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다른 연극 6. 노라이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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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다른 연극 6. 노라이즘

류진희

6월20일, 제 1회 페미니즘 연극제가 개막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질문을 던지는 연극들을 소개한다. 인터파크에서 모든 연극을 예매할 수 있으며 핀치클럽은 40% 할인을 받을 수 있다.

ⓒ극단 불한당

노라(Nora)만큼 생명력 강한 여성 캐릭터가 있을까. 19세기 노르웨이 작가 입센(Henrik Ibsen)이 주조해냈던 이 여성은 이미 100여년 전에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의 인간”이 되겠다며 <인형의 집>(1879)을 나섰다. 

노라는 가는 곳마다 논쟁을 일으켰다. 당대 유럽에서는 세 아이를 놔두고 나간 이 여성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 논란이 분분했다. 20세기 벽두 동아시아에서도 일본을 필두로 노라의 딸들, 즉 고등교육을 받은 도시의 신여성들이 이채를 띄었다. 중국에서 노라들은 문명개화를 위해 만악의 근원인 집을 떨치고 나가는 혁명가의 초상으로까지 그려졌다.

그러나 식민지인 조선은 달랐다. 근대적 가정은 여성이 떠나야할 곳이 아니라, 정치가 금지된 대신 문화의 영역에서 그나마 성취가 가능한 곳으로 꼽혔다. 조선은 애초의 노라가 ‘꽝!’하고 문을 닫고 나온 '스위트 홈'으로 다시 돌아가라고 했다. 조선의 대표적인 문호 이광수는 “그런 즉 노라야, 다시 네 남편에게로 돌아오라. 그래서 새로운 의미에서 얌전하고 귀여운 아내가 되고 어미가 되어라”고 준엄하게 권고했다. 조선의 노라들은 가출하는 그 순간의 결단이 아니라 이후의 곤란들로 경계됐다. 식민지 경성에서 가장 유명했던 신여성 나혜석이 그의 빛나는 문장과 그림이 아니라, 행려병자로 홀로 죽음을 맞이했다는 비참한 말로로 회자됐듯 말이다.

인형의 집에 노라는 없다

그러나 시대의 한계 속에서도 언제나 ‘지금-여기’의 노라들은 존재했다. 그들은 분투하며 자신의 입지를 만들어왔다. 밀레니엄을 훌쩍 넘긴 21세기, 기존 제도에 대항하는 여성들을 향한 언설로서 ‘노라이즘’이 다시 도착했다. ‘양성평등’ 시대에 여성혐오는 오히려 극심해져 가고, 곳곳에서 여성들의 더 이상 참지 않겠다는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참이다. 

페미니스트의 눈으로 연극을 제작하고자 출범한 ‘페미씨어터’가 제 1회 페미니즘 연극제에서 극단 불한당의 <노라이즘>(2018. 7. 19~29, 드림씨어터)을 내놓은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해보인다. 여전히 여성이 인형으로 유비되고 그의 유일한 거처가 집으로 설정될 때, 그에 대한 비판으로서 노라는 지금도 유효한 현재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비교를 위해 먼저 원작의 줄거리를 살펴두자. 은행가 헬머의 부인 노라가 남편의 은행장 승진을 앞두고, 수년 전 아버지의 서명을 위조하여 남편의 요양비용을 댔던 사실이 탄로 날 위기에 처해있다. 알고보니 노라가 돈을 빌린 고리 대금업자 크로그스타가 남편의 은행에서 일했던 것이데, 그가 지금 해고될 위기에 처해있었던 것이다. 그는 헬머가 자신을 자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자신과 채무관계에 있는 노라를 협박한다. 그러나 크로그스타는 예전에 연정을 품었던 노라의 친구인 린데 부인의 조언으로 다시 마음을 돌리고, 돈을 빌린 증거가 되는 차용증을 그들 부부에게 돌려보낸다.

ⓒ극단 불한당

이로서 극을 지탱하는 갈등은 해소된 듯하지만, 진짜 폭풍은 노라의 마음 속에서 일어난다. 여성에게 신용 대출을 허하지 않는 자본주의 세계는 사실은 여성의 재생산과 가사노동으로 지탱되는 것이었다. 남편을 살리기 위해 불법을 무릅쓰고 돈을 빌린 후, 제 손으로 빚을 갚기 위해 부가노동을 감행했던 노라에게 헬머는 감히 남자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격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모든 상황이 끝난 후, 그는 짐짓 노라를 용서한다며 다시 예전처럼 지낼 것을 선언하지만, 오히려 노라가 자기의 권위만을 돌보기에 여념이 없는 남편의 모습에 크게 실망한다. 그리고 자신 역시 아버지에서 남편으로 대물림되었던 인형에 불과했음을 깨닫고,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책무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가 더욱 크다고 단호히 선언하는 것이다.

극의 마지막은 이렇게 집을 떠나겠다는 노라를 붙잡지도 못하는 헬머가 다시 그들이 함께 지낼 수 있는 최고의 기적이 과연 무엇인지 질문하며 마무리 됐다. 그러나 백여년 후 헬머는 한국의 페르소나 진규가 되어서 대학로의 한가운데서 아예 노라가 자신의 집을 떠났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한다. 2018년 <노라이즘>은 노라의 남편 진규가 ‘여러분이 보신 노라의 변화는 진짜가 아니며, 그의 가출도 사실이 아님을 알려드린다’고 대국민 발표로 목소리를 높이며 시작한다. 찌는 듯한 더위에 지하의 연극무대를 찾은 관객들은 헬머가 찾던 그 기적은 여전히 오지 않았고, 무언가 더 기만적인 상황임을 감지하며 무대로 빨려들어갔다.

한국의 노라

‘지금-여기’ 한국의 노라는 자기의 동의없이 남편의 신청만으로 TV <리얼 와이프 서바이벌>에서 자신의 일상을 낱낱이 노출하고 평가받고 있다. 이는 여성의 몸과 사생활을 불법으로 촬영하고 유통하는 거대한 마켓이 존재하는 것까지 밝혀낸 최근의 ‘디지털 성범죄’ 이슈를 떠올리게 한다. 이처럼 새로 재창출된 노라 이야기는 몇몇 주요 설정들이 의도적으로 한국적 상황과 시대적 맥락으로 세심하게 변용됐다. 

그중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는 <인형의 집>에서 부부 사이의 위기와 갈등의 원인이었던 차용증이 낙태증명서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는 최근 맹렬하게 전개 중인 ‘임신중단 합법화’ 투쟁에서 가지고 온 듯하다. 한국에서 노라는 이미 아이 둘에 독박육아를 하고 있음에도, 남계(男系) 친족구조를 지탱하기 위해 아들을 출산해야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 자체가 클라이맥스였던 “임신이 이렇게 아프고 고통스러운 건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잖아”라는 노라의 절규는 재생산을 비롯해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여전히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절절히 폭로했다. 최근 남성의 얼굴로 대표되는 청년 문제가 연애, 결혼, 출산을 하지 못한다는 의미가 되고, 이에 고학력 여성들이 하향결혼을 할 수 있게 해야한다는 정책이 무려 저출산의 해결책으로 제안됐던 사례를 곱씹게 한다. 지금은 1인 가구가 증가하고 비혼이 새로운 삶의 형식으로 제안되는 시대다. 그런데도 정부는 ‘인구절벽’을 운운하는 등 국가의 성장동력을 멈추게 하리라는 위기만을 감지한다. 이때 가부장적 이성애 가족을 변화시키고자 한계 속에서도 진전됐던 여성들의 실천들은 보이지 않게 된다.

<노라이즘> 극에서 도드라졌던 것은 천진난만 했던 노라의 얼굴이 비밀을 가진 여성의 모습으로 바뀌고, 남편을 향한 연기된 응석이 점차 단호한 태도로 변하는 과정이었다. 새삼 2015년 메르스 정국에서 메갈리안이 등장하고,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넷에서 광장으로 수많은 여성들이 등장했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2017년 #예술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등 온라인에서부터 터져나왔던 당사자들의 목소리는 2018년 세계적인 미투 운동과 결합하며 전사회적으로 정의를 촉구하는 물결이 됐다.

친구와 함께 각성하는 노라

<노라이즘>은 이러한 페미니즘 리부트 혹은 대중화 시대에 부응하려는 의욕이 충만했다. 노라가 진짜 현모양처로 인정되면 3억을 받고, 방해꾼이 그를 저지하는데 성공하면 1억을 받는다는 설정이다. 이때 노라의 조력자 린데 부인은 그를 현모양처라는 미몽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해꾼 영주로 바뀌었다. 원작의 린데 부인은 노라와 달리 남편이 죽은 뒤 닥치는 대로 일을 해왔던 여성이었다. 이와 달리, <노라이즘>에서 노라의 오랜 친구 영주는 노라처럼 결혼을 했지만 이제 막 이혼을 하고 구직을 하는 참이었다. 

ⓒ극단 불한당

이렇게 또래 여성의 친밀함을 강조한 설정은 노라를 일깨우는 역할을 동세대 영주에게 담당하게 하기 위해서다. 인형의 집을 상징하는 듯한 무대를 가득 채운 네모난 식탁의 정렬을 흐트러트리며 노라가 그 식탁 위에 앉아 맥주를 마시게 하는 것도 영주고, 마지막에 무대를 구획짓는 철제 프레임을 마구 두드리며 “아내와 어머니이기 이전에 인간이다”를 외치는 것도 영주다. 여성이 친구의 부름에 응답하여 각성하고, 무대 위의 노라가 그랬듯 스스로 자기가 매일 정리했던 사각 박스를 도미노처럼 단번에 무너뜨리게 하는 것이 이 연극의 메시지다.

그러나 입센의 원작 <인형의 집>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차용증이 낙태증명서가 되는 전환에서 남편으로 대표되는 근대 자본주의 체제의 위선이 희미해지는데 아쉬움을 느낄 수도 있다. 그리고 린데 부인의 현재적 캐릭터인 영주를 제외한 남성 캐릭터, 즉 남편 헬머와 고리 대금업자 크로그스타, 주치의 랑크 선생이 극 중에서 차지하는 역할의 중요성이 현격히 떨어져 보일 수도 있다. 또한 노라가 헬머와 결별하여 인형의 집을 나오는 동안, 린데 부인은 크로그스타와 결합하여 다시 인형의 집으로 들어가는 아이러니도 삭제되었다. 

고전의 아우라를 최대한 활용하면서도 불법촬영과 낙태죄 폐지, 그리고 여성연대라는 ‘지금-여기’의 뜨거운 이슈를 하나 빼놓지 않고 매끄럽게 다룬 솜씨는 놀랍도록 인상적이다. 다만 여성 억압을 단지 ‘집안의 천사’로만 귀속시킬 때, 최근 한국의 IMF 경제 위기 때 가정을 실제로 지탱했던 여성노동, 그리고 가정 밖에서 자기 삶을 꾸릴 수밖에 없었던 여성 청년들의 이야기는 초점에서 벗어난다. 사실 여성이 남성의 사랑을 받는 것만으로 경제적 조건을 포함해 괜찮은 삶이 꾸려질 수 있었던 순간은 역사적으로 거의 불가능했다. 오랫동안 여성들은 린데 부인처럼 가정을 책임져야했거나 혹은 노라처럼 가외노동을 감수해야만 했었다. 그렇게 본다면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패널들이 하는 대사들은 지나치게 “여자가 어디!”만을 강조해서, 오히려 여성들이 역사 속에서 보였던 행위성을 짐작하지 못하게 한다. 여성해방의 물결이 도도하게 등장했다가 다시 백래시를 맞기도 하는 등 매번 달라지는 각 시대의 역동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떤 억압들은 지나치게 완강하고, 어떤 문제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지난 몇 년간 논의가 분분했던 여성혐오는 단지 신자유주의 시대에 여성이 각성하고 능력을 계발해서‘기울어진 운동장’ 문제가 해결될 것이 아니다. 그보다 근원적인 언어와 구조에 이르까지 만연한 성차별이 문제다. 그렇다고 했을 때, 어머니와 아내라는 역할에 여성의 쓸모를 배타적으로 할당하고, 그의 노동을 비가시화하는 것에 대한 대대적인 거부로서 인형의 집을 박차고 나가는 노라가 상징적으로 가지는 의미는 여전하다. 

이제 인형의 집은 어떻게 될까. 사실 이미 그곳에 노라는 없다. 이 시대의 노라의 후예들은 넷과 광장을 넘나들며 호전적으로 비혼, 비출산, 노연애, 노섹스를 외친다. 진규처럼 노라의 새 출발을 부인하기만 할 때, 파국은 더 빨리 도래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그것은 오히려 지옥, 즉 헬조선의 끝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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