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한국을 떠나 처음 뉴질랜드로 날아왔다. 언어도 사람들도 심지어 공기마저 낯선 이곳에서, 도움을 청할 사람 한 명도 없이 홀로 살아갈 게 걱정스럽고 무서웠다. 나는 때때로 도망칠 수 없는 두려운 상황에 처하면 일단 다이어리를 펼치고 계획을 세우는데, 사실 이번에는 어떤 계획을 세워야 할지도 감이 안 잡혔다. 운동이라면 매일 할당량과 시간을 배정하고, 시험공부라면 시험 범위인 분량을 쪼개 매일 공부할 양을 배정하는 식으로 계획을 세울 텐데, 지금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조차 갈피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다이어리의 텅 빈 페이지를 한참 바라보다 마침내 써 내려간 세 가지 목표가 있다.
하나.
뉴질랜드에서
커피 배우기
나는 한국의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일했다. 그동안 해본 어떤 일보다 적성에 잘 맞아 진지하게 직업으로 생각했다. 바리스타가 저임금과 강도 높은 노동과 고용 불안에 시달리고, 전문성을 인정받지 못하며, 서비스 노동자로서 과도한 감정노동과 꾸밈 노동을 강요받고, ‘갑질'하는 무례한 고객을 마주해야 하는 한국적 상황은 내가 나라를 떠나야겠다는 결정에 크게 무게를 실어주기도 했다. 지금처럼 커피를 만들고 고객을 만나는 것에 기쁨을 느끼며 살아가려면 한국이 아니어야 했다. 커피를 만드는 일이 아무리 좋아도, 영업시간이 끝나 청소를 하고 있는데 커피를 마시겠다며 잠긴 문을 흔들어대고, 순서를 지켜 줄을 서지 못하고 멀리서 반말로 주문하고 신용카드를 던지는 고객을 만나는 일은 나를 지치게 했고, 그렇게 매일 앞치마 벗고 한판 붙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계속 살아갈 자신은 없었다.
호주와 뉴질랜드는 고유의 커피 문화가 있고, 이에 관한 자부심도 남다르다. 두 나라는 글로벌 브랜드 스타벅스가 성공하지 못한 나라로도 잘 알려져 있다. 2019년 12월 기준으로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되는 스타벅스 매장은 뉴질랜드 전역에 걸쳐 딱 24개다. 이곳의 인구가 적은 걸 고려해도 한국에 스타벅스가 1,000개도 넘는 걸 생각하면 여기서 성공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이건 뉴질랜드 사람들이 커피를 즐기지 않아서가 아니라, 현지 커피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은 로컬 브랜드나 오래된 동네 카페를 더 신뢰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자부심 가득한 커피가 궁금했다. 한국의 커피 소비량과 시장 규모도 세계적으로 손에 꼽히고 한국의 커피 문화도 나름대로 특색이 있기에, 뉴질랜드의 커피가 무조건 더 우수하다고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단지 내가 나고 자란 한국과 다른 점이 특히 많은 곳이기에 꼭 경험해보고 싶었다.
뉴질랜드 카페는 한국과 달리 일반적으로 오후 3~4시, 빠르면 1~2시에 영업을 종료한다. 주로 아침에 커피를 마시고 브런치나 점심 식사로 커피를 곁들이기 때문인데, 저녁이나 밤늦게까지 커피를 마시는 한국과는 아주 다르다. 또한, 한국에는 드립 커피도 꽤 수요가 있는데, 여기는 독보적으로 에스프레소를 선호한다. 한국인들이 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신다면 뉴질랜드의 국민 커피는 단연 플랫 화이트다. 손님 10명 중 8명 이상은 플랫 화이트를 주문하고, 매장별로 롱블랙이나 모카치노, 카푸치노 등이 뒤를 잇는다. 한국 소비자들이 아메리카노나 드립 커피 등 블랙커피를 선호하는 것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플랫 화이트는 에스프레소와 스팀 우유를 섞는다는 점에서 카페라테와 비슷하지만, 카페라테보다 폼이 더 적고 진한 커피다. 또한, 한국의 카페는 디저트나 케이크, 간단한 샌드위치 정도만 제공하는 곳도 많지만, 뉴질랜드의 카페는 대부분 주방과 셰프가 따로 있어 식사 메뉴를 함께 취급한다. 그 외에도 뉴질랜드에서는 바리스타와 손님들이 사무적으로 음료만 주고받는 게 아니라 친구처럼 안부를 물으며 지내고, 아이스 커피보다 뜨거운 커피를 선호해서 여름에도 얼음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카페도 있다는 점 정도가 한국과 다르다. 처음에는 모두 낯설고 어색했지만, 지금은 이런 카페 문화에 익숙해졌다.
둘.
혼자 지내는 법
익히기
한국에서는 쉬는 날이면 늘 약속과 모임이 있었다. 혼자 있는 시간을 지켜내 보려고 신중하게 일정을 잡는데도 그랬다. 하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해야 할 일도 가야 할 곳도 너무 많았다. 그나마 외출하지 않는 날에도 집안일을 하느라 정신없었다. 애인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늘 함께 살았고 심지어 함께 일한 적도 있어서 각자의 시간이 거의 없었다. 친구들도 거의 겹쳐서 모임에도 함께 나갔다. 혼자 잘 지낼 수 있어야 같이도 잘 지낼 수 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나는 주변 사람들이나 애인에게 많이 의존하는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에게 많이 휘둘리기도 했고, 늘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내 역량 이상으로 노력하고 소진됐다.
처음 뉴질랜드에 왔을 때는 혼자가 되는 게 가장 걱정이었다. 나는 늘 애인과 함께 다녔기에 ‘혼밥’도 별로 해본 적이 없었다. 학교 다닐 때부터 수업까지 애인과 같이 들었고, 노는 건 물론이고 집안일이나 개인 용무까지 늘 오랫동안 애인과 당연히 함께했는데, 갑자기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해내야 했다. 해야 하는 일들은 조금 어려워도 그런대로 해내면 그만이었지만, 노는 건 정말 문제였다. 혼자서는 근사한 식사도 재미가 없었기에 끼니를 늘 대충 해결했고, 혼자 하는 산책도 혼자 보는 영화도 재미가 없어서 괴로웠다. 그렇다고 한국에 있는 애인에게 연락해봤자 당장 옆에 있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동안은 갑자기 생겨버린 너무 많은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우울했고 외로웠다.
그러나 그런 일상에도 차츰 적응했고, 요가를 배우기 시작하며 확실히 나아졌다. 요가는 혼자서도 재미를 느끼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고 몸에 집중하니 잡념이 사라지고 편안하게 잠들 수도 있었다. 클래스는 3개월쯤 다니고 여러 이유로 그만뒀지만 혼자서 지금까지 꾸준히 수련하고 있다. 그러면서 내 몸과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법을 조금씩 깨우쳤다. 애인과 다시 함께 있게 된 지금, 예전처럼 모든 활동을 애인과 함께하길 바라지는 않게 되었다. 비자 때문에 다시 떨어져 있어야 하는 기간에도 예전만큼 조급해하고 불안해하지는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져 있어야 하는 건 슬픈 일이지만, 이젠 애인과 꼭 붙어있지는 않아도 나름의 소소한 즐거움을 찾으며 살 수도 있다. 혼자 잘 있게 되자 친구나 가족들에게도 덜 의존하게 되어 이제는 누군가의 동료, 친구, 딸, 혹은 애인으로서의 기대보다 내가 원하는 일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서 얻은 이점도 있다. 한국에서 부모님 근처에 살면서 계속 얼굴을 볼 때는 각종 기대와 요구를 외면하기 어려웠는데, 여기 와서는 아주 자유로워졌다.
셋.
영어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유창하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수준은 아니더라도 영어로 질문을 받으면 머릿속에서 너무 오래 걸리지 않는 선에서 대답을 생각해내 말하며 일상적인 소통을 하고 싶었다. 처음 왔을 때는 간단한 질문을 받아도 머리가 하얘지고 당황했지만 지금은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차근차근 이야기하다 보면 의미가 통하는 대화를 만들 수 있다. 사실 새롭게 단어를 알게 된 건 얼마 안 되고, 지식을 많이 습득한 것도 아니라서 실제로 시험을 본다면 점수에는 크게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시험 점수와 실제 상황에서 영어를 쓸 수 있는 능력은 다르고, 영어도 결국 언어니까 소통에 의의를 둔다면 소통이 가능해졌다는 점에서 내 실력은 굉장히 향상되었다. 또한, 오랫동안 영어에 콤플렉스가 있어서 개인적인 성취로는 그보다 더 큰 의미로 와닿는다.
이 땅을 밟은 지 2년이 되어가는 지금, 놀랍게도 처음 세웠던 목표들은 모두 이루어졌다. 뉴질랜드에서 바리스타로 일하며 이곳의 커피에 익숙해졌고, 현지 전문가에게 커피 내리는 법을 배울 기회도 있었고, 일하며 라테아트도 많이 연습했다. 혼자 시간을 보내는 법, 외로움을 달래는 법뿐 아니라 혼자 결정하고 책임지며 삶을 지속하는 법까지도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영어로 소통하는 것도 일상 대화 안에서는 큰 문제가 없다. 아니 가끔 문제가 생기기도 하지만 처음보다는 확실히 나아졌다. 이곳에 오기 전의 나와 온 이후의 나는 분명히 다르다.
한국, 그리고 뉴질랜드
한국에서는 언제부턴가 늘 차가 오는 걸 보면 치여 죽고 싶었다. 나는 목표로 했던 대학에 합격한 후 긴 무기력에 시달렸다. 취업 준비를 해야 하는데 더는 무언가를 준비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한가했던 건 아니다. 바쁘게 인권 모임과 총여학생회 활동을 열심히 했지만, 오히려 남은 기력까지 다 소진했을 뿐이다. 공부를 하지 않아서 당연히 성적은 잘 나오지 않았고, 영어 점수를 만들기 위해 학원에 다녔지만 정작 시험을 보지 않았고, 시민 단체에서 일하려 했으나 면접에서 떨어졌고, 아르바이트하던 교육 회사에서 직원 자리를 제안해 다녔지만, 그마저도 일 년 후 충동적으로 그만뒀다.
퇴사하고 복잡한 기분에 런던으로 여행을 갔던 걸 계기로 한국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건 꽤 오랜만에 생긴 목표다운 목표였다. 일단 외국에서도 먹고 살 수 있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 바리스타로 일하기 시작했다. 일을 시작하고 한국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은 점점 강해졌다. 매장 선임은 내가 아직 서툴고 일을 잘 못 한다는 이유로 스팀 피쳐를 집어 던지며 욕설을 내뱉었다. 교육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실무에 투입해놓고는 음료 레시피를 틀리면 모욕에 인신공격을 퍼부었다.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거나 인사를 받아주지 않거나 간식을 나누어 먹을 때 내 몫을 주지 않는 식으로 무시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러던 그 선임은 내가 연차가 쌓이고 일을 잘하게 되자 마침내 생글생글 웃으며 동료들의 친목 모임에 초대했다. 이런 일은 처음이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능력이 있어야 사람대접을 했다. 졸업하고 들어갔던 회사에서는 나를 유능하다고 평가했지만, 그렇지 않은 동료를 무시하곤 했던 게 떠올랐다. 정말 지긋지긋했다.
뉴질랜드에 오고 나서 요리에 재미를 붙였다. 직접 요리하지 않고는 끼니를 챙기기 어려워서다. 불면증은 더 심해졌다. 아직 영주권을 받은 게 아니어서 미래를 계획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청소 상태가 완벽하지 않아도 대충 타협하고 살게 됐고, 모든 게 정돈되고 정렬되어 있지 않아도 참아내게 됐다. 병원비가 비싸서 영양제를 챙겨먹고 꾸준히 운동하게 됐다. 화장하지 않고도 밖에 나갈 수 있게 됐다. 운전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절대 가질 수 없었던 습관이다. 여기서 우리는 늦어도 오후 8시나 10시쯤 잠자리에 드는데, 한국에서는 퇴근도 못 했던 시간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채식을 실천한 적이 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그만뒀는데, 4년 만에 뉴질랜드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식당마다 비건이나 베지테리안 메뉴가 있고 식자재도 쉽게 구할 수 있어 한국보다 선택지가 다양하다. 뉴질랜드에 오고 나서 삶에 여유가 생겼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것도 상황이 안정된 것도 아니지만 주변 사람들을 더 애정으로 대하고 나와 관련 없는 일에도 마음 쓸 수 있는 감정적 에너지가 생겼다. 한국에서 몇 년째 번아웃 상태였다는 것도 와서 새삼 깨달았다. 여기서는 사람 만나는 빈도도 훨씬 낮아 진심으로 약속을 기대하고 기다릴 수 있다. 한국에서는 모든 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걸 요구받았던 것 같다. 업무뿐 아니라 인간관계까지 말이다. 그러고 보니 뉴질랜드에 오고부터는 다이어리도 쓰지 않게 되었다. 일정이고 계획은 내 머리로 기억할 수 있는 만큼을 넘지 않는다. 여기 와서는 쇼핑을 좋아하지 않게 됐다. 한국처럼 싸고 예쁜 게 많지도 않고 내 동선에 쇼핑할 곳이 많지도 않다.
뉴질랜드에 와서 가장 달라진 점은 무엇보다도 누구와 비교하지 않게 된다는 점이다. 여기 온 뒤로 트랙이 달라졌기에 더는 한국인들과 비교할 수가 없다. 누구는 어디에 취직했고 누구는 시험에 합격했고 누구는 결혼했는지가 관심사에서 정말 멀어졌다. 비교하기가 어렵다 보니 남의 시선에도 신경 쓰지 않게 된다. 한국에서는 늘 시선을 의식했다. 비단 화장이나 옷차림에 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물건을 하나 사거나 새로운 취미를 가지려 할 때는 물론이고, 내가 어떻게 살고 어떤 일을 할지 결정할 때조차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다. 여기서는 그럴 필요가 없으니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생각하게 된다.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어쩌면 이제는 그냥 트랙에서 탈락해버린 느낌이다. 달릴 트랙이 없으니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뭔지 알아내기 위해 인생을 바닥부터 다시 고민해보게 되고, 그건 사실 나쁜 점이기도 하다. 때때로 버틸 수 없을 정도로 불안하고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웃기지만 여기 와서 ‘희망’을 얻었다. 희망이라는 걸 어디서 얻는다는 게 좀 의아하지만, 다시 무언가 열심히 해보고 싶어졌다. 언어, 학벌, 인맥 같은 내가 한국에서 가졌던 기득권이 여기서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점은 물론 절망적이고, 있던 희망조차 잃어야 마땅할 것 같다. 그러나 한국에서 내가 희망이 없었던 건 언어를 못 하고 학벌이나 인맥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나는 나보다 훨씬 좋은 성적을 받았고 영어도 잘하고 자격증도 많고 대외 활동도 많이 했던 수많은 똑똑한 선배들과 동기들이 취업에 실패하는 걸 보며 취업을 포기했다. 그 사람들이 원하는 기업에 합격하지 못한 건 열심히 살지 않았거나 똑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여성이기 때문이었고, 그 점은 내가 더는 희망을 품을 수 없게 만들었다.
여기서 내게 기회가 없는 주된 이유는 언어 장벽과 비자 때문이다. 영어는 공부해서 실력을 올릴 수 있고 비자는 노력해서 받을 수 있는 부분이다. 내가 여성이라서 혹은 성소수자여서 안된다고 느낄 때와는 그 무력감의 무게가 다르다. 물론 여기서도 내가 여성이어서 혹은 백인이 아니라서 갖는 한계가 있다. 그래도 지금 위치에서 영어를 잘하게 되거나 영주권을 받는다면 삶에 변화를 줄 수 있는 부분이 보인다는 점이 노력해 볼 원동력이 된다. 경쟁이 싫어서 뉴질랜드에 왔지만, 영주권도 알고 보면 또 하나의 레이스다. 그러나 이제는 답이 아니라면 언제든 과감하게 다른 길을 찾을 용기도 있다. 세상이 다 똑같지는 않다는 걸 알고 나니 오랜 탈진에서 벗어날 힘과 자신감이 생겼다. 그것만으로도 이 도전의 가치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