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시절, 정말 들어가고 싶었던 봉사 동아리가 있었다. 경쟁률이 높아서 면접까지 통과해야 활동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정성껏 자기소개서를 써내고 저녁때까지 학교에 남아 면접을 봤고, 면접 때도 최선을 다해 그들이 원하는 답을 해서 겨우 합격했다. 그렇게 들어간 그 동아리는 처음에는 정말 천국 같았다. 원하던 활동을 할 수 있었고, 사람들도 모두 좋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어딘가 불편하고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닌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동아리 엠티에 가서 그 이상한 느낌은 좀 더 선명해졌다. 준비된 프로그램이 다 끝나 자유시간이 되자 여성 회원들은 따로 마련된 방에 둘러앉아 사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한두 달쯤 활동한 끝에 서로 조금 더 친해졌고, 몇몇은 맥주도 꺼내와 마시며 더 편안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그러다 누군가 남자친구 얘기를 꺼냈다.
남자 이야기
이제까지는 날씨나 일상을 주제로 이야기하며 지내던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시작으로 잠들 때까지 남자 이야기만 했다. 남자 이야기를 해도 된다는 신호만을 기다렸던 사람들처럼 말이다. 남자 이야기라고 뭉뚱그렸지만 사실은 보통의 대학생들이 하는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 미대에는 남학생이 별로 없어서 아쉽다는 얘기, 체대 남학생을 소개받고 싶으니 주변에 있으면 알려달라는 얘기, 공대 여학생들은 대충 후드티에 청바지를 입고 다녀서 남자들은 맵시 있게 꾸미는 문과대 여학생들을 좋아한다는 얘기도 있었고, 연락하고 있는 남학생의 반응이 시큰둥하다는 고민이나 어떤 스타일의 남자를 만나고 싶은데 본인의 학과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나한테는 그 모든 게 ‘남자 이야기’로 들렸다.
나는 그때 젠더 이분법이니 성역할 고정관념이니 하는 페미니즘의 개념들을 몰라서 그 이야기가 잘못됐거나 불편하다고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그냥 나에게는 아주 지루하고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멍하니 이야기를 듣는 척 고개를 끄덕이며 이 시간이 어서 지나가기를 바랐다. 처음부터 끝까지 남자 이야기가 가득한 분위기에서 남자에 관심이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없었다. 물론 당시 머리가 짧고 또래의 여학생들과 다른 스타일을 고수하던 나에게 남자친구에 관해 물어보는 사람도 없었다. 있었어도 당황스러워서 잘 대답하지 못했을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 동아리에 있던 여자 후배가 좋아서 열심히 활동했던 나는, 무언가 복잡한 마음으로 그 엠티에서 돌아왔다. 엠티를 다녀온 뒤에 다른 회원들은 한껏 더 친해져 있었다. 그들은 서로 좋아하는 남성상을 공유하고, 알맞은 사람을 발견하면 소개팅을 해주고, 때로는 미팅을 함께 나가며 그리고 요즘 연락하는 선배 오빠 얘기를 하며 허물없이 지내고 있었다. 전체가 모인 자리에서 때때로 장난스럽게 주고받는 말들과 서로 짓궂게 놀리며 던지는 농담에서 그런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아무 남자나 좋아한다고 말하면 될 것을, 누가 뭘 그렇게 캐묻는다고 복잡하게 생각하는지, 시종일관해대는 남자 이야기가 지루하긴 해도 그냥 좀 재미있는 척 반응하며 대충 그들 사이에 어울리지는 못하는 건지 나라는 인간은 왜 이렇게 사회성이 없는지 자책하며 동아리 활동에서 조금씩 멀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단순히 관심사가 달랐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소속감
그러다 캠퍼스에 붙어있던 ‘성소수자’라는 글자가 적힌 인권 모임의 포스터를 봤다. 봉사 동아리와 모임 일정이 겹쳤지만, 호기심에 가입신청서를 냈다. 어차피 인권에 관심이 없고 잘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면접에서 떨어질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십 분 만에 합격했다는 답장이 왔다. 정확히는 합격이 아니라 환영한다는 메일이었다. 첫 오리엔테이션에 도착했을 때 백 명쯤 수용하는 학교 강의실이 꽉 차서 놀랐다. 봉사 동아리의 여성 회원들은 모두 풀메이크업을 하고 찰랑거리는 긴 머리를 하고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는 나보다도 머리가 짧은 여성들이 중간중간 보였고, 뒤풀이에서 내 맞은편에 앉아있던 회원이 자연스레 커밍아웃하며 함께 더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 그날 나는 막차가 끊기고 첫차가 뜰 때까지 쉴 새 없이 내 이야기를 했다. 다음날 눈을 뜨니 목이 잠겨 있었는데, 봉사 동아리에서 늘 듣던 ‘왜 이렇게 자기 얘기를 안 해요?’, ‘원래 조용한 타입이에요?’ 하는 말들이 무색하게 느껴졌다.
이후로 두 모임의 일정이 겹치는 날 내가 어느 쪽에 참석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엠티를 가고 소풍을 하러 가던 그해의 봄은 정말 아름다웠다. 나에게 맞는 공동체를 만난다는 건 그런 거였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을 만나는 게 귀찮고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내 모습을 봐주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건 오히려 즐겁고 행복하게만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은 이래서 자꾸만 서로 만난다는 걸 드디어 이해했다. 모임이 있으면 어떻게든 빠질 궁리만 하고 이미 참석했어도 늘 집에 갈 시간만 기다리던 내가, 잠깐의 공강 시간에도 어떻게든 그곳을 찾아가 어떻게든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사회성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내가 속해있던 사회가 모두 나에게 속해있다는 느낌을 충분히 주지 않아 불안하고 조심스러웠을 뿐이었다. 나는 그 공동체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며 사람들과 진정한 관계를 맺는 법을 처음으로 배웠다. 그러는 동안 참 행복했다. 소속된다는 건 행복한 거였다.
성소수자로 사는 일의 가장 큰 고통은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고립된다는 점이었다. 대통령도 동성애를 반대한다고 말하고, 군대에 있는 동성애자 국민들은 법으로 보호받지 못하며, 이성애자 국민들과 달리 법적 결혼조차 안 되는 한국에 사는 동안 나는 국민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사라지지 않았다. 국가에 소속감을 느낄 수 없는 것뿐만 아니라 학창 시절에는 가장 가까웠던 친구들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꼈다. 지금은 삶에 연애 말고도 많은 것들이 있지만 그 시절 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건 사랑과 연애였고, 누군가의 말 한 마디에 세상이 무너지고 웃음 하나에 온 우주가 다시 피어나던 기분으로 살던 시기였다. 나라는 사람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사랑과 연애를 이해받지 못하는 건 내 존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과 같았다. 가족 공동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침 드라마의 불효녀가 되지 않으려면 나는 가족들에게 솔직하게 말할 수 없는 일상이 많았고, 누구를 만나는지 어디를 가는지 숨기면서 신뢰를 쌓는 건 쉽지 않았다. 이성애자들도 모든 연애사를 부모님들과 공유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 그러나 파트너와 장기적인 관계가 되고 함께 미래를 생각하기 시작하면 가족에게 오픈하고 응원도 받고 서로 알아갈 자리도 마련할 수 있다. 나는 여자친구를 사귀기 때문에 그 모든 게 어려웠다.
가족 공동체
누구를 만나고 어떤 관계를 맺고 싶은지는 내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로 연결된다. 가족과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 없기에, 가족들 사이에서 나는 자꾸만 중요한 문제에 관해 대화를 회피하고 미래를 건설적으로 고민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된다. 이민 여정을 시작하고 나서는 결혼을 언제 할 건지, 하기는 할 건지를 넘어 왜 취업을 하지 않는지, 왜 자꾸 한국과 뉴질랜드를 왔다 갔다 하면서 파트 타임 일만 찾는지, 언제까지 그렇게 철없게 한가한 생활만 할 건지 묻는 말에 더 대답하기 어려워졌다. 물론 내 삶을 가족이나 친구와 모두 공유해야 하는 건 아니고, 내 사랑은 타인의 인정을 받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나는 어려움을 털어놓고 상의하고 싶고 응원도 도움도 받고 싶다. 그럴 수 없는 삶이 외롭게 느껴진다.
최근 부모님께 커밍아웃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건 결국 소속되고 싶다는 느낌에 직결되는데, 경제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어렵고 힘들 때마다 지지해줄 집단을 갖고 싶었다. 우리가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고 큰 어려움 없이 해내고 있다면 모르겠지만, 갑자기 큰돈이 필요하기도 하고 비자가 나오지 않아 계획에 차질이 생기도 하는 이민 생활은 녹록하지 않다. 그럴 때마다 어디에라도 의지하고 싶어진다. 또한, 비자와 여러 사정 때문에 한국과 뉴질랜드를 오가는 운명이 되니 내 신변에 관한 정보에 정체성이 자꾸만 포함된다. 파트너십 방문 비자를 가지고 있어 뉴질랜드에서 취업할 수 없으며, 다음에도 파트너십 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한국에 너무 오랫동안 있을 수 없고, 비자가 만료되면 다시 비자를 받을 때까지 한국에 돌아가서 지내야 하는 것을 커밍아웃하지 않은 채 말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나는 이제 파트너와 결혼을 했기 때문에 이제 커밍아웃은 나만의 일이 되지 않는다. 나는 최근에 정식으로 커밍아웃을 한 적은 없지만 어릴 때부터 가족들에게 정체성을 숨긴 적이 없다. 부모님은 내 정체성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잘 모르는 눈치라 그저 관련 내용을 화제로 선택하지 않고 외면할 뿐이다. 나 또한 조금 더 나이를 먹고 나서는 커밍아웃에 관한 생각이 달라져서 그런 대화 주제를 함께 피해주었고, 그래서 다시 커밍아웃을 한다면 내 커밍아웃은 암묵적 약속을 깨고 이미 알던 내용을 수면 위로 올리는 계기가 된다. 반면에 파트너는 가족들에게 정체성에 관해 전혀 일언반구도 언급한 적이 없고, 굳이 집안에 이야기해서 분란을 만들고 싶어 하지 않는다. 물론 나 또한 그걸 강요하고 싶지 않다. 요즘은 비혼주의도 많고 부모님의 기억 속에 그냥 평생 ‘아는 언니’랑 사는 것으로 남는 것이 효도이자 모두가 편한 길일지도 모른다. 평생을 다른 생각으로 살아온 부모님의 사고방식을 지금 뜯어고치기도 어렵고, 레즈비언이 무엇인지부터 설명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나는 커밍아웃과 함께 결혼했다는 말도 하고 싶은데, 서로의 집안에서 알지도 못하는데 우리끼리만 결혼을 했다거나 우리 집안만 이 결혼을 안다는 건 부모님의 상식에서 말이 안 될 것이다.
한국에 소속감을 느껴본 적 없지만, 가끔 뉴질랜드에는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곳의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이 나라에 아무 연고도 자원도 없는 외국인으로서 무사히 직업을 구하거나 무사히 비자를 받을 때마다 조금씩 소속감이 강해진다. 동성 연인이지만 당당하게 파트너십 비자를 받았고, 원한다면 언제든 서류상으로 결혼도 할 수 있으니 성소수자인 나를 배제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어쩌면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서 작은 일에 만족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백인이 아니지만, 관광이나 서비스업에 종사하기 때문에 일터에 백인이 드물다. 그 덕에 이방인으로서 이질감을 느낄 구석이 별로 없다. 기존 기득권 세력에 위협이 되지 않는 그룹에 있어서 유리 천장과 인종 차별도 피부로 느낄 기회가 적다.
한국에서는 학벌도 가졌고 말도 잘했고 정보력도 있었고 인맥도 있었다. 어쩌면 한국에서 내가 성차별과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 대우를 예민하게 느꼈던 건 그 외의 다른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왜 이곳에 굳이 와야 했는지 스스로 되물을 때가 많다. 내가 가진 조건들은 이곳에서 불리하고, 한국에서 쉽게 할 수 있었던 수많은 것들이 여기서는 불가능하다. 직업 선택이 더 제한되고, 충분히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지 못하니까 취미로 모임에 나가기도 꺼려진다. 나는 소속되고 싶어서 애인과 결혼했다. 우리 관계에 더욱 강력한 이름을 붙이고 싶어서, 우리 둘을 중심으로 가족이라는 소속을 만들고 싶어서, 그리고 그게 가능한 곳을 찾다 보니 뉴질랜드에 왔다. 소속되고 싶어서 그동안 알던 모든 것을 뒤로하고 팔천 킬로미터나 날아왔다. 고작 그 소속감을 얻기 위해 이렇게 먼 곳에 고립되어 버렸고, 그나마 가졌던 자원들을 다 포기했다. 가끔은 그걸 위해 잃어야 했던 것들을 세어보며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