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클랜드에 있다고 뉴질랜드 구석구석 여행을 다니는 건 아니었다. 서울에 있다고 꼭 부산 여행을 자주 갈 수 있는 건 아니듯이 말이다. 지난번 갑자기 받은 휴가로 떠난 네이피어 여행 외에 뉴질랜드를 본격적으로 여행한 건 딱 한 번 더 있었는데, 엄마가 놀러 왔을 때였다. 나는 엄마에게 내 뉴질랜드 이민을 백 마디 말로 설득하는 것보다 한 번 눈으로 보여주는 게 더 확실한 효과가 있을 거라 믿었다.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 이 공기와 이 바다를 본다면 누구라도 여기 살고 싶어질 테니까, 엄마 딸이 모든 걸 뒤로 하더라도 이 평화롭고 여유로운 땅에서 살겠다는 이유를 조금은 알아줄 것 같았다. 그런 마음으로 엄마를 초대했고, 여행을 좋아하는 엄마는 단번에 휴가를 내고 비행기표를 예매했다.
엄마와의 열흘
부모님과 여행하기 전에는 엄청난 각오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고, 나도 많이 걱정했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나에게 이 여행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엄마와 두고두고 떠올리며 얘기할 수 있는 추억이 되었다. 물론 이 성공적인 여행은 앞서 겪은 시행착오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친구들이 몇 번 놀러 온 적이 있었는데, 나 또한 마음이 앞서 초대해놓고는 어떻게 해야 즐거울지 몰라 매번 우왕좌왕했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일정을 짜고 철저하게 계획했다. 엄마는 생각보다 모든 일정에 잘 따라와 줬고, ’백인들이 진짜 영어로 말하네!’라며 생각지도 못한 포인트에서 신기해했다. ‘옛날엔 한국 하늘도 이렇게 새파랬는데. 내가 어릴 때 보던 하늘 같다!’ 하며 역시 의외의 포인트에서 즐거워하기도 했다.
여행 일정은 대략 이랬다. 첫날은 엄마가 오클랜드에 도착해 공항으로 마중을 나갔다. 내가 사는 집에 짐을 풀고 쉬다가 산책 겸 잠깐 나가서 커피만 마시고 왔다. 약 열세 시간의 비행으로 지쳐있었지만 뉴질랜드에 왔으니 플랫 화이트를 맛봐야 했다.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들러 키위들처럼 야외좌석에도 앉아 보았다.
둘째 날에는 오클랜드 내 대표적인 랜드마크 중 엄마가 좋아할 곳들만 엄선해서 다녀왔다. 엄마는 도시와 쇼핑을 좋아하지 않고, 분명한 자연 선호파다. 콘월 파크에 가서 ‘뉴질랜드’ 하면 떠오르는 광경인 푸른 들판과 양을 보며 산에 올랐고, 원 트리 힐까지 올라가 오클랜드 전망을 내려다보았다. 항구가 주는 이국적인 느낌이 일품인 데본포트에도 갔다. 데본포트에 있는 마운트 빅토리아도 등산했다. 페리를 타고 오클랜드 시티로 넘어가 요트가 빽빽하게 정박된 비아덕트 하버의 풍경도 구경하고 돌아왔다. 음식은 주로 마트에서 장을 봐서 직접 요리해 먹었다. 뉴질랜드의 대표 음식인 피시 앤 칩스나 에그 베네딕트는 모두 척 봐도 엄마 취향은 아니었고, 주변 한식당에서 외식을 해봤지만 아무래도 한국보다 터무니없이 비싼 데다가 맛도 없어서 엄마는 직접 요리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엄마는 의외로 마트를 재미있어했다. 살림 경력이 삼십 년인 엄마는 한국 마트의 제품과 가격을 다 꿰고 있어서, 여기는 어떤 게 얼마나 더 싸고 얼마나 더 신선한지 발견해내며 연신 감탄했다.
다음 날부터 2박 3일은 뉴질랜드 북섬 중에서 로토루아 일대를 여행사 투어로 여행했다. 엄마는 면적이 싱가포르 나라 전체만 하다는 넓디넓은 타우포 호수를 아주 좋아했고, ‘하이타이를 풀어놓은 것 같다’며 푸른 빛의 물이 세차게 쏟아져 내리던 후카 폭포와 감동의 인증샷을 찍었다. 로토루아에서 봤던 마오리 공연도 재미있었고 폴리네시안 스파에서의 온천도 즐거웠다. 알파카와 양이 있는 야외 목장에도 갔었다. 로토루아는 가장 뉴질랜드다울 것 같아서 선정한 여행지였는데, 엄마의 반응도 뿌듯했지만 나도 처음 가본 곳이라 좋았다.
나는 오히려 여행사에서 주도하는 여행을 처음 해봤는데, 운전도 직접 하지 않고 식당을 찾지 않아도 되니까 너무 편해서 의외로 나는 패키지여행 체질이라는 걸 알았다. 일정을 조율하거나 예약을 점검하지 않고 오로지 엄마와의 대화에만 집중할 수 있었고 긴장하지 않으니까 새로운 경험에만 충실할 수도 있어서 즐거웠다. 로토루아 여행을 마치고 또 하루는 오클랜드에 와서 조금 쉬다가, 이번에는 다시 짐을 새로 챙겨서 비행기를 타고 남섬의 퀸스타운으로 갔다. 퀸스타운에서 3박 4일의 여행을 마치고 오클랜드에서 하루 쉰 다음 한국으로 다시 출발하는, 거의 총 열흘간의 여행이었다.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느슨한 일정으로 다니기에 적절한 일정이었다.
말로는 다할 수 없는
퀸스타운
퀸스타운은 세계에서 손꼽히게 아름다운 도시로 알려져 있다. 엄마가 뉴질랜드까지 비행기를 타고 왔는데 남섬으로 또 이동하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다녀온 사람마다 ‘거기는 꼭 가봐야 한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극찬하는 탓에 일정에 넣지 않을 수 없었다. 아침부터 분주하게 공항까지 이동하면서도 반신반의했지만, 비행기가 점점 퀸스타운에 가까워지자 내리기 전부터 우리는 그 극찬의 의미를 이해했다.
퀸스타운 근처에서는 비행기가 굉장히 낮게 날며 창밖으로 겹겹이 쌓인 산맥을 보여준다. 산마다 색깔도 다르고 나무도 다르고 어떤 산은 손에 잡힐 만큼 가까워 보이는데, 그 산들이 모두 그림 같다. 지구인들이 파괴하지 못하게 자연 속에 깊이 숨겨둔, 문명과는 떨어진 판타지 영화 속 세상 같기도 하다. 비행기에서 내려서도 우리는 또 한 번 감탄하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름답다는 시내로는 아직 들어가지도 못했는데 벌써 아름다웠다. 오클랜드보다 한결 쌀쌀한 바람에 가을 냄새가 물씬 느껴졌고, 공항에만 내렸을 뿐인데 온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정말 동화 속 풍경이 따로 없었다. 거기서 택시를 타고 퀸스타운의 시내로 들어가 와카티푸 호수 근처까지 걸어가면, 그야말로 ‘외국이구나!’ 싶은 장면이 펼쳐진다. 녹지 않는 만년설이 걸린 높은 산들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에, 호숫가는 축제라도 열린 듯 분주하면서도 즐거운 분위기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휴양지답게 사람들의 입가에 웃음이 묻어 있다.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자니 내내 그렇게 보고만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비행기로 이동해 피곤할 것까지 생각해서 3박 4일로 잡은 건데, 역시나 체력이 바닥인 모녀답게 첫날은 도착해서 저녁을 먹자마자 곧장 들어가 따끈따끈한 전기담요 위에서 내내 쉬었고, 둘째 날 비로소 컨디션이 회복되어 바깥에 나갈 수 있었다. 시작은 역시 퀸스타운의 명물인 수제 버거집에 들렀는데, 한 시간 이상 줄을 서야 한다는 후기도 봤지만 아침 일찍 가서인지 삼십 분 안에 버거를 손에 들 수 있었다. 나는 한 입 먹자마자 감탄하며 역시 줄 설 만한 맛집이라고 생각했는데 엄마는 맛을 보고도 생각보다 시큰둥했다. 단지 그 햄버거를 먹기 위해 모두 매장 바깥까지 길게 줄을 선다는 걸 재미있어했다. 우리는 그 햄버거를 가지고 역시 엄마의 취향에 맞춰 등산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와서 등산을 하게 될 줄은 몰라서 급하게 검색한 퀸스타운 힐로 향했는데, 이곳은 아직까지도 엄마의 ‘인생 여행지’로 꼽힌다. 우리는 천천히 걸어 올라가 정상까지 한 시간 반에서 두시간 정도 걸렸는데, 정상에 오르니 물론 히말라야산맥에 올라가 본 적은 없지만 정말 그런 대단한 산에라도 오른 듯한 광경이 펼쳐졌다. 나는 평소에 자연경관에 잘 감동하는 타입은 아닌데 이곳에서는 줄곧 셔터를 눌러 대느라 카메라를 내려놓을 새가 없었다.
다음 날은 밀퍼드 사운드에 갔다. 거리가 멀어 운전은 무리였기에 현지 여행사에 밀퍼드 사운드만 당일 투어를 신청했다. 전용 버스가 숙소로 픽업을 왔다. 목적지까지는 다섯시간 이상 걸렸지만 중간에 내려서 구경하고 사진 찍는 시간도 있었고, 가는 내내 창밖에 장관이 펼쳐져서 지루하지 않았다. 뉴질랜드 특유의 푸른 목장과 양 떼가 자주 등장하는 건 물론, 밀퍼드 사운드는 빙하가 만든 절벽에 둘러싸인 호수인데 그 호수가 있는 깊은 산속까지 가는 길에 만년설이나 깎아지른 절벽과 폭포를 질리도록 볼 수 있다. 우리는 그 호수에서 크루즈를 타고 식사를 했다. 운이 좋으면 돌고래도 볼 수 있다고 들었는데, 돌고래는 못 봤지만 바위에 누워있는 수달은 봤다. 갑판에 나가 폭포를 더 가까이서 보려다가 물을 맞아 옷이 다 젖었는데도 즐거웠다. 모두 나에게도 잊지 못할 시간이었다.
여행이
항상 즐거울 순 없지
물론 세상만사가 그렇듯 이 여행에도 마음 아프고 후회되는 순간들은 있었다. 퀸스타운의 한 마트 계산대에서도 그랬다. 내가 물건의 바코드를 찍느라 정신없는 사이에 엄마가 점원에게 말을 걸었던 것 같은데, 엄마는 완전한 영어 문장을 만들지 않고 단어로만 얘기했고, 한국처럼 서비스 정신이 투철하지 않은 점원은 당연하게도 짜증이 가득한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다른 일을 하며 성의 없게 응대하고 있었다. 나는 순간 엄마가 그런 취급을 받은 것에 화가 났고, 왠지 그가 표정으로 ‘무례한 아시안들이군.’ 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엄마에게 짜증을 담아 말했다.
엄마, 너무 무례하잖아. 누가 엄마한테 단어로만 말하면 기분 좋겠어?
엄마는 한국에서도 그랬다. 바빠 보이는 식당에서도 뛰어다니고 있는 점원을 망설임 없이 불러세웠고, 한 번에 정리해서 얘기하면 될 것을 두서없이 생각나는 대로 주문했고, 필요한 것을 요청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 오히려 요청하면 받을 수 있는 걸 요청하지 않고 넘어가는 걸 손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엄마의 모습이 싫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동안 쌓였던 마음속 불만까지 그 말에 담아버렸다. 여전히 그날을 후회하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렇다고 엄마가 안 되는 서비스를 억지를 써가며 요청하는 사람은 아닌데, 점원에게 무례하거나 반말하는 사람도 아닌데 나는 왜 무조건 엄마가 잘못했을 거로 생각했던 건지 모르겠다. 엄마는 점원의 태도에 불쾌해하지 않았고, 그냥 말이 통한다는 점을 재미있어했는데, 내가 뭐라고 영어 몇 마디 더 길게 말할 수 있다는 이유로 엄마를 타박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을까?
나중에 알았지만, 엄마는 여행을 가기 전에는 꼭 그 나라 회화를 공부하는 사람이다. 오히려 엄마가 영어로 말해보고 싶었던 걸 알아채고 응원해줬더라면 어땠을까 싶었다. 그러나 반성과 결심은 잠깐이고, 비슷한 순간은 자꾸만 찾아왔다. 나는 엄마가 아메리카노를 두 잔 시키지 않고 뜨거운 물을 더 달라고 해서 한 잔을 굳이 두 개로 나누는 게 싫었다. 조용한 식당에서 큰 소리로 웃고 떠드는 게 싫었고, 공항 같은 데서 의자를 발견하면 다른 사람이 앉기 전에 빠르게 달려가 굳이 자리를 선점하는 게 싫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나중에 후회할 걸 알면서도 못마땅한 표정을 숨기지 않는 쪽을 택했다.
사실은 엄마도 나와 함께 여행하기 위해 참고 있었던 게 많았을 것이다. 우리는 퀸스타운에 갈 때 비행기를 놓쳤는데, 엄마는 나를 비난하지 않고 계속 괜찮다고 하며 싫은 기색 없이 카페에서 다음 비행기까지 4시간을 기다렸다. 그날 아침에 늦은 건 나 때문이었다. 내가 국내선이라서 괜찮다고 몇 번을 말했는데도 엄마는 아침부터 지나치게 서둘렀고, 나는 늘 이런 식으로 모든 일에 긴장하고 재촉하면서 만반의 준비를 하려는 엄마가 못마땅해서 보란 듯이 일부러 더 늑장을 부린 거였는데, 중간에 차가 막혀서 결국 비행기를 정말 놓쳐버린 것이다. 이건 잔소리를 들어 마땅한 상황이고, 나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평소에 좀 서두르라고 그렇게 말하지 않았느냐’, ‘너는 도대체 언제쯤 정신을 차릴 거냐’는 엄마의 폭풍 잔소리를 잠자코 기다렸다. 그런데 엄마가 평소답지 않게 몇 마디 하려다 도로 삼키는 게 아닌가? 그때 처음으로 엄마도 나와 함께 즐거운 여행을 하려고 많은 것을 참고 있을 거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고양이가 있는 집에, 엄마의 청결 기준에 미흡할 게 분명한 거실과 주방, 온 바닥에 카펫이 깔려 있어 불편한 침실, 익숙하지 않은 건식 화장실과 좁은 욕실, 심지어 어딜 가나 온몸에 묻는 고양이 털까지! 게다가 뉴질랜드에서 지내는 동안은 길도 모르고 말도 안 통해서 뭐든지 매사에 나한테 먼저 부탁해야 하는 게 불편하고 갑갑한 날이었을 지도 모른다.
엄마만의 방식
나는 열다섯 살부터 커밍아웃을 수도 없이 했지만, 엄마는 한 번도 그걸 받아주지 않았다. 그 순간에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후에는 그런 일을 까맣게 잊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성 결혼 이야기를 하는 방식으로 아직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걸 표현했다. 몇 번이고 다시 얘기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자 때로는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아도 돼.’ 하거나, 어느 날 갑자기 ‘근데 에이젠더라는 것도 있더라?’ 하면서 엄마의 시간이 나름대로 흐르고 있음을 표현하기도 했다. 사실 엄마가 내 이민을 얼마나 이해했는지 나는 모른다. 엄마는 엄마만의 방식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래서 얼마나 알아듣고 있는지 몰라도 내가 파트너 비자를 가지고 있고, 애인과 함께 이민하고 있다는 걸 기회가 닿을 때마다 최대한 거짓 없이 솔직하게 설명한다.
다만 언제부턴가 ‘엄마 나는 동성애자야.’라는 방식으로 말하지는 않게 되었다. 지금도 동성 결혼을 했다고 말한 적은 없지만 나는 여전히 다양한 방식으로 엄마에게 열심히 말하고 있고, 엄마도 이제 내가 일반적인 가부장제 문법을 따라 가족을 꾸릴 생각이 없고, 쭉 함께 생활하던 그 친구와 뉴질랜드에서 함께 살기를 원한다는 것까지는 전달받은 것 같다. 사실 나는 누군가를 설득할 에너지가 있는 사람은 아니다. 친절하고 알기 쉽게 반복해서 설명하는 게 힘들고,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평생 그렇게 살다가 죽으라고 저주하고 돌아설 뿐이다. 그러나 엄마는 내가 원가족 중에서 가장 가깝게 느끼고 의지하는 사람이다. 좋아하는 친구에게 조금 더 설명해주고, 페미니스트가 될 길이 요원해 보여도 한 번 더 참아주는 것처럼 엄마에게는 특별히 조금 더 나를 이해할 기회를 주고 싶다.
여행을 마치고 뉴질랜드를 떠나던 날, 엄마는 공항 탑승구 앞에서 작별의 포옹을 하다 눈물을 쏟았다. 여행 내내 ‘나는 여기도 좋지만, 외롭고 무서울 것 같아.’, ‘이제 한국 사회도 많이 좋아지고 있는데···.’ 했던 걸 보면, 역시 외국 땅에 딸을 두고 가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리라. 엄마는 당연히 내 이민과 내 정체성을 연결 지었을 거다. 그런데 그동안 엄마의 상상 속에 있는 내 모습은, 성소수자의 비극적인 운명을 피하지 못해 몰래 숨어 살다가, 결국 한국을 떠나서 입에 맞지도 않는 음식을 먹으며 고생만 하는 안쓰러운 모습일 것 같았다. 이제 엄마가 나를 좀 더 이해하고 싶어질 때, 내가 살고자 하는 삶이 어떤 장면인지 머릿속에 그려볼 때, 우리가 있던 퀸스타운과 함께 떠올려주면 좋겠다. 나는 자긍심을 가진 성소수자고, 힘차게 내가 원하는 삶을 찾아 나선 거니까, 그렇게 반짝반짝 빛나고 찬란한 풍경이 더 잘 어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