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시 55분, 교과서를 덮고 오른발을 책상 밖으로 미리 뻗는다. 5분 뒤 점심시간 종이 울리면 제일 먼저 뛰어나가기 위해서다.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그날도 급식실에 일등으로 도착했다. 그런데 그날의 점심시간은 유독 초조했다. 제일 먼저 밥을 받아놓고도 먹는 둥 마는 둥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친구들은 어디 아픈 건 아니냐며 나를 걱정했다. 그 다정함이 새삼스럽게도 소중해서 괜히 슬퍼졌다. 조금 뒤에도 너희는 여전히 나에게 다정할까?
처음으로 커밍아웃을 하는 날이었다. 나는 두려웠다. 모두 한순간에 나를 경멸하게 될까 봐 친구를 잃어버릴까 봐 겁났다. 동성애자에 관한 이야기를 해본 적은 있지만, 우리와 관련 없는 사람들 얘기였다. 연예계 가십처럼 스쳐 지나가는 화제였을 뿐이고, 그런 얘기만으로 반응을 가늠할 수는 없었다. 전날 애인으로부터 중학교에서 아우팅 당했던 이야기를 들었다. 혹시라도 잘못되면 학교는 계속 다닐 수 있는 건지 걱정됐다.
그래도 말해야 했다. 조금씩 우리 관계를 드러내기로 애인과 약속했고, 당시에는 이게 그 애를 상처 주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애인과 함께 친구들 앞에 섰다. 그리고 몇 번을 망설였지만, 마침내 입을 열었다.
우리 사귀는 사이야. 오늘이 XX일 째야.
그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여자인 애인과 함께 나타나서 연애 중이라고 밝힌 거였다. 친구들의 얼굴을 똑바로 볼 자신이 없어 고개를 떨궜다. 실제로는 3초도 채 되지 않았겠지만, 나에게는 영원처럼 길었던 침묵을 깨고 한 친구가 말했다.
우와 축하해!
그날 애인은 축하한다는 말에 울음을 터뜨렸다. 그럴 만도 했다. 늘 숨기고 핑계 대기 급급했던 우리였는데, 드디어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축하를 받은 순간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나는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뭐랄까, ‘어, 이게 아닌데?’ 싶었다. 기대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이날을 위해 인터넷에서 많은 검색을 해봤고, 친구들이 받아들이지 못할 때를 대비해 하나씩 설명할 내용도 준비했다. 이게 왜 이상하거나 더러운 일이 아니며, 너희가 왜 나를 받아들여야만 하는지 설득하려 했단 말이다. 그런데 누구도 조금도 눈살을 찌푸리지 않았고 난 축하를 받았다. 생각한 것과 다르게 굉장히 평화로웠다. 내가 운이 좋았던 걸까? 아니면 친구 복을 타고난 걸까?
혐오도 경멸도 무게도 없었던 커밍아웃
괜히 꼬였던 걸 수도 있지만, 이야기를 급하게 종결짓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들 오래 끌지 않고 어서 마무리하고 싶어서 가볍게 결론을 내버렸다. 아무런 혐오도 경멸도 없었지만, 내가 원했던 만큼의 무게로 다루어지지도 않았다. 남자친구를 소개할 때의 반응과도 생판 달랐다. 보통 남자친구를 소개하면 언제부터였는지 어떻게 하다 사귄 건지 이것저것 물어보고 장난도 치곤 했다. 이후에 계속 커플로 대우해주는 건 물론이다. 똑같은 친구들인데 나와 애인에게는 사뭇 달랐다. 더 긴 말을 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물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금방 입을 다물어버렸다. 이해하지 못한 게 많아 보였지만 이해시킬 기회도 없었다.
친구들은 이후에도 내가 애인이 있다는 걸 잊은 것처럼 행동했다. 나를 남자인 친구와 여전히 엮어주려 했고, 생일과 같은 한정되고도 중요한 날에 애인을 만나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남자친구가 생긴 친구들은 데이트를 위해 모임을 빠지는 걸 당연히 이해 받았는데 말이다. 누구도 기꺼이 내 연애 상담을 해주려 들지도 않았다. 그 시절 나와 친구들의 가장 중요한 화제는 연애였고, 우리는 서로의 과거와 현재의 연애에 관해 모두 공유했다. 그러나 애인을 소개한 뒤로 나에게는 아무도 연애 이야기를 물어보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나는 비밀을 공유했는데, 뭔가 더 확실한 선이 그어진 기분이었다. 말하기 전보다 분위기는 더 불편했고, 우리였던 나와 그들 사이에 엄청난 거리가 생겨버렸다.
내 인생의 커밍아웃은 늘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다. 면전에서 더럽다거나 혐오스럽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뭐, 원래 사람을 눈앞에 두고 그런 말을 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든 내가 이 말을 하려 할 때마다 사람들은 욕이나 비난은커녕 흐지부지 넘어가기 바빴다. 엄청난 비밀이라도 가진 것처럼 분위기를 잡고 시작해도 진지한 상황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친구들은 장난처럼 화제를 전환하며 아무렇지 않게 넘겼고, 아무도 다시는 그 비슷한 이야기조차 꺼내지 않았다.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쉬쉬하며 넘어갔다. 내가 더는 비밀로 하고 싶지 않다는데 왜 그러는 걸까? 내 커밍아웃에 큰 무게를 싣지 않으려고 온 세상이 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노력했다. 커밍아웃 이후에도 남자나 결혼 이야기를 꺼내는 엄마에게 나는 레즈비언이라는 걸 몇 번이나 상기시켜야 했다. 그런 대답 이후에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고, 엄마는 항상 못 들은 척 외면했다. 한참 뒤 또 그 사실을 잊은 것처럼, 마치 우리 사이에 그런 대화가 한 번도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처음으로 시간을 되돌려놓곤 했다.
그래서, 전투적 커밍아웃
오기가 생겼다. 계속 말하는데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니! 이후 전투적으로 커밍아웃을 하기 시작했다. 모르는 사람들이 가득한 모임에 도착해 처음부터 자기소개 시간에 얘기를 했다. 혹은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의식하지 못하고 말해버린 듯이 커밍아웃을 했다. 연애 이야기를 하다가 ‘제 예전 여자친구도~’ 하는 식이었다. 사실 내가 이걸 실수로 말할 리가 없다. 얼마나 입에서 나가는 모든 말들을 꼼꼼하게 점검하는 것에 익숙한데 말이다. 나는 수업 시간에 발표하면서도 커밍아웃을 했고, 회사에서도 누군가 묻기만 하면 대답하기 직전까지 단서를 흘렸다. 신기하게도 아무도 끝까지물어보지 않았지만 말이다.
괜찮다고 생각했다. 나는 주변에 좋은 사람들을 둔 쿨한 레즈비언이고, 레즈비언인 건 죄도 아니고 숨길 필요도 없으니까 말이다. 따지고 보면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모두들 주변에 성소수자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내가 직접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 나는 레즈비언이 여기에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내 주변엔 없어.’와 ‘살면서 만나본 적 없어.’에 맞서 싸우고 싶었다. 내 존재를 똑똑히 보여주고 싶었다. 운동이고 실천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점점 사람들의 눈빛이 비수처럼 느껴졌다. 계속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사실은 그 놀란 눈들이 싫었다. 내 얼굴을 힐끔거리는 것이 지긋지긋했고, 나를 어색하게 대하며 과장된 말투와 행동을 보이는 것에 질렸다. 뭐 다른 사람들 입장에서는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듣고 놀랄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왜 놀라는 걸까? 세상에는 이성애자만 있는 줄 알아서? 제멋대로 내가 당연히 이성애자일 거로 생각하고 있어서? 레즈비언은 숨어서 살아야 하는데 이렇게 당당해서? 이유가 뭐든 달갑지 않다.
다들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행동하지만 아무 일이라는 게 너무나도 잘 느껴졌다. 내 말을 들은 게 분명하고 표정이 변하는데 애써 태연한 척 넘어가려고만 한다. 아무렇지 않을 수 없다면 차라리 그렇게 말해야 나도 또 대답할 텐데, 다들 괜찮은 척하고 입을 다문다. 어느 순간 사람들이 그 자리를 떠나 하는 말들이 내 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들은 자기의 친밀한 지인이라는 이유로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내 얘기를 했을 것이다. 혹은 정체성으로 내 과거와 미래를 넘겨짚고 섣부른 판단을 했을지도 모른다. 비슷한 말을 많이 들었기에 어떤 말을 했을지 너무나 쉽게 그려진다. 다른 사람을 두고 오가던 말들이 주인공만 나로 바뀐 채 반복되었겠지. 내 앞에서는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사람들이, 뒤에서 나를 도마 위에 올려 난도질했을 게 분명하다.
커밍아웃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그래서 그만두기로 했다. 나는 도대체 무엇과 싸우고 있었던 걸까? 나와 내 친구들의 행복을 위해 싸운다면서, 굳이 소중한 나 자신을 고통에 내던지고 있었다. 이제 그런 커밍아웃을 멈추기로 했다. 내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는다면, 더는 해주지 않는 것도 방법이니까. 고통스럽게 내 삶을 설명하는 데에 지쳤고, 내가 애써 드러내지 않아도 나는 당연히 있다. 뭐 하러 자꾸 말해야 하나? 이것도 소모적인 일인데 말이다. 왜 나만 존재를 가시화하려고 노력해야 하나? 그걸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잘못 아닌가? 나는 커밍아웃하지 않아도 계속 존재한다. 보이지 않는다면 당신의 탓이다. 커밍아웃하고 싶다면 할 수 있지만, 무언가에 억지로 떠밀릴 필요는 없다.
모두 커밍아웃을 하지 말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커밍아웃은 용감한 일이다. 의도하지 않더라도 우리를 더 잘 보이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용기를 낸 사람들이 참 멋지고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하다. 아직 힘이 남아있는 다른 사람들이 계속해 줘서, 나는 조금 편한 마음으로 힘을 빼는 걸 연습할 수 있다. 나는 커밍아웃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꿈꾼다. 처음부터 인간의 기본값을 따로 설정해놓지 않아서, 굳이 나는 예외라고 이러쿵저러쿵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곳에 살고 싶다. 그러나 내가 사는 이곳은 그런 사회가 아니고, 나는 설명하는 것에 조금 지쳤다. 다시 힘이 났을 때 내가 존재한다고 말하려면, 지금은 그렇게 살아남아야 할 것 같다. 벽장 안과 밖 어디서든 우리가 자유롭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