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를 말할 때의 내 얼굴
어떤 낙태가 좋은 상황에서 이루어질 수 있겠느냐만, 어쨌든 나의 낙태는 그다지 좋은 상황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24살의 여름이었다. 나는 9살 연상이었던 한 남자와 파혼했다. 파혼한 지 2주가 채 되지 않아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임테기의 두 줄을 보자마자 몇 주 전 일이 떠올랐다.
원래대로라면 신혼집이 되었을 집에서 결혼 문제로 크게 다투었다. 나는 한 달도 남지 않은 결혼식을 취소하고, 결혼을 미루자고 했고, 그는 이제와서 무슨 말이냐며 화를 냈다. 그날 그는 잘 마시지도 않는 술을 사 와 빠르게 들이켰고 내게도 마시기를 권했다. 그는 술에 취한 나를 매트리스에 눕혔고 옷을 벗겼다. 그 방은 에어컨이 있어야 할 자리에 뚫린 구멍을 신문지로 대충 막아 놓았는데 바퀴벌레가 그 사이로 들어올까 봐 옷이 벗겨지는데도 무척 걱정이었다. 유난히 섹스에 집중을 못하는 와중에 나는 그가 콘돔을 뺀 것 같다는 싸늘한 느낌이 들었지만, 별일 아닐 거라고 애써 나를 달래며 잠들었다. 그러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는 의도적으로 질내 사정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나를 설득해서 결혼하려고 했다. 이미 주변에 결혼 소식을 다 알려버린 후였기 때문이다. 그 ‘설득’ 방법 중 하나가 임신을 ‘시켜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엄마 외에 그 누구에게도 임신 사실을 알리지 않았는데, 그가 어떻게 알았는지 나의 지인에게 내가 임신한 것 같다고 했다. 아마 본인이 한 짓이 있으니 추측해서 그런 말을 흘렸을 것이다. 나는 그가 정말로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사실을 이용해 어떻게든 나와 결혼을 밀어붙이려고 할 것이 뻔해서 임신 사실을 절대 알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궁핍한 처지로 혼자 산부인과를 전전하며 불법 낙태를 해주는 가장 저렴한 병원을 찾아다녔다. 수술 당일에는 엄마가 함께했다. 현금으로 70만원을 지불해야할 보호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불법 낙태는 부르는 게 값이다. 어떤 병원은 에이즈 검사(10만 원 추가)를 의무적으로 하게 했고, 어떤 병원은 자궁을 깨끗하게 하는 시술(10만 원 추가)을 해야한다고 했고, 산모의 건강을 위해 링거(5만 원 추가)를 맞아야 한다고 했다. 대부분의 경우에 낙태 사유를 물어보는데 그럴 때마다 불쌍한 척을 해야 낙태를 해줄 것 같아 구구절절 사정을 이야기했다. 사정이 아무리 딱해도 가격을 깎지는 못했다. 내가 수술을 결정한 산부인과는 낡아빠진 상가 건물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입구에는 ‘이쁜이 수술’ 광고가 피오피 글씨체로 붙어있었다. 나는 병원에서 1차로 늙은 여간호사에게, 2차로 대머리 의사에게 "다음부터 조심하라"는 같잖은 충고를 들어야 했다. 나는 다리걸이에 양다리를 올린 채 수술실에서 잠이 들었다.
시시하고 피곤하다
가슴이 생리 때 보다 훨씬 아프고 커졌고, 라면이 미친 듯이 당겼고, 체온조절이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임신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에 3주면 충분했다. 감각이 예민하기도 했지만 불길한 예감 때문에 몸의 변화를 계속 의식하고 있었다. 수술의 경험은 짧은 임신 기간에 비해 강렬하지 않았다. 간호사가 나를 일으켜 수면실로 옮겼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엄마가 옆에 있었다. 기저귀를 찼는데 피가 많이 나오지 않았다. 아프지도 않았다. 아주 피곤했을 뿐. 밖으로 나왔을 땐 해가 머리 위에 떠있었고 땅에서 열기가 올라왔다. 택시를 타면 좋았을 텐데, 나는 지하철을 타고 버스로 환승해 귀가했다. 1시간 이상 걸렸다. 엄마는 배가 고픈데 딱히 먹을 게 없다며 집 근처 식당가에서 30분 이상 기웃거렸다. 나는 밥 먹을 기운도 없어서 혼자 집으로 돌아와서 잠을 청했다. 엄마는 무심했고 나는 죄책감에 더욱 무기력했던 것 외에 특별할 게 없었다.
낙태는 매우 피곤한 일처리였다. 아주 큰일처럼 느껴지긴 했으나 수술 자체는 아무 일도 아니었다. 나에게 낙태는 당연했다. 나는 아이를 원하지 않았고, 아이를 낳을 상황도 아니었고, 아이를 낳는 것도 무서웠다. 해산의 고통은 죽어도 겪고 싶지 않았다. 아이 때문에 내 삶이 없어질까 두려웠다. 미혼모로 살아갈지, 그 사람과 결혼을 할까도 고민해보았으나 그 고민은 10초도 안 갔다. 그냥 임신 출산 육아 모두 싫었다. 그래서 낙태했다. 그게 뭐 어떻다는 건가? 내 인생에서 최고 잘한 일을 꼽으라면 낙태를 꼽을 것이다.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나만 겪어야 하는 억울함, 알지도 못하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구구절절한 사연을 늘어놓으며 가장 저렴한 낙태를 구걸했던 비참함은 내게 여전히 남아있지만 말이다.
코너에 몰린 주체성
문제는 낙태가 아니라, 어째서 낙태하기까지의 상황이 되었는가였다. 나는 왜 9살 연상을 만났고, 어린 나이에 결혼까지 하려고 했으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관계를 이어가다 파국을 맞았는가? 그러니까 나는 왜 그 남자를 만났는가?
나는 과거에서 그 이유를 찾으려고 했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문제들─아빠의 외도와 폭력, 집을 나갔던 엄마, 혼자 지내던 시간들, 누구도 의지 할 수 없었던 상황─을 끌어와 현재의 나를 분석하려고 했다. 어쩌면 나는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고, 폭력적이면서도 다정하고 능숙하게 나를 다루는 아빠와 같은 남자를 찾았는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폭력적인 남자가 다정하게 굴 때 그렇게 안심이 된다. 안심이 되면 의존한다. 나는 애인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생각을 의존하며 살았다. 물론 애인 의존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생각을 의존하니 당연 주관은 없다. 그것이 가장 수치스러운 부분이다. 왜 타인에게 나의 생각을 아웃 소싱했는가? 나의 과오는 과거의 끌어온다 해도 완벽하게 해명되지 않았다. 불운한 과거가 현재의 나에게 영향을 미쳤음이 분명하나, 나는 과거로만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다. 결국 나의 무지함이 나를 더 악한 상황으로 몰아갔다.
그런 나에게 우습지만 가장 주관적으로 한 선택이 낙태였을지도 모르겠다. 빠르게 판단을 해야 했고, 오롯이 내 문제였으며, 아주 이기적으로 나만 생각해서 결정했다. 코너의 몰린 상황이었다. 누구에게 말을 했겠는가? 또 그 상황에서 누구를 의존할까? 나는 누구의 말을 들어서도 안됐고 그럴 수도 없었다.
내겐 여전히 무지가 남아있지만
낙태를 하려고 하거나 한 사람들은 포털 사이트에 낙태를 검색해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낙태를 검색하다 보면 사람들이 낙태에 대해 질문하거나, 평가하는 글을 볼 수 있다. 천박한 자는 “싸질러 놓았다”라고 말하고, 타인의 고통을 모르는 자는 “즐길 건 다 즐기고 이제 와서"라고 말하고 멍청한 자는 "살해"라고 말한다. 나는 그들을 자신의 얄팍한 정의로움을 위해 익명의 타인에게 자기 잣대를 세우는 자들이라고 정의 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지성을 갖기도 전에 원치 않는 임신을 해버렸다. 공격적인 말들은 약해진 사람을 옭아맨다. 나의 경우에는 상대가 동의 없는 질내 사정으로 범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했기에 차라리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뒤죽박죽 엉망이 된 죄책감과 누굴 겨냥하는지 모를 분노는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무지와 무능을 인정하고 용서해야 한다. 무지를 인정해야 무지를 용서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심심한 위로나 쉽게 깨질 희망이 아닌 단단한 지성이었다. 이 죄책감은 어디서 왔는지를 묻고 스스로 답을 내릴 줄 아는 지성과 언어가 내게는 없었다. 죄책감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다. 그러나 그것의 정체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정체를 알아야 선택할 수 있다. 나는 스스로 질문하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나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또 원하지 않는지도 잘 몰랐다. 타자의 욕망을 따라 살았다. 그러다 잘못되면 무너졌다. 지금의 내가 그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거나 오롯이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기를 실천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딱 잘라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만약 원치 않는 임신을 한다면 그때는 슬픔도 기쁨도 없이 낙태하겠다. 그게 나의 선택이다. 나의 몸이고, 나의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