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게 뭔지 몰라서 일단 돈을 벌고 있어요. 근데 그거 아세요? 월급에도 중독이 돼요.
케이크가 맛있는 프랜차이즈 커피숍에서 밀코를 만났다. 유난히 달콤한 디저트가 필요한 날이라며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레드벨벳 케이크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흰 피부에 잘 어울리는 옅은 갈색 머리칼과 살짝 찡그린 듯한 차가운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내내 조금은 퉁명스러운 듯한 말투로 대화를 이어가는가 싶었지만, 긴장이 조금 풀어진 다음에는 꽤 자주 웃는 편이었다. 차가운 이미지가 신경 쓰일 때도 있다는 밀코지만, 웃을 때면 눈이 크게 휘어지고 입이 활짝 열려서 평소의 표정과 확연히 다르게 얼굴 전체가 열린다는 느낌을 준다.
Q. 오늘의 사소한 잘한 일을 말해주세요.
A. 지금 생리 전이라서 식욕이 폭발하고 있는데, 제가 다이어트 중이거든요. 아직 자제력을 잃지 않고 먹을 것 조절을 잘하고 있어요. 먹어야 할 양을 ‘밥 반 공기’ 이런 식으로 정해 놓는데 식욕이 더 생겨도 딱 정해둔 정량만큼만 먹었어요. 건강 때문에 다이어트를 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제가 스스로 약속하고 정한 일을 계속 잘 해낸다는 게 뿌듯하기도 해요. 식단 조절과 함께 필라테스를 하는데 벌써 6개월이 넘었어요. 일주일에 네 번씩 가는데 힘들지만 다녀오면 몸이 가벼워요. 그새 체지방이 좀 빠졌고 근육이 붙은 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전에는 계속 집에서 유튜브 보면서 홈트레이닝을 했었는데, 어떤 부위에 힘을 줘야 하는지도 다치지 않게 하는 방법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제대로 해보려고 가서 등록했는데 등록하길 잘했어요. 뛰고 달리는 격한 운동은 저한테 안 맞는 것 같아서 요가랑 필라테스를 고민하다가 필라테스를 선택했어요. 필라테스는 원래 재활 운동이었다고 해요. 틀어지고 뒤틀린 직장인의 척추 교정에 좋다고 해서 하기 시작했는데 아주 만족스러워요.
Q. 돈을 벌기 위해 일하시나요? 아니면 이루고 싶은 게 있으신가요?
A. 비율로 따지자면 지금은 전자와 후자가 6대 4 정도에요. 원래는 8대 2 정도 됐어요. 아직은 뭘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으니까 일단은 주어진 일을 하는 거죠. 저는 대학교를 다니다가 그만둬서 사실상 고졸인데, 그런 조건으로 들어갈 수 있는 직장이면서 월급과 복지가 나쁘지 않아서 그럭저럭 만족하고 있어요. 돈을 안정적으로 벌면 필라테스처럼 배우고 싶은 게 있을 때 배울 수도 있고요. 애인한테도 더 잘해줄 수 있어요. 지금 제가 중간에 한 번도 안 쉬고 회사생활을 8년 했어요. 근데 그동안은 계속 월급이 들어오면 생각 없이 다 썼어요. 이제는 재미있고 하고 싶은 걸 찾았으니까 돈이 들더라도 취미에 쓰고 싶어요. 가죽공예에 관심이 생겼거든요. 올해 말까지는 전문가 코스를 듣고 싶어졌어요. 얼마 전에도 원데이 클래스로 가죽공방에서 카드지갑을 만들어봤는데, 사실 이번에는 오래 걸려서 원데이가 아니라 이틀 걸렸어요. 만들어서 선물도 했어요. 이렇게 예쁜 걸 직접 만든다는 게 재밌더라고요. 근데 거기서는 카드지갑 같은 소소한 것만 만들 수 있고 가방이라도 만들기 위해서는 전문가 코스를 들어야 하거든요. 지금 당장 회사를 그만두고 이걸 돈벌이 수단으로 쓰지는 못하더라도, 저는 일단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있고 실용적으로 당장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낸다는 게 좋더라고요.
Q. 십 년 전이나 더 과거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A. 딱 수능 백일이 남았을 때의 여름이 생각나요. 저는 재수생이서 시험을 진짜 잘 봐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근데 너무 부담스럽고 긴장되니까 일탈을 하고 싶더라고요. 성인이 되었으니까 뭐든 할 수 있잖아요. 사실 다른 친구들은 대학에 가서 다 놀고 있는데 저는 계속 공부하고 있으니 답답할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흡연을 시작했고, 조금 놀았어요. 근데 지금 생각하면 그러지 말고 더 집중 해야 했던 것 같아요. 좀 더 원하던 학교나 원하던 과에 갔으면 대학교를 그만두지 않았을 것 같아요. 안 맞는 과여서 그런지 학교 공부에 흥미도 없었고 더는 이런 쓸데없는 걸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나이 먹고 자기 계발로 공부하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저는 앞으로도 공부는 절대 더는 하고 싶지 않아요.
Q.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게 있나요?
A. 오늘을 열심히 사는 사람이라서 죽기 전까지는 잘 생각을 안 해요. 제 노후라거나 부모님이 아플 것, 부모님 부양을 다 생각하면 죽기 전까지는커녕 지금 당장 살기도 싫어지잖아요. 월급을 이거 벌어서 지금 살기도 힘든데 미래를 생각하면 너무 우울해져요. 제 최종목표는 오늘 하루를 잘 지냈다는 것에 만족하는 거예요. 운동도 갔다 왔고 식단조절도 잘했고 애인이랑 안 싸웠고 회사에서 좀 힘들었지만, 열심히 일했고 그런 소소한 행복을 떠올리며 만족하고 있어요. 사람들이 한번 사는 삶 ‘You Only Live Once.’ 하라고 하잖아요. 예전에는 돈을 아끼지 않고 원하는 물건을 지르고 그런 게 ‘욜로’인 줄 알았거든요. 근데 살다 보니까 지금 제가 하고 있는 게 더 욜로인 것 같아요. 하루하루에 만족하고 행복을 찾으면서 지내는 거요.
Q.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방법이 있나요?
A. 회사일은 퇴근하면 생각을 아예 안 하려고 해요. 친구들 만나서도 사실 회사 얘기를 할 수도 있잖아요. 근데 저는 온전히 쉴 수 있는 시간까지 그런 거로 스트레스받기 싫으니까 딱 끊고 절대 말을 안 해요. 어차피 말해봤자 푸념밖에 될 수 없는 것 같아요. 일 말고 개인적인 스트레스는, 스트레스를 받을수록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게 답인 것 같아요. 만약 연애나 가족 때문에 스트레스라면 내 상황과 감정에 집중해요. 예를 들면 ‘나는 이렇게 생각해서 이렇게 행동한 거야.’, ‘나는 이러이러해서 화난 거야.’하고 정리해 보는 거죠. 정리한 걸 바탕으로 상대방에게도 그렇게 말해주면 더 바로 풀리기도 해요. 단순히 싸우는 게 아니라,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으니까요. 저는 싸울 때도 열심히 싸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좋아하는 만큼 열심히 싸워야 관계가 오래가요. 때로는 왜 화났는지 이유를 듣고 나면 쉽게 풀려요. 표현하지 않고 담아두는 게 더 문제에요.
Q. 살면서 잘한 결정을 꼽는다면?
A. 예전에 만났던 애인 중 두 명이 데이트폭력 가해자라고 볼 수 있어요. 저는 제 의지로 벗어났어요. 다들 그럴 수 있는 게 아니고 쉬운 일은 아닌데, 저는 그럴 수 있었어요. 처음부터 그런 사람인 줄은 모르고 만났지만. 맞고 살 땐 사실 판단이 안 서고 자존감도 바닥을 쳐요. 근데 저는 ‘내가 이렇게 살 만큼 형편없는 사람이 아니다.’ 하고 계속 생각하고 꾸준히 기회를 봐서 빠져나올 수 있었어요. 안전이별 시기를 찾으려고 계속 기다렸는데요. 연인이 나한테만 계속 집착하고 관심을 가질 때도 있지만, 그들도 사람이니까 감정적으로 지쳐서 나한테 정이 떨어질 때가 있어요. 나한테만 관심 가질 때 헤어지려 하면 난리가 나니까, 그들이 바람을 피우거나 주변 사람들이나 다른 쪽에 관심을 쏟을 때가 좋은 타이밍이었어요. 저는 그런 일을 두 번이나 겪고도 건강한 정신을 갖고 잘 살고 있어요. 사실은 스트레스와 화병이 좀 심한가 싶어서 정신과 상담을 받아 보기도 했는데, 너무 정상 범위에 있고 약이 따로 필요 없다는 소견이 나왔어요. 그런 전문가 의견을 들으니까 자신감이 더 생겼어요.
Q. 서울에서 청년 여성으로 사는 건 어떤가요?
A. 보통 이런 키워드라면 고단함을 많이 말할 것 같아요. 저는 평생 서울에 살았지만, 애인이 울산 사람이라 왔다 갔다 하면서 생활하고 지방으로도 여행을 많이 다녀요. 그러다 보니 느끼는 게 조금 달라졌어요. 서울도 경쟁이 심하고 피곤하지만, 지방은 사람이 적은 대신 일자리도 많이 없어요. 사람들 시선이나 문화도 달라요. 특히 여성이라면 더. 지방에는 이십 대 후반이면 벌써 애가 둘이고 결혼이나 동거하는 사람도 많아요. 저는 회사를 그만둘 생각도 없고 남친도 없는 상태인데 지금 회사에서는 아무도 이것과 관련해서 압박하지 않지만, , 서울에 살지 않는 애인 은 알게 모르게 이상하단 시선을 받거든요. 여자 나이 서른이면 ‘다 됐다’라고 생각하니까요. 서울에서는 오히려 뭐든 시작할 수 있는 나이라고도 보잖아요. 저 아는 언니도 34살에 필라테스 시작해서 36살에 강사 생활 시작했고요. 제가 가죽공예 전문가반 다닌다고 하는 것도 제 주변에서는 지금 다 응원해주는데, 지방이면 별나다고들 했을 거예요. 서울은 몇 살의 어떤 여성이 어떤 머리 스타일을 해야 하고,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지가 조금 더 다양해요. 퀴어인 점도 그래요. 심지어 대도시인 부산에서도 서울에서보다는 시선을 많이 받고, 사람들이 이상하게 봐요. 다 들리게 ‘쟤네 레즌가봐.’하는 것도 들어봤어요. 아무래도 한국에서는 가장 빠르게 변하는 곳이 서울이니까요. 지방의 이런 스트레스가 서울의 사람 많고 교통 체증으로 받는 스트레스랑 비슷해요. 서울에 사는 게 고단하기는 하지만, 지방에 산다고 상황이 더 낫지도 않은 거죠. 청년 여성으로 살기에는 오히려 고통이 더해요..
Q. ‘~답지 않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 있나요?
A. 해본 적이 거의 없어요. 첫째다워야 한다는 생각도 별로 없고, 동생에게 내가 충분히 언니다운지도 생각을 잘 안 하고 그냥 친구처럼 대해요. 사무실 안에서의 인간관계도 그래요. 제 기준에서는 섞일 수 없는 사람들이에요. 일터에서도 일을 어느 정도 해야 말이 통하는데, 5년차가 되어서도 내가 성장한 것만큼 성장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그런 사람들이랑은 멀어지게 되고요. 저는 그런 게 너무 편해요. ‘셀프 아싸’라고 할 수 있죠. 남들과 섞이지 못한다거나 사회생활을 잘못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저는 굳이 사회생활 하면서 사적인 정보까지 공개하고 그럴 필요 없다는 걸 이제 아는 거죠.
밀코는 스스로 ‘아싸’라고 하지만 새로운 사람도 자주 만나고, 친구들에게도 먼저 연락해 저녁 약속을 잡는다. 비어 있는 주말에는 뭐라도 하러 나가고, 처음 만나는 사람과도 부드럽게 대화를 주도하고 분위기를 이끌어나가는 편이다. 그 말을 듣다가 아웃사이더라고 하기에는 너무 ‘인싸’가 아니냐고 묻자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하고 싶은 걸 찾을 때까지 일단 돈을 벌어보겠다는 밀코는 지금은 월급에 중독이 됐지만, 언젠가 본격적으로 가죽공예를 배워 나중에는 판매도 하며 살아보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취미를 뒷받침할 수 있는 건 역시 월급이어서 당분간 확실한 대안이 생기기 전까지는 지금처럼 일하고 운동하는 일과를 유지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