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우리 이민갈까? 14. 운전으로 주체성을 회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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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우리 이민갈까? 14. 운전으로 주체성을 회복하다

유의미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보금자리를 찾을 때 여러 조건 중 하필 ‘위치’를 포기해서 생긴 어려움이 있다. 시티에서는 숙소에서 몇 걸음 가지 않아도 카페가 있었고, 주위를 둘러보면 언제나 식당이 있었다. 이사 온 동네는 그렇지 않았다. 작은 식당이 몇 개 있었지만, 카페라도 가려면 삼십 분쯤 걸어야 했고, 그 외엔 모두 그냥 길이고 집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 ‘공터’라는 단어가 늘 낯설고 궁금했다. 서울의 모든 곳은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고 주변에서 빈 곳을 볼 수 없었다. 뉴질랜드에는 아무것도 없는 빈 땅이 꽤 보인다. 책에 나왔던 공터란 이런 곳이었을까 생각한다. 여유로운 느낌도 들지만, 오히려 휑하고 쓸쓸해서 걸어 다니기 무서운 길도 많다.

운전을 하기로 했다

여기선 도보로 멀리 나가는 게 쉽지 않다. 뉴질랜드의 버스는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전광판도 없는 작은 정류장에는 지도 앱에 나온 시간이 지났는데도 버스가 오지 않는다. 한번 놓치면 그 버스는 이제 당분간 오지 않아 다른 정류장에서 타야 하는 일도 있다. 그 생활을 보름도 참지 못하고 중고차를 샀다. 내 인내심은 거기까지였다. 차로 십 분인 거리를 가기 위해 버스를 한 시간 기다리는 일에 지쳤고, 이미 질려버린 식당 다섯 개 말고 다른 메뉴의 식사가 간절했다. 우산이 뒤집힐 정도로 세차게 퍼붓는 비바람 속을 걸으며 온몸이 다 젖는 게 지겨웠다. 게다가 주말에는 여덟 시는 넘어야 첫차가 있는데, 바리스타로 일하기 위해서는 첫차보다 일찍 출근해야 했다. 차가 없이는 시간 맞춰 면접도 보러 다니기 어려웠다.

일러스트 이민

처음 운전하던 날

‘면허가 있는데 운전을 못할 게 뭐야.’ 생각했지만, 한국에서도 혼자 운전을 해본 적 없었다. 오기 전에 주행 연수를 서너 번 받았고, 국제 면허증을 발급받아 챙겨 오기는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진짜로 운전을 하게 될 일은 없을 거라 믿었다. 한국에서도 못하던 걸 외국에서 할 리가 없고, 뉴질랜드는 심지어 운전석 위치도 한국과 반대다. 그런 나는 차를 사놓고도 차를 집으로 가져가지 못했다. 중고차 매장에 가서 모든 절차를 마치고 키를 받았는데, 차들이 바람을 가르며 쌩쌩 달려오는 도로를 향해 액셀을 밟을 자신이 없었다. 결국 나를 지켜보던 딜러가 대신 운전해 집 앞까지 데려다줬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걸어서 내 차를 앞지를 만큼 느린 속도로 조심스럽게 집 앞에서만 운전했다. 그러다 용기를 내어 골목을 벗어나 큰길로 나갔다. 물론 그러자마자 혼비백산이었다. 운전이란 것은 잠깐 멈추고 생각할 시간이 없고 일단은 계속 앞으로 가야 하는데, 당황할수록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서 판단은 더 느려졌다. 뭘 잘못하는지도 모른 채 뭔가를 연거푸 잘못했고, 주변에서는 나를 향해 경적을 울렸다. 그날은 차선을 바꾸지 못해서 한없이 앞으로만 갔다. 

누구에게나 있는 첫날이고, 초보 운전자의 흔한 실수다. 작은 문제가 있다면 여기가 뉴질랜드라는 것뿐이다. 한국이었어도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가는 게 무서웠을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뉴질랜드여서 더 무서웠던 건 확실하다. 여기는 말도 잘 안 통하고 지도를 봐도 아는 곳보다 모르는 곳이 더 많다. 한없이 직진하다가 원하지도 않았던 고속도로가 눈 앞에 펼쳐지는 순간 이 길을 벗어나면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에 브레이크를 밟았다. 아직 유턴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진짜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고속도로에서는 갑자기 멈추면 안 된다. 고속도로에서 하면 안 되는 수많은 잘못이 있지만, 갑자기 멈추는 건 가장 큰 잘못이다. 나는 이내 그 사실을 떠올렸고, 사이드미러도 잘 볼 줄 모르면서 갓길로 차를 옮겼다. 그날 사고가 나지 않았던 걸 정말 신께 감사드린다. 그 갓길에서 잠깐 차를 멈추고, 쥐가 날 것 같은 오른발에 잠시 자유를 주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호흡을 가다듬고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나갈지 가만히 생각했다. 그 순간에는 한국에 있는 누구에게 전화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들 중 누가 단숨에 뉴질랜드로 날아와 나 대신 운전대를 잡아주지 않는 한,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차피 이건 내가 해결할 일이다. 힘을 내어 내비게이션을 켜고 도로에 진입했다. 다행히 고속도로를 빠져나간다고 해서 아주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건 아니었고, 이십 분쯤 운전하면 조금 돌아서 집에 갈 수 있어 보였다. 숨을 돌리려던 차에 설상가상으로 비가 쏟아졌다. 와이퍼를 아무리 강하게 작동시켜도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거센 비였다. 뉴질랜드는 늘 이렇게 하늘이 고장 난 것처럼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나는 드라마 주인공처럼 소리 내 나 자신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정신 똑바로 차려. 울면 하드 렌즈가 빠져. 지금 앞이 안 보이면 너 진짜 죽을지도 몰라.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일러스트 이민

그 후로도 몇 번을 갓길에 멈춰서 터질 듯한 심장을 달랬고, 지구 반대편의 아빠에게도 몇 번이나 전화했다. 이십 년이나 된 중고차를 산 탓에 차는 수시로 고장 났다. 계기판에 낯선 경고등이 표시될 때도, 시동이 갑자기 꺼져서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른 날도 울먹이며 전화를 걸었다. 처음으로 사고를 낸 날도 그랬다. 그러다 차차 그 방법이 비효율적이라는 걸 깨달았다. 내 차에 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고 모든 순간에 의사결정을 해야 할 사람도 나다. 어떤 기름을 주유할지, 어떤 부품은 수리하고 어떤 부품은 그냥 둘지, 보험처리를 어떻게 할지 결정하고 그에 따라 돈을 지급해야할 사람도 결국은 나다. 처음에 말썽이 많은 차를 샀던 덕에 하나하나 검색하고 해결하다 보니 지금은 본의 아니게 모든 경고등을 이해했고, 이제는 뭐가 고장 나면 어디에 전화해야 하는지도 알고, 간단한 문제는 보닛을 직접 열어 해결할 수도 있다. 일 년 만의 일이다. 사실 유튜브에 검색만 해도 방법이 다 나오는데, 왠지 직접 열거나 수리를 시도하면 큰일 날 거라 생각했었다.

모두 가치 있는 고생이었다. 운전한다는 건 능력을 확장하는 일이다. 나는 이제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느낀다. 더는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운전해서 스스로 물을 사 올 수도 있고, 시티에 가서 놀 수도 있고, 원한다면 이사도 갈 수 있다. 일을 구할 수 있는 범위도 넓어져 더 자신 있게 면접을 볼 수도 있었다. 55세에 운전을 시작한 엄마는 누구에게도 비위를 맞추며 애원하지 않고 직접 장을 보고 병원에 갈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나도 고양이가 아플 때 내 손으로 직접 운전해서 병원에 갈 수 있다는 점이 큰 위안이 된다.

해방감

일러스트 이민

나에게 운전은 특별한 의미가 하나 더 있다. 나는 딜러에게 차를 샀는데, 그 사건은 훗날 내 뉴질랜드 생활의 고통의 주원인이 되었다. 나는 집을 옮기기 전까지 내내 조금은 불안하게 지냈다. 그 딜러는 직접 좋은 차를 골라주겠다며 디자인만 예쁘고 잔고장이 많은 차를 추천했고, 그걸로도 모자라 개인적으로 접근했다. 처음엔 운전을 가르쳐주겠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계속 전화와 문자를 하며 여자친구가 되어 달라고 졸랐다. 나는 연락을 차단하지 못하고 적당히 거절하며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모두 내가 그 매장에서 차를 샀기 때문이었다. 

차를 살 때 명의를 이전하면서 내 개인정보를 적었고, 차를 배달해줬으니 그는 내 집 주소 뿐 아니라 위치까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뉴질랜드의 집은 잠금장치도 허술했다. 무엇보다도 혹시라도 차에 문제가 생길 경우 그와 다시 소통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차를 살 때 일정 기간 저렴하게 수리해주는 조건이 있었고, 나는 차에 관해 전혀 모르므로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게다가 그곳은 내가 운전하지 않고 걸어서 갈 수 있는 유일한 자동차 관련 매장이었다. 운전을 잘할 수 있게 되자 마침내 그의 전화번호를 차단할 수 있었다. 수리 혜택을 못 받더라도 차를 다른 데서 수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안심되었고, 여러모로 비용은 좀 들겠지만 여차하면 차로 이사를 하면 될 것 같아서였다. 여성이기 때문에 여기까지 와서도 여전히 이런 이유로 금전적 손해를 봐야 한다는 점은 절망적이지만, 그 번호를 차단하던 순간만큼은 정말 후련했다.

나는 이제 원하는 목적지에 어디든 도착할 수 있게 되었고, 연습 면허를 가진 애인의 운전을 감독한다. (뉴질랜드는 연습 면허와 제한 면허를 거쳐야 일반 면허가 나오고, 연습 면허 때는 단독으로 운전할 수 없다. 감독하에 일정 기간을 운전하고 시험을 통과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한국에서 의존적인 사람이었던 나에게는 이 모든 게 꿈만 같고 드라마틱한 변화다. 애인은 비자 문제와 이런저런 상황이 겹쳐 예상보다 훨씬 늦게 뉴질랜드에 도착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애인이 도착하던 날, 나는 운전을 해서 공항으로 그를 데리러 갔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지 못해 혼자 울고 있던 내가 공항에 차를 끌고 가고 있다니. 감격의 눈물이 차올랐다. 사람은 이렇게 계속 성장하고, 이미 다 컸어도 더 성장한다! 어릴 땐 40살에 죽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무궁무진하게 성장할 생각에 30대도 40대도 그 이후의 삶도 조금씩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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