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사람이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한 건 오래 전 가을이었다. 그날 나는 우주, 동생 승희와 함께 포항 한동대에 페미니즘 강연을 갔고, 지민은 강연장 오른 쪽 맨 끝에서 내 강의를 들었다. 다음 날 지민은 아침 일찍 나에게 빵과 커피, 우유를 가져다주었다. 지민은 “우주님이 다시 운전해서 돌아가는 길이 너무 피곤하시겠어요”라며 조심히 가라고 인사를 건넸고, 우주 역시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그때 지민과 나는 친절한 타인이었기에 우주와 지민도 친절한 타인으로 서로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고 헤어졌다. 지민과 내가 친절함을 넘어 친밀한 연인이 되기 전의 일이다. 내가 지민과 만나는 1년 동안 나는 물론, 우주와 지민도 셋이 한 자리에 모이는 모습을 상상하지 않았다. 세 사람이 만나면 어떤 일이 생길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는 말이 정확하겠다.
눈치 전략
지민과 만난 지 1년쯤 됐을 때, 지민이 tvn 대학토론배틀이라는 프로그램에 나간 적이 있다. 두 달 동안 지민은 토론 준비와 방송 촬영으로 바빴는데, 한 번은 ‘혐오표현을 사회적으로 규제해야 한다’는 주제로 토론을 준비하게 되었다. 마침 우주가 주디스 버틀러의 <혐오 발언>을 비롯한 다양한 책과 논문을 읽으면서 고민하던 주제였기에 나는 조심스레 지민이 그와 관련해서 토론하게 되었다고 알렸다. 학구적인 우주는 지민에 대한 경쟁심보다 토론에 도움이 되는 논증을 찾고 나누려고 했다. 두 사람은 전화 통화로 함께 논증 구조를 짰다. 마치 오래된 동료처럼 치열하게 대화를 나눴다. 그게 두 사람이 처음으로 나눈 대화였다. 그해 지민은 대학토론배틀에서 최종 우승을 했다. 지금도 지민은 그때를 떠올리며 말한다. “우주가 저를 도와줘서 이길 수 있었어요. 식구들 도움이 가장 컸어요.” 우주는 당시를 이렇게 기억한다. “아니, 내가 왜 지민을 도와줘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래도 재밌었어. 기왕이면 이기는 편이 좋잖아. 근데 승은이가 지민이 방송된 모습을 내 앞에서 틀 때는 ‘왜 굳이...’라는 생각이 들었지.” 말하면서 꼭 나를 한 번 흘겨본다.
조마조마하던 그 시기에 나는 엄마에게 배운 눈치 전략을 적극 활용했다. 외할머니는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라고 믿었다. 엄마의 적극적인 눈치와 감정노동 덕분이었다. 할머니 집에 가기 전이면 엄마는 과일을 한 아름 사고서, 할머니에게 “이거 홍서방이 사오자고 했어. 내가 괜찮다고 해도 어머니 좋은 거 드셔야 한다고 하네”라며 슬쩍 말을 흘렸다. 할머니에게 용돈이나 기타 선물을 드릴 때도 마찬가지의 멘트를 날렸다. 그러면 할머니는 “역시 홍서방만한 사람이 없다”고 말하곤 했다. 나도 우주와 지민 사이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도록, 우주 앞에서는 “지민이 우주가 너무 멋있대. 우주가 내 애인이라서 다행이라고 하더라고”(없는 말은 아니었지만, 부풀린 건 사실이다)라고 지나가는 말로 툭 던졌다. 지민 앞에서는 “우주가 지민 참 똑똑하대. 그리고 나 만나느라 고생이 많대”(이것도 없는 말은 아니었다)라며 슬쩍 호감을 흘렸다. 나중에 두 사람은 이런 내 눈치 전략이 서로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어색함 지워내기
폴리아모리 관계를 맺은 뒤, 처음으로 세 사람이 만난 곳은 대구 퀴어문화축제였다. 지민과 관계를 맺고 1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지민은 포항에서 함께 활동하는 동료 여섯 명과 함께 퍼레이드에 참여하기로 했고, 나와 우주는 춘천 동료 다섯 명과 함께 대구로 향했다. 만나기 전 날까지 지민은 밤새 카톡을 보냈다. “나 정말 걱정 돼. 떨려. 어떡하지……” 우주 역시 갈팡질팡했다. 갈래, 안 갈래, 갈래, 아니야 안 되겠어, 아니야 갈래. 몇 번이나 의사를 번복하다가 결국 집을 나섰다. 마침내 축제 한 복판에서 만난 열한 명의 사람들은 반갑게 인사를 나눴고, 사람들 틈에서 우주와 지민도 어색하게 인사를 나눴다. 뿔뿔이 흩어져서 각자 축제를 즐기고 힘차게 행진을 했다. 축제가 끝난 뒤, 뒤풀이 시간. 열한 명의 인원은 술집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우주와 지민은 각자 대각선 끝 쪽에 멀찌감치 떨어져 앉았다. 첫 잔으로 ‘짠’을 한 뒤에 조잘조잘 대화가 흐르던 중, 갑자기 우주가 벌떡 일어나 지민에게 다가가더니 작은 물건을 내밀었다. 우주의 손에는 축제 부스에서 산 무지개 반지가 들려있었다. 반지를 받은 지민은 고맙다고 수줍게 웃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나와 다른 사람들은 환호했다. “오오~” 둘은 서로 술을 따라주며 반갑다고 인사했다. 여기까지는 아주 훈훈한 전개였는데, 그날 과음한 지민은 결국 혼란을 참지 못하고 자리를 뛰쳐나갔다. 지민을 위해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겠으나, 그날 지민이 나에게 사과하기 위해 밤새 전화했다는 정도만 밝히겠다.
며칠 뒤 지민은 우주와 나에게 제대로 사과하고 싶다며 자리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우주와 지민과 나는 포항 바다가 훤히 보이는 창이 큰 카페에서 만났다. 어색한 기류가 흐를 틈도 없이, 주문한 커피가 나오자마자 우주는 두꺼운 종이 뭉치를 지민과 내 앞에 내밀었다. 당시 강사로 일하던 우주가 채점하던 학생들 답안지였다. 객관식으로 되어 있으니 답만 잘 확인하면 된다며 우주는 지민과 나를 조교처럼 편하게 부려먹었다. 지민과 나는 어이없다고 웃으면서도 채점을 시작했다. 두 시간 동안 세 사람은 몇 마디 말없이 일만 했다. 마침내 채점을 마치고 우리는 바다를 보러 카페를 나섰다. 셋이 나란히 길을 걷는데, 두 사람의 시선은 자꾸 나를 향했다. 그것도 아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말이다. “으휴, 홍승은…….” 두 사람이 한숨과 함께 동시에 내 이름을 부르던 장면이 생생하다. 바다 앞에서 기지개를 펴고 크게 숨을 쉬었다. 그때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떠오르지 않는 걸 보면, 분명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어색함을 지우려고 노력했을 거다.
다음 코스는 두 사람이 좋아하는 알코올 섭취 시간. 영일대 앞 술집에서 1차를 마치고, 노래방에 갔다. 한참 노래를 부르는데, 밖에 나간 지민이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걱정되어 나가보니 지민은 복도에 앉아서 울고 있었다.
“왜 그래, 지민아.”
“나 너무 힘들어…….”
지민은 우주와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겹치는 것 같고, 우주가 부르는 노래 가사 하나하나가 다 무겁게 느껴진다고 했다. 내색하지 않고 있던 우주도 아마 같은 마음이었을 거다. 겨우 지민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우리는 근처 오락실에서 농구 게임을 했다. 두 사람은 나에게 나란히 농구 게임에서 졌고, 한 마음 한 뜻으로 나를 이기겠다고 애썼다. 다음 게임인 사격에서도 나는 두 사람을 가볍게 이겼다.
우주와 내가 포항으로 이사한 뒤로 세 사람이 만나는 주기는 짧아졌고, 함께 있는 시간은 늘었다. 우주는 지민이 소개한 다양한 포항 사람들과 술친구가 되었다. 셋이 주최해서 우주와 내가 살던 집에서 세미나를 열기도 했다. 공부는 조금, 술은 많이 마시는 우주표 ‘학,술’ 모임이었다. 하루는 과음한 지민이 거실에서 그대로 뻗어버려 셋이 한 지붕 아래서 잠을 자게 되기도 했고, 포항에 지진이 났을 때는 함께 공원으로 대피해 야외에서 밤을 꼴딱 새우기도 했다. 그해 크리스마스엔 셋이 함께 영화관에 갔다. 예전에는 크리스마스에 자신과 보내자고 하던 두 사람이, 나랑 보내면 다른 한 사람이 외로울 거라며 차라리 함께 보자는 식으로 말하게 되었다. 차곡차곡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두 사람을 서로에 대한 질투보다 연민과 공감이 커진다고 했다. 여느 동화의 마무리처럼, 그 뒤로 세 사람은 한 집에서 오래오래(?) 함께 살게 되었는데…… .
얼마 전, 우주가 지민에게 물었다. “지민은 대체 승은이 왜 좋아요?” 나는 그 질문이 묘하게 기분 나빠서 물었다. “지금 나 욕하는 거지.” 내 반응에 상관없이 지민은 답했다. “그러게요…… 대체 왜 좋아할까요? 우주는 승은을 왜 좋아하는 거예요? 정말 궁금하다.” 두 사람은 나를 사이에 두고 깔깔 웃었다.
꼭짓점
나도 우주와 지민이 나를 왜 사랑하는지 모르겠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규범을 넘고 애인의 애인과 함께 사는 두 사람의 속을 도통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다. 신기하고, 고마워서 그렇다. 두 사람은 가벼운 장난을 칠 때 빼고는 서로에게 말을 놓지 않는다. 서로에 대한 험담을 한 적도, 서로를 무시하는 발언을 한 적도 없다. 일상에서의 사소한 불편함을 표현한 적은 있어도 그게 상대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두 사람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참고 사는 게 아니라, 서로이기 때문에 가능한 은밀한 연대감이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짐작할 뿐이다. 언젠가 두 사람에게 애인이 생긴다면, 나도 두 사람의 마음을 알게 될 날이 있을까. 그때 나는 애인의 애인을 미워하지 않고, 먼저 손 내밀거나 내민 손을 덥썩 잡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자신은 없지만, 나에겐 든든한 선배 우주와 지민이 있으니 가능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믿음은 있다.
V 관계를 맺는 폴리아모리스트에게서 메타무어끼리 사이가 안 좋아서 걱정이라는 상담을 받곤 한다. 첫 애인이 두 번째 애인에게 텃세를 부리는 경우도 있고, 두 번째 애인이 첫 애인을 험담하면서 기존 관계를 흔들려는 사례도 있다. 그럴 때면 셋 모두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러니까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결론으로 흐르면 안 되는데, 각 관계의 맥락과 개인의 성향에 따라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뾰족한 답을 내리기는 어렵다.
내가 두 사람에게 배운 메타무어 간의 중요한 태도는 이 정도이다. 먼저 손 내밀기. 내민 손을 기꺼이 잡기. 금기 따위 사뿐하게 밟을 수 있는 담력 키우기. 섬세한 배려를 몸에 익히기. ‘술’ 같은 공통의 연결고리 두기. 함께 공부하고, 여러 관계 속에서 친밀감 확장하기. 가장 친해지는 방법은 꼭짓점에 있는 ‘나’를 함께 씹으며 즐기는 법이 있겠다. 지금 자기가 힘든 이유는 ‘애인의 애인’ 때문이 아니라 ‘애인’ 때문이라고 정확하게 탓하는 방법도 있다.
나와 같은 꼭짓점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는 이런 말을 전달하고 싶다.
어느 정도 눈치와 감정 노동이 필요할 거예요. 하지만 자신이 아플 정도로 너무 무리하진 말아요. 세 사람 모두 관계를 위해 노력해야 가능한 만남이니까요. 두 사람이 사이가 안 좋다면, 아예 서로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약속하면 어떨까요? 저는 셋이 만나고서 나아진 경우지만, 만나고 안 좋아지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다만,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존중받을 수 있도록, 설사 한쪽이 서운함을 표현해도 함께 험담하기보다 그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을 잘 표현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아, 가끔은 과한 험담이 필요할 수도 있어요. 저는 가끔 오히려 상대를 과하게 험담해서 듣는 쪽이 “승은, 그 정도로 화낼 일은 아니야.”라는 방식으로 서로를 변호하게 만들기도 했어요. 상황에 따라 잘 적용하길 바라요. 무엇보다 당신이 이 관계에서 단지 누리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노력하고 있다는 걸 스스로도 믿고, 애인들에게도 그 점을 꼭 알려주세요. 당신 역시 노력하고 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