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심심치 않게 올라오던 기사들을 보았을 것이다. ‘연예인 해준다는 말로 속여 성폭행', '모델 지망생 피해 여고생'... 한결같이 ‘어쩌면 저렇게 멍청하냐’는 2차 가해성 댓글로 도배되었던 사건들. 그러나 내 생각에 그런 피해는 ‘스타의 꿈에 미쳤을 때’라기보다는 ‘경험과 기반 없이 이제 막 입문해보고자 노력하는 시기’에 자주 생겨난다. 욕심 때문이 아니라 무지 때문에 당한다는 이야기다.
주제를 너무 잘 알아서
내가 만난 사짜들만 짚어도 여기서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무수하고 다양한 유형이 있었다. 너는 아무것도 모르니 연기 스터디부터 시작하자거나, 학원형 기획사인지 매니지먼트인지 차려두고 심심하면 불러대며 착취하는 곳이 새고 샜다. 멀쩡해 보이는 제작사에서 시나리오 리딩까지 한 뒤 결국 2차, 3차 술만 마시며 허벅지나 건드리기도 한다. 사진 작업을 하고 싶은데 장소가 마땅치 않으니 모텔에서 만나자는 전화, 어디서 내 프로필을 봤는데 노출 있는 배역이지만 작품이 좋으니 꼭 해보셨음 한다는 피싱에 가까운 전화도 진짜 걸려온다. 노출 하니 생각나는데, 사기꾼 여부를 막론하고 어디 레퍼토리라도 있는 것처럼 수많은 관계자가 여자 배우들에게 엄청 흔히 해 대는 훈계도 있다.
네가 김태희처럼 예뻐? 공효진처럼 인지도 있는 스타야? 아니잖아, 네가 하고 싶은 배역은 그런 애들이 다 한다구. 근데 그런 애들이 꺼리는 게 뭐야? 노출이잖아. 결국 지금 네 위치에서 조금이라도 인지도 있는 배역으로 발돋움하려면, 과감해지는 수밖에 없어. 열정! 김고은 봐! 은교! 그리고 거 뭐야, 인간중독! 유명 배우들이 안 하려 하니까 그런 좋은 배역도 신인에게 가는 거라구. 잘 생각해봐. 다 너 잘 되라고 해주는 얘기지.
영화 <은교>에 어떤 억하심정도 없으나, 그놈의 <은교>를 순진한 배우들 꼬시는 데 얼마나 자주 써먹는지 생각하면 화가 난다. 왜냐하면 그런 이야기를 제안하는 놈들의 대다수는 꼭 ‘작품성 있는 예술영화’를 빙자한 IPTV 성인영화를 만들려 하기 때문이다.
결국 초년생 배우들은 ‘주제도 모르고 욕심이 많아서’라기보다 ‘주제를 너무 알아 뭐든 들어섬기고 배워보려는’ 자세 때문에 각종 버라이어티한 낚시에 걸려드는 셈이다. 다만 그 낚시꾼들을 전부 단순한 사짜로 치부할 수 있을진 고민이 된다. 백 명 중 한둘이라기엔 저런 케이스가 너무 많거든. 미처 열거하지 못했을 정도로 흔한 성희롱범들을 포함한다면, 내가 보는 이 세계는 체감상 50프로 정도가 저 모양이다.
연극계 역시 적응이 만만치는 않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사실은 말하기 조심스럽다. 나는 4년 간 대학로에서 15편의 연극 작업을 겪었고, 그 중 두어 극단에선 단원처럼 생활했다. 그러나 ‘연극과 출신도 아니고 유명한 선배님들도 잘 모르고 한 극단에서 몇 년씩 굴러본 적도 없다’는 자격지심 탓에, 스스로를 ‘연극인’이라고 칭하기 어쩐지 민망한 심정이 있다. 만약 내가 고작 4년의 경험을 가지고 연극계를 ‘깐다면’ 누군가는 ‘네가 뭘 안다고 그러느냐’ 되물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열정 하나로(!) 뭐든 하겠다고 뛰어든 어린 배우로 하여금 고작 3년 만에 환멸을 맛보여준 연극계라면-3년 즈음 했을 때 연극 따위 그만둘까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그것이 설령 일부의 실정일지라도 분명 자성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어느 업계건 착취하고 희롱하려 하는 인간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연극계가 조금 더 치사하게 느껴졌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런 전제들이었다.
‘연극은 시대의 정신적 희망이다(실제 대학로에 쓰여 있는 유명한 문구)’, ‘우리는 위대한 예술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넌 예술혼이 부족한 거다’.
차라리 좀 더 큰 자본금이 얽힌 판이라면 ‘저 인간이 돈과 욕심 때문에 날 이용하려 하고 있어’ 하고 경계하기 수월하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돈 안되는 게 뻔히 보이는 지하 연습실 생활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을 맞닥뜨리면, 사람은 도리어 비이성적인 판단을 하게 된다. ‘돈도 안 되는데 굳이 이래야 해?’가 아니라, ‘돈이 안 되는데도 우리는 이렇게 어렵고 심오한 걸 하는 거야! 그러니까 해내야 해!’라는 생각을, 하고 마는 것이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
물론 그런 생각을 조장하는 건 대부분 거장 예술인의 탈을 쓴 괴팍한 연출가거나, 술이 연기를 발전시킨다고 믿는 몇몇 선배들이다. 내가 만난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 몇 가지를 떠올려 본다. 네가 진짜 연극을 사랑한다면 저기 저 애처럼 극단 옆으로 이사도 오고 밥도 차리고 궁극적으로 나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던 연출가. 너는 아직도 남자친구를 사귀니까 연기에 집중을 못하는 거라 했던 조언. 남자친구와 있다며 사적 연락을 거절하자 다음날 거짓말처럼 바뀌었던 캐스팅. 연습실 밖 단둘일 때 내게 점점 다가서며 ‘내 연기에 성적 에너지가 부족하다’던 디렉션. 왜 페이 이야기가 전혀 없냐고 조심스레 물어온 누군가의 질문에 배은망덕하다며 불같이 화를 내고 엎어버렸던 연습... 이런 일들은 어처구니없긴 하지만 정말 심한 축에 들진 않는다. 정신 소모가 크긴 했으나 어쨌든 내 의지로 커트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직접 겪지 못한 소문들은 더 무시무시했다. 극단 내 여배우를 ‘마누라’처럼 부리거나, 호흡을 잡아준다며 가슴을 만지고 음부를 누르는 행위 등은 이미 젊은 극단에서 패러디해 비판할 정도로 공공연한 일부의 관습이다.
이런 일들을 보고 듣고 나면 <블랙스완>이나 <위플래쉬> 같은 영화를 ‘예술과 열정에 바치는 헌사’로 읽기 어려워진다. 예술적 집착과 광기는 가끔 멋진 것을 낳기도 하지만 필연적으로 주변 사람들을 파멸시킨다. 본의 아니게 그랬어도 나쁜 일인데, 반항 못할 거 다 아니까 일부러 예술 운운하며 사람을 조종하는 건 정말로 지독하다. 그 모든 유치하고 명백한 과오가 ‘연극밖에 모르는 나란 바보’로 포장되는 꼴들을 보노라면, 냄새나는 지하에서 좋다고 마시는 박카스가 너무도 썼다. 유치하게도 나는, 연극이 정말 어떤 희망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차라리 영상매체 쪽으로 눈을 돌리고 기획사에 들어갈 마음을 먹기도 오히려, 더 쉬웠다.
호구 연대기가 아닌 복수 연대기를 위해
쓰다 보니 이건 ‘복수 연대기’가 아니라 ‘호구 연대기’에 가깝다는 강력한 반성이 든다. 맞다. 난 한 번도 제대로 복수해본 적이 없었다. 무서워서. 다시 만날까봐. 일이 필요해서. 소문이 안 좋게 날까봐. 웃고 피하고 밖으로 나와서야 더럽다 침을 뱉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순간은 금세 지나갔지만 데미지는 누적됐다. 어느 순간 깨달은 건, 그렇게 살고 있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위에 열거한 일들은 지면의 한계와 템포의 문제로 선별 및 축소한 것이지, 과장하거나 자작나무를 태운 부분이라곤 조금도 없다. 그러니까 나는 저 많은 일들 이상의 일들을 겪으면서 한 번 큰 소리로 “개새끼야 그만 두라”거나 “너 같은 미친 새끼는 매장돼봐야 한다”든가 “더러운 손 냄새나는 면상 치우라”고 외쳐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회피하고 방관하고 있었다. 내가 회피하고 방관한 것 때문에 누군가는 계속 그 일을 당할 것이었다. 그게 내 자존감을 좀먹고 있었다. 그래서였다. 내가 드디어 어떤 캐스팅 업자를 고소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편집자주: '나의 복수 연대기' 3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