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몽 [day-dreaming, 白日夢]
충족되지 못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비현실적인 세계를 상상하는 것.
혐오의 사회적 각본과
‘래러미’의 질문들
퀴어, 공간, 재현
게이 지수(gay index). 도시의 다양성을 측정하기 위한 지표. 게이공동체가 발달할 정도로 사회적 관용이 깊은 곳에 다양한 인재가 모이며, 그게 곧 첨단산업 발달의 토대가 된다고 주장한 미국의 도시계획학 연구자 리처드 플로리다의 개념이다. 종종 ‘대기업이 성장하려면 게이를 채용하라’라는 식의 성장지상주의적이고 도구론적인 슬로건으로 회자되기도 하지만, 기실 ‘게이 지수’는 소수자가 살기 좋은 도시가 모두에게 좋은 도시일 가능성이 높다는 아이디어와 맞닿는다.
그런가 하면, 퀴어와 공간의 관계에 대해 통용되는 또 하나의 강력한 인식은 ‘퀴어는 익명성이 보장되는 대도시에 사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이다. 적은 인구에,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아는 일종의 ‘안면 공동체’인 촌락에서 성소수자의 생활은 노출될 위험이 높은 반면, 퀴어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접할 수 있고, 다양한 성향의 사람들이 섞여 살며 서로에 대해 어느 정도 무관심한 대도시는 퀴어에게 더 많은 자유를 보장한다는 식이다.
그런데 어떨까. 1998년 10월 6일 밤, 미국 와이오밍 대학에 다니던 매슈 셰퍼드는 ‘살기 좋고 평범한 시골마을’로 알려진 ‘래러미Laramie’의 한 바에서 에런 매키니와 러셀 핸더슨의 차에 탄 뒤 외곽도로 울타리에 묶인 채로 발견됐다. 병원에 옮겨진 지 6일 만에 매슈는 사망했고, 사람들은 이것이 “단순(어떤 범죄든 ‘단순’이라는 말로 수식되는 것이 가능한가!)” 강도살인인지 아니면 동성애혐오에 의한 범죄인지 의견이 분분했다. 이 잔인한 사건이 자신들의 마을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던 래러미 주민들은, 이를 “타지 사람 짓”이라거나 혹은 두 명의 ‘괴물’이 벌인 극히 예외적인 사건으로 의미화하려 했다. 이 사건을 보도하는 각종 미디어들은 래러미를 끔찍한 범죄현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곳으로 낙인찍었다.
미국사회를 뒤흔든 이 사건에 공연예술이 어떻게 개입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극작가이자 연출가 모이세스 코프먼과 극단 ‘텍토닉 시어터’ 단원들은 매슈가 사망한 지 4주 뒤에 래러미로 가서, 그곳 주민들과 2년간 200회가 넘는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리고는 인터뷰 과정과 내용을 ‘기록・보고’하는 형식의 연극 <래러미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단원들은 이 작품이 결코 ‘매슈 셰퍼드 살인사건의 전모’나 ‘동성애혐오, 무엇이 문제인가’ 따위의 관점으로 읽히기를 바라지 않았다. 피해자의 비규범적인 성정체성 혹은 성적 선호를 부각시키거나, 범인의 ‘진짜’ 범행동기를 확정하는 일에도 관심 두지 않았다. 단원들의 관심은 ‘래러미’라는 공간 그 자체에 있었다. 래러미에서 게이로 산다는 것, ‘래러미’라는 공동체가 이 사건을 의미화하는 방식, 그리고 미국 사회가 래러미를 규정하는 방식. 연극의 제목이 <래러미 프로젝트>인 이유다.
또한, 단원들은 이 떠들썩한 사건을 그저 연극의 소재나 대상으로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연극을 만드는 과정과 작품 자체가 담론화의 한 부분이자 결과인 동시에, 또 다른 담론을 촉진하는 물꼬이기를 바랐다. 그러므로 단원들은 그들 자신 역시 해당 공동체의 성원(member)으로서 이 담론화 과정에 임했고, 그것에 연루되고 개입하는 자신들의 발화위치, 인터뷰 작업을 거치면서 변화하는 자신들의 감정과 생각을 연극에 기입하고자 했다. ‘다큐멘터리 희곡’이라는 특수한 형식은 이런 고민의 산물이다.
그 결과, 다양한 인물들의 수많은 ‘의견들’과 그 부딪침을 재연/재현하는 연극 <래러미 프로젝트>는 ‘소수자와 공간’의 관계에 대한 통념들을 가차 없이 흔들어놓는다. 정말 소수자에게는 시골마을보다 대도시가 절대적으로 유리한 환경인가, 게이공동체가 발달하기 좋은 조건으로서의 사회적 ‘관용tolerance’이란 대체 무엇인가. 수많은 성격의 각기 다른 ‘차이’들은 도시공간에서 어떻게 고려・배치되는가, 소수자와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성원으로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가.
마침내 서울로 옮겨진 래러미. 2019년 9월, 남인우 연출과 극단 ‘북새통’은 1998년에 제기된 래러미의 질문들을 드디어 서울의 강남과 대학로의 한 극장에 펼쳐놓는다(<래러미 프로젝트>, 극단 ‘북새통’, 선돌극장, 2019. 9. 5~9. 15). 불특정 다수가 비필연적으로 모인 ‘극장’이라는 공간/공동체에서 110분 동안 서로 같고도 다른 무수한 ‘의견들’을 무방비 상태로 만날 때, 그곳에서 우리는 어떤 존재였나. 그 검은 공간에서 나온 지금은.
* 본문에 인용된 대사는 대부분 2019년 9월 8일에 선돌극장에서 상연된 <래러미 프로젝트>의 것을 따르되, 원작 희곡 <래러미 프로젝트 그리고 래러미 프로젝트: 십 년 후>(모이세스 코프먼과 텍토닉 시어터 프로젝트, 마정화 역, 열화당, 2018)을 참조했다.
무대 위의 객석
‘당사자-되기’의 불가능성과 공동체
극장에 들어섰는데, 기이하다. 무대 앞쪽에 계단식으로 마련된 원래의 객석은 비워둔 채, 관객을 위한 자리 45개가 ‘무대’에, 중앙을 향해 사방에 놓여 있다. 의도는 명백하다. 이 연극은 관객이 무대보다 높게 배열된 객석에 앉아 무대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저 ‘관망’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뜻이다. ‘무대’에 마련된 의자에 앉은 관객들은 이제 이 극장에서 벌어질 모든 일의 직접적인 목격자이자, 공모자이자, 행위자일 것이다.
불이 꺼지자, 관객인 줄로만 알았던 내 옆에 앉은 남자가 일어나 말한다. 자신은 텍토닉 시어터의 단원 ‘그레그 퍼라티’이며, 와이오밍의 래러미로 가서 주민들과 인터뷰를 했다고. 이제 그 인터뷰를 기록한 단원들의 일지와 자신들이 찾은 텍스트들을 편집한 내용을 우리에게 보여주겠다고. 그러더니 그는 금세 자신이 래러미에서 만난 첫 번째 인터뷰이인 ‘힝 경사’로 분한다. 그는 모자나 안경 같은 아주 간단한 소품만으로 인터뷰 당시 힝 경사의 인상착의를 재현하고, “이런 식으로 앉아 있었”다며 힝 경사의 앉은 자세와 말투를 흉내 내 보인다. 그런 식으로 8명의 배우는 인터뷰어인 텍토닉 시어터 단원들과 인터뷰이인 래러미 주민들을 포함해 각각 적게는 6개, 많게는 11개의 배역을 맡는다. 연극은 특정 인물의 개인사나 감정선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특정 상황 혹은 ‘순간’에 처한 해당 인물의 즉각적인 반응과 ‘의견’만을 보여준다.
요컨대 <래러미 프로젝트>는 배우와 관객에게 ‘당사자-되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이 연극은 해당 사건의 ‘당사자’여야만 발언의 자격이나 ‘진정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믿음, 혹은 당사자의 입장에 이입함으로써 사건을 추체험하는 방식이 ‘매슈의 죽음으로 촉발된 공동체의 (불)가능성’을 사유하는 데 필수적이라거나 최선의 방식이라고 승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품은 관객으로 하여금 특정 인물에 동일시하거나 과도하게 몰입하는 대신, 특정 국면에서 사람들의 서로 같거나 다른 의견들이 어떤 ‘흐름’과 ‘추세’, ‘효과’를 만들어내는지에 집중하도록 한다. 그럼으로써 이 연극은 ‘공동체의 성원으로 산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매 순간, 매 사건의 ‘당사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와 더불어 사는 존재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성찰하고 실천하는 것임을 탁월하게 증명해낸다.
작은 마을에서
게이로 산다는 것
극의 초반, 주민들은 래러미가 어떤 곳인지에 대해 진술한다. 미국에서 가장 인구가 적은 주, 와이오밍 대학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전통적인 농업이 주 산업이었던 곳, 한 다리만 건너면 모르는 사람이 없으며 밤에 아이들이 돌아다녀도 안전한 곳, 날씨가 좋아 조깅하기 좋은 곳, 전 세계에서 여성이 처음으로 자유선거에 참여한 “평등의 주”, 동성애 문제는 “귀찮게만 하지 않는다면야” 아무도 개의치 않는 곳, 허나 지금은 “매슈 일”로 인해 ‘범죄’로서 규정되는 곳. 실제로 사람들이 사는 곳이 아니라 그저 “명사, 의미, 기호가 돼버”린 곳.
하지만 주민들이 애써 ‘전통’과 ‘안전’과 ‘평화’의 수사로써 래러미를 소개하려 해도, 래러미 구성원들에게 본래부터 ‘차이’가 있었다는 점은 감춰지지 않는다. 새로 유입된 대학인구와 대비되는, “최저임금”을 받는 바텐더들. 교육의 차이와 계급의 차이. “래러미에는 차이가 있고 언제나 그래왔다는” 것. 이런 단편적인 언급들에서 감지되는 것은, ‘래러미가 너무 작고 평화로운 도시이기에 (내가 모르는) 게이는 없다는 것’, 즉 ‘래러미는 동질적인 공동체’라는 믿음이 허구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래러미에서 동성애자로 산다는 것’은 어떨까. 매슈는 이미 죽어 말이 없으므로, 연극은 동성애에 대한 래러미 주민들의 생각을 보여준다. 연극배우 지망생인 ‘제더다이아 슐츠’는 “게이가 아니”지만 오직 입시에 통과할 목적으로 게이가 등장하는 “좋은 장면”을 연기했고, 슐츠의 부모는 그가 살인자를 연기했을 때와는 달리 게이를 연기하자 연극을 보러 오지 않았다. ‘캐서린 코널리’가 대학 임용 면접에서 남편에 대한 질문을 재차 받아 결국 자신이 레즈비언이라고 커밍아웃한 1992년 전까지 와이오밍 대학에는 ‘커밍아웃한’ 동성애자 교직원이 없었으며, 여자들은 세간의 ‘오해’가 두려워 코널리와 함께 있길 꺼린다.
이 직관적인 문답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역시 백인 노동계층의 보수적인 사고방식이 만연한 시골마을은 성소수자에게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 그러므로 동성애자들은 더 많은 게이커뮤니티가 활성화된 대도시로 나가야 한다는 것?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퀴어와 공간의 관계를 탐문한 트랜스정치학 연구자 루인과 정희성이 갈파했듯*1, 대도시라고 해서 이웃과 직장 단위에서까지 익명성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며, 때에 따라 시골인 ‘고향’은 그 보수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서로 오래 봐온, 비규범적인 존재인 누군가를 그저 ‘원래 그런 사람’이라며 크게 문제 삼지 않기도 한다. 즉 시골과 도시에 대한 위계화된 이분법적 사고는 실제로 소수자가 어떻게 사람들과 섞여 살거나 그렇지 못하는지에 대한 불충분한 가설이라는 것이다. 래러미 출신 게이들에게 래러미에 대해 물으면, 누군가는 “거기서 어떻게 살아. 떠날 수밖에 없어.”라고 말하지만, 또 누군가는 “래러미 그립다. 거기 정말 좋아하거든.”이라고 답한다. 그러므로 래러미의 질문은 더 나아갈 필요가 있었다. “사람들은 살고 싶은 데서 살아야만” 한다고. “더 많은 게이들이 작은 마을에 사는 걸 상상해 보”라고.
어떤 관용
“내 눈에만 띄지 않는다면”
그런데 대도시로 갈수록 더 잘 보장된다는, 적어도 “우리 마을”에는 확실히 자리 잡았다고 믿는 사회적 ‘관용’이란 무엇일까. “평등의 주”를 자부하는 와이오밍의 래러미 주민들이 동성애 문제를 말할 때 반드시 덧붙이는 ‘유보’의 문구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힝 경사: 어떻게 사람이 그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우리 주는 동성애자들이 가장 강력하게 의견을 피력하는 곳 중 하나거든요…. 그리고 거의 이런 식이에요. 살아라 그리고 살게 하라.
게링거 주지사: 저는 와이오밍 주민 여러분께 누군가에게 다른 사람들을 넘어서는 ‘특별한 권리’를 줄 수 있는 방식으로 과하게 행동하지 말라고 요청드리고 싶습니다. 매슈 셰퍼드에 대한 잔인한 구타와 고문이 증오에서 유발된 것인지를 우리는 좀 더 지켜보고자 합니다.
길 엔겐: 아무도 성가셔 하질 않아요. 왜냐하면 게이나 레즈비언들은 대부분 누구랑 이야기해야 하는지를 아주 잘 알거든요. 만약 그 선에서 벗어난다면 자초한 거죠. 사람들 말로는 그가 유혹했다는데요.
공적 장소에서 ‘게이-임’을 티내지만 않는다면, 게이들끼리만 얌전히 지낸다면, 나를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이는 성소수자에 대한 제도화된 차별이나 노골적인 폭력이 더 이상 없(다고 믿)는 ‘문명화된’ 도시에서 강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자유주의적 통치술의 유구한 형태이자 “선량한 차별”*2 의 레토릭들이다.
이를테면 동성애자의 군 입대와 복무를 금지해온 그간의 법령이 동성애자에 대한 명백한 차별이자 인권 침해이므로, 1993년 클린턴 정부는 ‘군대 내에서 누구에게도 그가 동성애자인지 묻지도 말고 답하지도 말라(Don’t Ask, Don’t tell)’라는 정책을 내세운 바 있다. 동성애자임을 밝히지만 않는다면 동성애자도 군인이 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동성애자가 군인이 될 수 있게 했지만 군인이 동성애자일 수는 없게 한”*3이 정책은 정말 동성애자에게 더 많은 자유를 부여했을까. 퀴어활동가 한채윤은 일명 ‘DADT’로 알려진 이 정책의 기만적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확하게 지적한다.
DADT는 매우 악랄한 차별정책이다. 동성애자는 좋은 군인이 될 수 없다는 규정은 그대로 둔 채 동성애자의 군복무를 받아들였다. 이는 동성애자에게서 동성애자라는 사실만 제외하고 모든 능력은 가져다 쓰겠다는 것이며, 동성애자에게는 사진에 대해 침묵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 구조적 차별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마치 동성애자 개인의 선택이나 요령부득의 탓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 DADT 정책이 ‘묻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는’ 환경 속의 안전을 약속했다면 이 정책의 폐지 운동은 자유롭게 ‘묻고 말하는’ 환경 속의 안전을 요구한다. 묻지 않는 것이 배려가 되고 말하지 않는 것이 권리가 될 수는 없다.*4
그런데 “동성애자 군인들에게 침묵과 신분 유지를 교환하라”*5라고 요구하는 이 부당한 정책은 미국 특유의 정치적 풍토에서만 작동하는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 퀴어퍼레이드 때마다 자주 들려오는 이야기들 중 하나를 떠올려보자. ‘동성애를 하건 말건 공공장소에서 애정행각을 하거나 노출이 심한 옷을 입는 것은 보기 안 좋다’는 것. ‘그런 전략은 오히려 동성애자를 성애적 존재로만 상상케 하는 나쁜 효과를 낳는다’는 준엄한 조언까지. 하지만 피부색이나 신체적 특징, 말씨 등으로 식별되지 않는 비가시적 차이를 지닌 성소수자가 이성애가 기본값인 사회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이 얼마나 있을까. 이런 사회적 조건에서, ‘내 눈에만 띄지 않는다면’ 동성애자를 차별하지 않겠다는 말, “내가 호모라고 말만 안 하면, 날 패지 않을 거라는 말”,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관용일까.
미국 헌법학자 켄지 요시노는 “주류에 부합하도록 남들이 선호하지 않는 정체성의 표현을 자제하라”라는 동화주의적 요구를 ‘커버링(covering)’이라고 명명하며, 이는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라, “한 집단이 다른 집단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재확인시키는 불평등의 상징”이라고 말한다. 동성 간 애정표현을 한 이들이 ‘동성애자’인 것을 굳이 ‘과시’했다는 이유로 비난받거나 처벌받지만, 기실 그들이 과시한 것은 ‘동성애’가 아니라 “평등에 대한 스스로의 믿음”, 즉 “공적 영역에서 표현할 가치가 있는 인간적 유대의 종류가 무엇인지 결정하는 것은 주나 사회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믿음”*6 이라는 것이다.
“그 일은 여기에서 일어났다.”
다시 래러미로 돌아오자. 이제 연극은 매슈 셰퍼드의 죽음을 해석하는 각계의 입장들을 빠르게 보여준다. 래러미 출신이자 가해자의 친구들은 매슈가 돈을 잘 쓰는 “부자 개년”이었으며, 에런은 게이를 “안 좋아하”므로 매슈가 에런에게 “치근덕거리지만 않으면 괜찮”았을 거라고 말한다. 또 다른 주민 '셰리 존슨'은 그날 한 노인이 치어 죽인 순찰대원의 죽음은 회자되지 않는 반면,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매슈의 죽음이 “순교자”처럼 떠받들어지고 있다고 성토한다. 한 침례교 목사는 매슈가 죽기 전에 “자신의 생활방식을 후회할 기회가 있었”기를 바란다고 진술했으며, 사건현장에서 피 흘리는 매슈를 수습한 ‘레지 플루티 경관’은 자신이 에이즈에 감염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절망한다. 동성애혐오가 매슈를 죽게 만들었다고 믿는 이들 중 일부는 가해자인 에런과 러셀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매슈의 부모를 포함한 또 다른 이들은 그것이 과연 “세상을 더 낫게 하려고” 인권운동에 헌신했던 매슈가 바라는 일일지 고민한다. 과연 반전은 있을까.
어떤 사람이 일어나더니 어, 어쩌고 저쩌고, 그러고는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제가 잘못 옮기는 걸 수도 있지만 이런 말이었어요. ‘자, 여러분, 우리 래러미가 이런 마을이 아니라는 걸 세상에 보여 줍시다.’ 그렇지만 이런 마을이에요. 이런 마을이 아니라면, 왜 이런 일이 여기서 일어났는데요? (…) 그 사람들은 범죄와 자신들 사이에 거리를 두려고 애쓰는 거예요. 그렇지만 우린 그 범죄를 지녀야만 해요. 모든 사람들이 그 범죄를 품어야만 해요. 우리가 그런 거예요. 우리가 바로 그 범죄예요. 바로 우리가 그 일이라고요.
매슈를 추모하는 촛불 기도회에 참석한 이슬람 문화권 출신 페미니스트 '주바이다 울라'의 말이다. 폭력의 원인을 피해자에게 돌리거나, 가해자들을 병리화・악마화함으로써 이 사건으로부터 거리를 두려는 래러미 주민들에게 울라는 말했다. “우리가 바로 그 범죄”라고. ‘동성애자임을 티냄으로써 나를 거슬리게 했다면’ 그 동성애자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식의 ‘피해자 유발론’ *7 을 공유함으로써 매슈의 죽음을 용인한 이들, 그리고 매슈의 죽음 앞에서 그것과 거리를 두려고 동성애혐오를 부인하는 “우리”가 바로 그 “범죄”라고. 울라의 말은 래러미가 폭력과 무관한 유토피아라는 환상, 게이가 살기 좋은 관용적인 사회라는 오랜 믿음이 허상임을 무참히 폭로하지만, 역설적으로 우리 모두 래러미, “여기서 만들어졌”음을 직시할 때, 또 다른 ‘사건’이 도래한다.
'펠프스 목사'가 매슈의 장례식장에서 동성애자들에 대한 신의 증오를 운운하며 혐오발언을 쏟아낼 때, 매슈의 레즈비언 친구인 '로메인 페터슨'은 하얗고 큰 날개를 단 스무 명의 친구들과 함께 펠프스 목사를 둘러싼다. 펠프스 목사의 혐오발언을 듣지 않기 위해 등을 돌리고 귀마개를 한 채 평화와 사랑과 공감의 메시지를 말하는 일명 ‘천사 투쟁’은 이들이 찾아낸 “증오를 다루는 더 좋은 방법”이다. 매슈를 기억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생겼고, 래러미에 사는 성소수자 주민들은 유례없는 희망을 얻었으며, 레지 플루티 경관은 HIV/AIDS 음성 판정을 받았다. 오직 입시를 통과할 수 있는 “좋은 장면”이기에 게이를 연기했던 제더다이아 슐츠는 이제 조금 다른 마음으로 다시 한 번 같은 배역을 연기할 것이다.
자, 여느 연극이라면, 이 장면 뒤에는 분명 화해와 희망의 결말이 준비돼 있을 것이다. ‘숭고한’ “천사 투쟁”은 분명 이 작품의 클라이맥스이며,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정서적 전환과 인식적 고양을 가져오는 핵심사건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래러미 프로젝트>의 이야기는 그저 ‘프로젝트’가 아니라 진짜 “삶”이기에, 이 사건들은 ‘충분할’ 정도로 드라마틱하게 재현되지 않는다. 오히려 극은 이 ‘고양’의 사건들을 다른 비극적 삽화들과 동등한 비중으로 재현한 후, 나지막이 묻는다. 다 끝난 거냐고.
래러미, 그리고 다시 서울에서
겉으로 보기에 “오케이목장”처럼 정의가 실현된 듯 보이는 이 결말에 대해, 래러미에 사는 남성 동성애자 '조너선 슬로너커'는 말한다. 매슈 셰퍼드가 죽은 지 일 년이 지난 지금, “주에서도, 어떤 마을에서도, 그 누구도, 어떤 종류의 법령도, 반차별법, 증오범죄법 같은 건 아무도 어디에서도 어떤 법도 통과시키지 않았”다고. 그리고 이내 연극도 막을 내린다. 매슈의 죽음 이후 래러미에서 일어난 일을 희곡으로 쓴다면, “옳게” “제대로 하려고 최선을 다”하라는 '로저 슈미트 신부'의 말과 함께.
텍토닉 시어터와 북새통의 단원들은 바로 이 마지막 말을 곱씹으며 연극을 준비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미국과 한국의 단원들이 경험한 ‘인식의 전환’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매슈의 죽음을 계기로 래러미 주민들이 경험한 혼란과 분투를 기록한 바로 그만큼의 인터뷰와 일지가 또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1998년 <래러미 프로젝트>는 2019년 서울의 관객들에게 어떤 질문을 남겼을까.
미국을 포함한 서구 유럽의 퀴어운동사를 일종의 ‘모범’ 사례이자 곧 도래할 ‘미래’로 상상하는 데 익숙한 한국의 관객에게 <래러미 프로젝트>는 꽤 낯선 이야기일 수도 있다. 퀴어 친화적인 곳으로 인식되는 미국의 한 소도시에서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동성애자를 상대로 잔혹한 폭력이 자행됐다는 사실은 선적인 방식의 발전론을 전제하는 퀴어운동사의 통상적인 시간성에 균열을 낸다.
그렇다고 미국과 한국 모두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다를 바 없다는 점을 확인하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2009년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매튜 셰퍼드-제임스 버드 주니어 증오범죄 금지법안’에 서명한 반면, 한국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제정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이 시차時差가 선적인 방식으로 진행되는 진화론이나 단계론의 증빙이 아니라, 시차視差에의 전환을 요청하는 일종의 시그널이라는 점이다.
<래러미 프로젝트>는 ‘나는 혐오 받는 사람도, 혐오하는 사람일 리도 없다’는 자기보존적 믿음에서 벗어나, 자신이 속한 곳이 필연적으로 온갖 ‘차이’들이 거주하는 곳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성찰해야 한다고 말한다. 혐오하는 ‘악마들’을 규탄하고 자신과 그들을 분리할 게 아니라, 혐오언설이 기대고자 하는 이성애 규범적인 사회적 각본을 만드는 데 일조하지 말라고, 아수라처럼 펼쳐지는 혐오정국에서 자신이 서 있는 곳은 ‘안전한’ 객석이 아니라, 자신의 말과 행동에 의해 얼마든지 다른 일이 펼쳐질 수 있는 ‘무대’임을 직시하라고.
<래러미 프로젝트>가 110분간 ‘극장’이라는 수상하고 임의적인 시공간에서 관객으로 하여금 경험하도록 강제한 이 지난한 ‘말들의 사투’는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종결”시키기보다는 “싫다는 의견”일지라도 역동적인 대화의 장면을 만들 때 비로소 가능해질 ‘시차(視差)’를 미리 감각해보라는 주문이다. 그리고 그건 온갖 종류의 차이들이 ‘차이’로서 보존되며 ‘함께 거주하기’를 도모하는 ‘공동체’의 경험에 다름 아닐 것이다.
*1 루인・정희성, 「퀴어와 공간의 관계 재구성─영화 <불온한 당신>(이영, 2015)의 바지씨 이묵을 통해 한국이라는 공간의 이성애 규범성과 도시-촌락 이분법 탐문하기」, <공간과사회> 63, 2018.
*2 김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 창비, 2019.
*3 한채윤, 「소수자는 피해자인가: 커밍아웃, 아웃팅, 커버링」, 권김현영 편,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교양인, 2018, 141쪽.
*4 한채윤, 「엮어서 다시 생각하기: 동성애, 성매매, 에이즈」, 권김현영 외, <성의 정치 성의 권리>, 자음과모음, 2012, 166~167쪽.
*5 한채윤, 「소수자는 피해자인가: 커밍아웃, 아웃팅, 커버링」, 권김현영 편,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교양인, 2018, 141쪽.
*6 켄지 요시노, 커버링: 민권을 파괴하는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폭력, 민음사, 2017, 9~161쪽.
*7 매슈 셰퍼드 사건에서 가해자의 주요 전략이었던 ‘게이 패닉 방어’라는 이름의 피해자유발론이 단지 개인의 발상이 아니라 ‘정상적 남성성’과 이성애 규범에 대한 사회적 각본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전략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루인, 「피해자 유발론과 게이/트랜스 패닉 방어」, 권김현영 편,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교양인, 2018, 187~191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