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묘한 중첩이다. 폭염이 이리도 길게 갈 줄 몰랐던 7월 말, 더위를 뚫고 <이방연애>를 보기 위해 대학로의 ‘달빛극장’이라는 곳을 찾아갔다. 입구부터 뭔가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아담한 극장 안을 들어가자마자 '아... 여기..' 하면서 하나의 기억과 장소가 철컥 연결되었다. 단번에 차기 대선주자에서 성범죄자로 추락한, 8월 중순 사법부의 무죄판결로 일파만파 사법적 판결에 동의하지 못하는 새로운 물결을 만들고 있는 그 당사자가 한 시사평론가와 팬들을 모아놓고 작년 1월 말 바로 이곳에서 토크쇼를 진행한 적이 있다. 공연이 아닌 정치 토크쇼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 것이 드문 일이어서였을까. 100여개가 되는 극장이 곳곳에 숨어 있는 대학로 골목들 속을 혼자 찾아가면서 불안과 설레임으로 발을 떼던 순간이 기억난다. 지금의 상황과 겹쳐서 당혹스럽고, 무겁고, 씁쓸하다.
그 때 극장 안과 밖을 메웠던 한 정치인에 대한 기대는 온데간데 없다. 한 켠에 벽처럼 위장을 하고 있는 듯한 극장의 문을 여니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마치 데코 폴리처럼 종이접기 기법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입체적 장식물이다. 무대 뒤쪽에 놓여 있는 이 장식물은 공룡의 입상처럼 형태를 알아 볼 수 있는 것과 기하학적인 건축구조를 가진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른 장식물과 묘한 이질감을 만들어내면서 강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무대의 앞에는 마른 나뭇가지가 꽂힌 키가 큰 화분이 있고, 오른쪽에는 3개의 낮은 의자, 찻잔과 이런 저런 집기가 놓여 있는 좌탁이 놓여있다. 어슴프레한 조명에 적응이 되고 나서 보니 이 곳은 누군가의 방이다.
소문 없는 퀴어 여성 예술가의 이야기
무대는 '노아'로 불리는 프리랜서 연극 기획자가 만들고 부른 ‘살아서 걷는 나무’로 잔잔하게 시작된다. 무반주로 부르는 이 노래는 맑은 음색과 깊이 있는 정서로 차분히 가라앉은 오프닝을 만든다. ‘퀴어 여성 예술가’로 각자를 소개한 세 명의 기푸름, 라소영, 이세영 배우들은 모두 연출가 ‘소문’에게 연락을 받고 여기 모였다(실제 연출은 김문경이다). 서울, 여성, 주거 문제로 연극을 만들자고 했던 연출자 ‘소문’은 그야말로 소문처럼 배우들 말에서만 언급될 뿐 무대에 등장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나타나기를 마루면서 이 작품을 끌어간다. 무대 위의 배우들은 ‘소문 없이’ 직접 연극을 어떻게 만들어 나갈지 이야기하고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창작집단 3355의 <이방연애Alien Romance>는 실제 배우의 삶을 작품 안으로 갖고 들어오는 다큐멘터리 연극 형식에 가깝다. 작품은 배우의 경험담과 별도로 수합된 퀴어 여성들의 생활에 근거한다. 작년 프린지 페스티벌 때 1인극이었던 것을 확장하여 3인극으로 만들었기에 이야기는 더 풍부해지고 공감의 밀도는 더 높아졌다. 다큐멘터리의 장점을 따라 그들이 하는 이야기는 생생한 체험이기 때문에 별 이질감 없이 모두 귀에 쏙쏙 들어온다.
악명 높은 헬조선의 2030이 대부분 그렇듯, 세 명의 퀴어 예술가 역시 자신이 하고 싶은 연극 배우와 기획 일을 위해 제빵, 스피닝 강사, 프리랜서 기획으로 시간을 쪼개서 살고 있다. 그들의 일은 불안정하고, 시간을 아껴야 하기 때문에 강도 높은 노동을 맞닥뜨리게 된다. 덕분에 연극을 하기 위해 돈을 벌려던 일 때문에 오히려 건강이 나빠져 많은 병원비를 지출을 해야 하거나, '자신언어'를 잊고 '행정언어'에 길들여지게 만들어 결국 연극에 집중하지 못하게 되는 모순에 처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퀴어로서 그들이 하나 더 짊어진 부담은, 다들 그들의 연애를 궁금해 한다는 것이다. 남자친구가 있냐고 너무 당연히 묻는다든지, 사진을 보여 달라고 강요한다든지 하는 풍습이 그들을 늘 불편하게 만든다.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연애와 방의 이야기로 옮겨 간다. 누구는 방황 끝에 맞는 짝을 찾아 결혼을 했고, 누구는 연애 중이며, 누구는 솔로지만, 방을 구하는 문제에서는 별다르지 않다. 다른 2030이 겪는 주거빈곤 상황에 그들은 경제적으로 한 발 더 불리하다. 이야기는 그들의 상황에 촘촘히 다가간다. 성별에 따른 임금격차로 인해 동성 결혼을 한 퀴어-여성-부부가 함께 살 때 임금격차는 상대적으로 더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증명된다. 이들의 삶은 중첩되는 문제들의 가장자리 중의 가장자리에 있다.
3분의 이 방, 3분의 이방(異邦)
세 명의 예술가들이 3분이라는 제한 시간 안에 자신이 살았던 방들을 소개하는 코너가 있다. 물론 그들의 이야기가 3분 안에 담길 리는 만무하다. 매정한 3분에서 밀려 나지 않으려고 속도를 내거나 버텨 보는 모습이 프레젠테이션하는 형식으로 게임처럼 진행된다. 배우들이 프레젠테이션 을하기 위해 그린 그림처럼, 관객 역시 공연장에 들어가면 한 장의 종이를 받고 거기에 자신의 방을 그리고, 자신의 연애와 방의 느낌을 한 단어로 적어 내야 한다. 이 과정 때문에 관객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경험에 배우의 경험을 얹어 깊이 공감하며 그들의 프레젠테이션을 보게 된다. 물론 관객의 것도 나중에 한 장씩 스크린에서 볼 수 있다.
배우들의 프레젠테이션은 '500/15(보증금 500만원, 월세 15만원)'에서 '500/20(보증금 500만원, 월세 20만원)'으로 건너가는 과정, 연애하는 사람에 따라 방이 달라지는 경험, 예배당 옆방에서 고양이 세 마리와 목련 그림자가 일렁이는 방으로 건너가는 과정, 그리고 마음을 여는 상대와 만난 뒤 드디어 주거도 마음도 안정된 이야기를 보여주고, 원가족으로부터의 독립 후 맞닥뜨리는 주거에 대한 대안으로 공동주택 이야기도 덧붙인다.
매직으로 써내려가는 각 장의 제목 중 ‘나의 각성’ 장에서는 각자의 각성 경험에 관해 이야기한다. <바람의 화원>을 보고 동성애를 연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찾고, <헤드윅>을 통해 배우가 되겠다고 결심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오리진 오브 러브> 을 부르기도 하고, 애니메이션 <스티븐 유니버스>를 통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동시에 퓨전으로서 하나의 더 큰 존재로 나아가는 것에 마음을 뺏겼던 순간이 드러난다.
퀴어로서 자의식 얘기는 어느덧 퀴어이기에 겪어야 하는 이야기로 옮겨 간다. 이성애 신혼부부에게 초점을 맞춘 제도의 혜택에서 제외되고, 애인을 친구라고 이야기해야 하는 상황 등 소수자로서의 어려움이 논의된다. 이 방이기도 하고 이방(異邦)이기도 한 ‘다른 나라’에서 그들은 “세상이 하나의 집이라고 생각하고 사람들은 방에 들어가지만, 자신들은 방이 아니라 방과 방 사이 문지방에 누워 있는 기분”이라는 고백을 한다. 이 멘트는 마지막에도 몇 번 반복되면서 구획되지 못하는 존재의 자기인식으로 선명한 자취를 남긴다.
자신의 언어를 찾아서
여성 퀴어의 실생활을 이방(異邦)과 이 방 문제를 연결해서 균등 잘 혼합시킨 <이방연애>는 여성 퀴어 예술가의 삶을 소소하고 따뜻하게 극장공간으로 갖고 오는데 성공했다. 그들 삶의 실제를 부각시키는 다큐멘터리의 힘은, 세 명의 배우가 현실과 연극의 경계 사이를 부담없이 넘어 다니며 자신을 구성하도록 한다. 마지막에는 무수한 이야기와 더불어 “살아서 걷는 나무”, “방과 방 사이 문지방” 등 자신의 언어를 건져 올린다.
이 작품은 기존의 양분적 젠더 담론을 의심하면서 범주화 되어 있지 않은 자신을 좀 더 정확히 있는 대로 드러내고자 한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다시 구조화하는 방식은 방과 연애, 퀴어로서 각성의 순간, 다양한 연령대의 퀴어들이 보내온 편지 택배 등이다. 이런 독창적인 방식은 고정관념을 재생산하지 않으면서도 퀴어 여성 예술가의 자리를 ‘현실을 배경으로’ 좌표화하는데 기여했다다. 그 결과 무대 위 존재들은 극적 과장 없이도 생생하게 살아나 현실적 인물로 관객의 마음에 담겼다.
쥬디스 버틀러의 수행성 이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주체가 있고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어떤 행위를 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로 매번 새롭게 구성될 뿐이다. 여성 중심의 연극이 더 생생해지기 위해서는 고정된 관념을 뒤집고, 드러나지 않은 여성의 욕망을 담아내는 일을 반복적으로 수행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에 연극은, 춤은, 공연예술은 얼마나 적합한가. 수행성(performativity)에 의미를 두면서 그것을 즉시 관객과 함께 새롭게 경험할 수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