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 ‘탈조선’이 화두가 된 지도 꽤 되었고, 몇 년 전 20대 이상을 대상으로 한 취업 포털의 조사 결과에서는 10명 중 7명이 기회가 되면 이민을 가고 싶다고 응답했다. 특히 여성의 경우는 이민 의향이 더 높게 나왔다. 그런데 나는 한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스물 다섯 살까지 외국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 없었고, 대학생 때도 교환학생 같은 해외 교류 프로그램에 관심을 둔 적이 없었다. 오히려 절대로 외국에서 살지 말고 한국에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우습지만 영어 때문이었다.

영어 망국병

나는 외국어 고등학교의 영어과를 졸업했다. 중학교 때까지는 영어를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고등학교에 들어가 상대적으로 실력이 좋은 친구들 사이에 둘러싸이자 쉽게 자신감을 잃었다. 미국에 살며 영어 때문에 고생했다는 교수가 저자인 책 <영어 계급사회>에서는, 한국 사회의 광기 어린 영어 집착을 ‘영어 망국병’이라고 부르며 영어가 계급 재생산의 수단이 된 현실을 지적한다. 대입과 취업에 영어가 결정적인 요소가 된 시대에 조기유학, 영어유치원 등으로 어릴 때부터 교육받은 상류 계급의 실력을 다른 계급에서 따라가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 책은 2012년에 발행됐고 지금은 영어의 자리에 들어갈 대외활동, 자격증, 학점 등 다른 요인들도 추가로 늘어났지만, 이는 영어가 중요하지 않아져서가 아니라 이미 기본이 되어서다. 

나는 당시 책을 읽으며 영어 실력이 계급의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 강하게 공감했는데, 고등학교 시절의 내가 드러내놓고 영어의 어려움을 말할 수 없었던 이유였기 때문이다. 영어 실력을 더 기를 수 없는 배경에서 자란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말한다 해도 친구들에게 이해받을 수도 없었다. 오히려 수학은 다들 힘들어하고 어려운 과목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어서 서로 한탄도 하고 위로도 하는데, 영어에 관해서는 절망하는 내 주변에는 나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 침묵을 지키는 친구들만 있었다. 그 친구들은 내가 영어 공부를 어떻게 하는지 물어도 잘 대답해주지 못했다. 어릴 때 영어권 나라에서 지낸 적이 있어서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점수가 잘 나오는 친구들이 내 마음을 이해할 턱이 없었다.

나에게 영어는 오기였다. 

영어 성적을 올리기 위해 학원도 다니고 과외도 받았고 자습 시간의 큰 비중을 들여 영어를 공부했다. 그러나 상대평가인 교내 성적은 누군가 나 대신 떨어지지 않는한 좀처럼 오르지 않았다. 하루는 24시간이고 잠을 더 줄일 순 없으니 공부할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영어를 잘하던 친구들은 영어를 공부할 시간에 다른 과목에 투자할 수 있어서 성적이 전반적으로 쉽게 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반면 나는 이미 시간표에 공식적으로 영어 시수가 많은데도 보충 수업에서 매번 영어를 선택했고, 그런데도 성적이 오르지 않아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것만 깨달았다. 

학교에서는 학생들 수준에 맞춰 일부 수업은 교과서를 넘어선 내용으로 진행했다. 교과서 대신 한국어가 하나도 없는 외국책으로 진행되는 수업도 있었고, 아직 잘 읽지도 못하는데 계속 에세이를 써내야 하는 수업도 있었다. 무엇도 정해진 시간 내에 소화하기 벅찼던 나는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에서 때때로 멍하니 있었고, 일어나 들은 내용을 말해 보라는 교사의 말에 답하지 못하며 바보가 된 기분을 느꼈다. 영어로 말해야 했기에 수업에서 나는 친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화장실을 가겠다는 말도 아프다는 말도 숙제를 미뤄달라는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영어를 못하는 것보다 중요했던 건 나 같은 학생이 많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나뿐 아니라 모두 영어를 잘 못했더라면 다같이 그 어려움을 나누며 웃고 지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속해있던 곳은 그렇지 않았기에 영어는 내 자존심을 자꾸 건드렸다. 나는 자존심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거꾸로 영어 포기자가 되었고, 내 삶에 영어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영어 시간에 말도 없이 수업을 이탈하거나, 독해시험 전날에 책을 한 번도 보지 않고 시험을 봐서 20점을 맞는 것과 같은 행동으로 그런 생각을 드러냈다. 그런 행동은 내 자신감을 점점 더 떨어뜨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독해’ 시험인데 시간 안에 다 읽을 수 없는 양의 지문이 나왔고, 이미 지문의 내용을 아는 상태로 거의 읽지 않고 빠르게 풀어야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문제 구성이었다. 애초에 그런 시험이 나의 자신감을 훼손하게 내버려 둘 필요가 없었지만, 9개의 등급으로 나누어져 있는 성적표에서 9등급을 받으면서도 계속 자신감을 느끼고 사는 건 쉽지 않았다.

영어 졸림병

고등학교에서 일 년쯤 보낸 뒤부터 나는 영어만 들으면 거기가 어디든 잠에 빠져드는 스트레스 반응까지 생겼다. 심지어 그 중요한 수능 영어 시간에도 듣기 문제를 풀다가 꾸벅 졸 정도였다. 미리 합격을 어느 정도 확보할 방법인 수시를 하나도 쓰지 않았고, 정시인 수능 시험에 사활을 거는 입시전략을 택했는데도 말이다. 그 습관은 여전히 몸에 조금은 남아있는지 얼마 전 영어를 쓰는 친구와 대화를 하는 도중에도 잠이 쏟아지는 걸 발견했다. 내 고등학교 시절은 추억은커녕 졸렸던 기억만 가득하다. 시간표에 가득 찬 영어 시간이 싫어서 많이 울었고 계속 졸렸다. 눈앞에 벽밖에 보이지 않는 칸막이 자습실에서 생을 보냈고, 체벌이 금지되기 전이라 졸려서 엎드릴 때마다 어깨와 등허리에 따끔한 매가 날아왔다. 그 자습실이 정말 싫어서 몇 번이나 무단으로 이탈했고, 문제가 되어 경고도 여러 번 받았다. 

나는 명백히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이었고,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고 읽어도 모르는 영어가 주변에 너무 가득했기에 그 모든게 영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다시는 영어를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리고 동시에 곧 죽어도 한국에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고등학교 입학 전의 꿈이 외교관이었고, 세 살부터 알파벳을 떼서 부모님의 자랑이었고, 해외 펜팔을 하며 언젠가 외국에 나가 친구를 직접 사귀고 싶다고 생각하던 건 모두 잊어버렸다.

이게 뭐라고

지금 생각하면 이게 뭐라고 그렇게 두렵고 어려웠는지 모르겠다. 한국이었더라면 마트에 가서 한마디도 안 하고 집에 돌아올 수 있지만, 이곳에서는 잠깐 장을 보는 그 짧은 시간에도 ‘잠깐 비켜주실래요?’, ‘먼저 가시겠어요?’, ‘그 카트 제가 쓰게 주실래요?’ 하는 사람이 많다. 지금의 나는 그때마다 영어를 듣고 말하며 잘 지낸다. 작년에 카페에서 일하는 동안에는 조금 더 많은 영어를 썼다. ‘커피 나왔습니다.’, ‘제가 한번 알아볼게요.’, ‘어떤 거로 드릴까요?’ 등의 영어를 반복해서 말했고, 때로는 처음 보는 사람과 처음 하는 대화도 많았다. 몇 달간은 잘 알아듣지 못해서 어려움도 있었지만 그런 상황도 결국 어떻게든 다 해결이 되었다. 

우유를 말하는 ‘밀크’가 뉴질랜드식 발음으로 하면 ‘모크’처럼 들려서 내가 못 알아듣자 손님이 우유를 가리키는 방식으로 소통한 적이 있다. 곡물이 들어간 갈색 빵을 달라는데 잘 몰라서 그냥 흰 빵을 구워서 서빙했지만, 손님이 괜찮다며 그냥 먹고 나서 직접 알려주기도 했다. 내가 샌드위치를 데워줄까 물어서 손님이 대답을 했는데, 그 답이 ‘예스’도 아니고 ‘노’도 아니라서 긍정인지 부정인지 몰라 고민에 빠졌던 적도 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엔 집에 가는 길에 사전을 찾아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일 년쯤 하고 나니까 대체로 카페라는 특수한 상황 안에서의 대화라면 무슨 말이든 주고받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게 되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빠른 영어 실력 향상은 처음이었다.

별 게 아닌 것 같지만 영어는 나에게 두려움의 극복이었다. 처음엔 영어를 못해서 일을 구하지 못할까 봐 울었고, 채용된 이후에도 손님들의 말을 못 알아들을 것 같아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영어를 보면 읽을 생각을 하지 않고 도망치는 사람이었다. 해석해보려는 시도도 하기 전에 토할 것 같은 기분에 뇌와 귀가 꺼져버리는 느낌이었다. 

물론 나의 영어 알레르기는 지금도 완전히 나아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도망치거나 잠들지 않고 대화할 정도로는 극복이 되었다. 예전 친구들을 만나면 ‘그러게, 영어 그렇게 싫다고 하던 네가 영어권에 가서 살 줄은 몰랐네.’하는 말을 듣는다. 사실 우스울 만큼 간단하지만 내 극복 방법은 영어를 계속 틀어 놓는 거였다. 누구나 말하는 정석 같은 방법이지만, 나는 영어가 들리면 잠들었기 때문에 마음껏 잠들어서는 안 되는 고등학교 시절에는 그 방법을 사용하지 못했다. 영어를 하루에 대여섯 시간 계속 틀어놓자 정말 소문대로 귀가 조금씩 ‘열렸’고, 어느 정도 알아들으니까 말은 아직 그만큼 못해도 상황이 돌아가는 걸 알 수 있어서 조금 덜 두려워졌다. 나는 기타를 배운 뒤에 음악에서 기타 소리를 구분할 수 있게 됐는데, 특정 악기 소리를 인식하면 찾아 들을 수 있는 것처럼 정말 귀도 적응이라는 걸 하는지도 모른다.

두려움 말고 자신감

그동안 외국에 나가서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외국에 사는 게 두렵기도 했다. 어릴 때는 해외 어학연수를 다녀온 친구들을 부러워하며 간절히 외국에 살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반 친구들보다 영어를 못하는 건 고등학교 시절 내내 나의 콤플렉스였고,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유창하게 영어를 말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세상에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저렇게 많고 그렇기에 나 같은 사람은 절대로 외국에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도 정말 영어가 두렵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자존심 때문에 미련이 없는 척하기도 했다. 마치 영어를 공부해도 잘 안 되자 도로 영어를 포기해버렸던 고등학교 때처럼 말이다.

여기서는 남과 비교할 수가 없다. 영어를 정말 잘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십 년을 살아도 한 마디도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각자 자라온 환경과 쏟아온 열정이 다르고, 영어를 나보다 못하는 대신 다른 걸 나보다 잘하는 사람도 있다. 무엇보다 점수를 내는 게 아니라서 누가 나보다 영어를 잘하고 못하고를 단순히 구분할 수가 없다. 의사소통 수단일 뿐이니까 말만 통하고 서로 원하는 걸 얻기만 하면 된다. 한국 친구들끼리 누가 한국어를 잘하는지 비교하기 어렵듯이 말이다. 외국에 산다고 해서 영어를 무조건 더 잘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어린 시절 단순히 해외에 살다 와서 쉽게 영어를 잘한다고 생각했던 그 친구들도, 외국에 있는 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며 외롭게 고생했을 거란 걸 이제는 안다. 두려움 말고 자신감을 갖고 살고 싶다. 앞으로의 내 삶이 걱정으로 기회를 허비하는 시간이 아니었으면 한다. 바리스타 경력이 삼 년 있어도 면접 때 ‘잘은 못하지만, 열심히 해보겠습니다.’라고 하는 나와 달리, 커피를 삼십 분 만들어본 게 다여도 자신 있게 ‘저는 라떼아트에 소질이 있습니다!’ 하는 키위들을 조금은 본받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