 공간에서 나는 자유로웠다. 아빠의 눈살이 끼어들 틈도, 어떻게 그렇게 더러운 걸 욕망하고 감히 입 밖에 말할 수 있느냐고 비난할 목소리도 없었다. 암흑 속에서 나는 꽁꽁 싸매고 있던 옷을 한 겹씩 벗어던지고 무대를 활보하는 연극 배우였다.

인터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거리에는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집에 돌아가자 아빠는 우리 자랑스러운 장녀가 다큐 촬영도 한다고 나를 칭찬했다. 나는 웃으며 아주 즐거운 촬영이었다고 말했고, 아빠는 어떤 촬영인지에는 관심 없이 그냥 자신의 딸이 무언가 일을 한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그런 아빠를 보며 조금 찔렸는데, 나는 부디 아빠가 영화를 볼 일이 없길 바랐다. 딸이 스크린 앞에서 각종 금기를 말하는 모습을 본다면 아빠는 '글 쓰지 마'에 더해 '말 하지 마'를 추가할 것 같아서.

아빠에게는 비밀이지만, 폴리아모리 관계가 알려지면서 각종 매체에서 인터뷰 요청이 왔고 그때마다 나는 최대한 피하지 않고 수락하는 편이었다. 너무 특별하게(이상하게) 취급되는 내 일상과 사랑을 특별하지 않게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조금 더 익숙해진다면, 한 번이라도 본다면 깜짝 놀라서 무턱대고 손가락질하는 반응이 줄어들까 싶어서. 하지만 아쉽게도 몇 번의 시도는 무산으로 돌아갔다. 이유는 내가 너무 평범하거나 너무 평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방송국에서 ‘우리 결혼했어요’와 비슷한 포맷으로 소수적 관계를 맺는 사람들의 일상을 찍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때 나와 애인들은 포항에 살고 있었는데, 작가님과 담당 피디가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포항까지 올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먼 길을 날아온 두 사람을 집으로 초대해서 방송의 취지를 오랜 시간 묻고 들었다. 동성애 커플, 폴리아모리 커플 등 다양한 커플의 일상을 찍어서 ‘이런 관계가 있다’는 걸 자연스레 알리고 싶다는 취지였다. 취지는 좋았지만, 막상 방송에서 일상이 드러난다면 어떤 후폭풍이 닥칠지 우려돼서 망설였다. 우리는 혹시 거절하게 되더라도 한국에도 꽤 많은 폴리아모리스트가 있으니 꼭 다뤄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담당 피디가 말했다.

일러스트 이민 


안 그래도 폴리아모리 커뮤니티에도 나가봤어요. 그런데 저는 뭔가…… 너무 소수자 같지 않은 사람들을 찍고 싶었어요.

피디는 우리가 다른 성 소수자에 비해 평범해 보이는 남녀 커플이기 때문에 꼭 우리로 했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우리의 옷차림과 머리색을 비롯한 생김새, 직업 등이 포함된 말인 듯 했다. ‘음, 지민은 트랜스젠더 퀴어인데……’ 순간 어색해진 우리 표정을 눈치챘는지 피디는 대중의 눈높이에서 폴리아모리가 잘 전달됐으면 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찜찜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평범한 폴리아모리. 건전한 폴리아모리라는 말은 마치 이유식 불닭처럼 이질적이다. 대중에게 폴리아모리가 공격 받는 포인트는 주로 ‘난교’이기 때문에 지레 “아니요, 저희는 난교는 안 하고 평범한 사람들이에요!”라고 답하게 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마음속으로는 이런 생각이 올라온다. 아니 설사 난교면 어떻고 문란하면 어쩔 건데! 난교한다고 하늘이 무너지나?

결국 방송 출연은 거절했다. 스스로 편집권을 가지지 못할 거라는 불안감과 ‘평범한 폴리아모리’라는 이름표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이후 방송이 어떻게 됐는지 알지 못하지만, 종종 궁금하면서도 마음 한편에 죄책감이 들었다. 우리가 출연을 결심했다면 조금이라도 다양한 관계를 보일 기회가 마련되지 않았을까, 내 기준이 너무 까다로웠던 걸까.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한 매체에서는 평범하지 않다는 이유로 출연이 목전에서 엎어진 적이 있다. 비혼, 비연애, 동거하는 사람들 특집의 영상 제작이었는데, 한참 촬영팀과 의견을 주고받던 중에 갑자기 영상을 지원하는 국가 기관에서 제동을 걸었다. 폴리아모리는 대중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렵기 때문에 위험부담을 안을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이번에는 평범하지 않다고 거절당했다. 심지어 우리는 셋 다 비혼주의자이고, 연애의 정상성을 해체하는 비연애주의자이고, 동거하는 사람들인데! 그때 나는 비연애, 비혼 담론에서 혼자 사는 일인 가구나 피가 섞이지 않는 공동체는 그나마 환영 받지만, 로맨스와 성애가 결합된 ‘다른’ 형태는 아직 언급조차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답답한 마음에 폴리아모리 커뮤니티에서 만난 폴리 씨를 만났다. 폴리 씨와 이런저런 고민을 나누다가 세 사람이 한 공간에서 살아가며 느끼는 어려움(노출이나 애정 표현)에 대해 털어놓았다. 가만히 내 말을 듣던 폴리 씨가 말했다.

“제 경험인데요, 세 분이 쓰리썸을 해보면 어때요? 그럼 관계가 훨씬 편안해지더라고요.”
“(웃음) 저도 상상해본 적 있는데... 아마 두 사람이 서로를 원하지 않을 거여서 저희 셋은 안 될 것 같아요.”

폴리 씨는 진심으로 아쉬워하며 답했다.

아쉽네요. 그럼 정말 좋을 텐데…….

폴리 씨와의 대화는 내 옷을 훌훌 벗겼다. 이곳저곳을 유영하는 마음으로 모든 가능성에 몸과 마음을 열었다. 아, 이 대화는 평범할까 평범하지 않을까? 더러울까 더럽지 않을까?

나는 자주 어두운 방과 환한 낮의 경계를 걷는다. 굳이 해명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어둠의 시간과 무화과 잎을 둘러야만 내가 존중받을 수 있는 낮의 시간. 나는 어두운 걸 무서워하는 사람이지만, 때로 어둠은 나를 훨씬 자유롭게 한다. 그 어둠이 잠시 동안 주어지는 무대가 아니라 매일 가능한 무대이면 좋겠다.

평범한 폴리아모리와 평범하지 않은 폴리아모리. 그 중에 너는 무엇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쓰리썸을 꿈꾸지만 아직 하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평범하다고 불리는 평범하지 않은 폴리아모리라고 소개하겠다. 내가 쓴 문장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딱 그 만큼이 내가 느끼는 혼돈이라는 걸 이해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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