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그 사람들은 타고나는 거야, 선택하는 거야?
성소수자성의 생득과 선택을 둘러싼 질문은 성소수자와 관련한 기초 특강의 질의 응답 시간에도, 개인적인 자리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물음 중 하나다. 어쩌면 이 질문은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성소수자 혐오를 정당화하고자 하는 반퀴어 혐오 집단에게는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반퀴어 혐오 집단에 ‘이론적 논리’를 제공하는 길원평 부산대 물리학과 교수는 공저자로 참여한 <동성애 과연 타고나는 것일까>의 서문에서 동성애가 타고나는 것이라면 그들을 고칠 수 없고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선택이라면 고칠 수 있고 바꿀 수 있다는 요지의 주장을 하며, 책 전반에 걸쳐 동성애(성소수자)가 생득이 아니라 선택임을 증명하고자 한다. 길원평 뿐만 아니라 반퀴어 혐오 집단에게 있어 성소수자는 생득이 아니라 선택이라고 논증하는 일은 ‘동성애를 정당하게 혐오할 수 있는 논리'의 핵심이다.
성역할은 타고나는가,
구성되는가?
흥미롭게도 성소수자는 생득인가 선택인가라는 질문은 페미니즘의 오랜 논쟁거리인 성역할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가, 양육과 환경으로 구성되는가와 유사한 논증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여성다움, 남성다움이 사회적 환경, 분위기, 양육으로 구성된다는 주장은 그전까지 ‘여성은 원래 가사노동에 적합하게 태어났고 남성은 가사노동을 못 하게 태어났다’는 성차별 논리를 문제 삼으며 등장했다. 가부장제가 여성을 억압하는논리 중 하나가 ‘원래 그렇게 태어났다’이며 이 주장은 지금도 성폭력 사건에서 가해자 남성을 정당화할 때 반복된다(“남자는 원래 폭력적이다”, “남성은 원래 성욕을 못 참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건 풀어줘야 한다”).
그래서 페미니스트들은 성역할이 양육을 통해 구성된다는 주장을 통해 가부장제를 종식시키고자 했다. 성역할 생득설을 비판하며 페미니즘이 등장하고 성역할이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다는 점이 중요한 사회적 논의로 부상하자, 이에 반발하는 새로운 생득설이 등장했다. 페미니즘 이전의 선천설이 ‘원래 그렇다’는 식이라면, 이후의 선천설은 사회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남성은 공적 노동에 적합하도록, 여성은 가사 노동과 아동 양육에 적합하도록 "진화"했다는 논리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다.
페미니즘의 생득과 양육 사이의 논쟁은 성소수자 진영의 생득과 선택 사이의 논쟁과 비슷하지만 차이점도 분명 존재한다. 그것은 성소수자 운동이 시작되던 초기, ‘우리는 원래 이렇게 태어났다’는 논리를 적극 사용했고 성소수자를 하나의 민족 집단처럼 본질화했던 역사가 있다는 점이다. 1980년대 후반 미국에서 성소수자를 구타했던 가해자가 재판에 회부되자 재판장이 ‘지금은 성소수자를 때리는 것이 문제가 되는가?’라고 반응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원래 이렇게 태어났고 천부인권에 따라 우리도 역시 존엄을 갖춘 인간이라는 주장은 당대 상황에서 매우 중요한 전략이었다. 하지만 이 전략이 여전히 유효할까?
'나는 그냥 이렇게 태어났다'의 유효함
반퀴어 혐오 집단은 퀴어문화축제와 같은 성소수자 관련 행사가 열리면 어김없이 동성애 유전자가 없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는 내용의 피켓을 전시한다. 성소수자가 타고났음을 증명할 유전적 차원의 과학적 증거가 없기에 성소수자는 타고나지 않았고, 그들은 성중독에 빠져 잘못된 선택을 한 존재라는 것이 피켓이 담고 있는 주장이다. 이 피켓에 오늘날의 성소수자 운동, 퀴어 운동은 시큰둥하게 반응한다. 물론 얼마 전까지만 해도 퀴어 운동에서 ‘우리는 원래 이렇게 태어났다’는 발언이 빈번하게 등장했지만 지금은 이런 발언이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현재 시점에서 ‘나는 원래 이렇게 태어났다’라는 발언이 의미를 갖는다면 그것은 부모에게 자신을 설명할 때다. 더 정확하게, 주 아동 양육자로 여기는 ‘어머니’를 향한 사회적 비난을 차단하기 위한 용도다. 임신 과정이나 양육 과정에서 어머니가 술을 마시면, 담배를 피면, 클래식 음악이 아니라 락 음악을 들으면, 스트레스를 받으면, 직장 생활을 계속하면, 나쁜 생각을 하면, 비늘 없는 생선을 먹으면, 초콜릿을 먹으면, 감기약을 먹으면… 이러쿵 저러쿵하면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고 그 결과 아이가 성소수자가 된 것이다, 장애인이 된 것이다, 범죄인이 된 것이라는 식의 말은 차고 넘친다. 퀴어가 부모에게 커밍아웃을 하면 부모, 특히 어머니는 종종 내가 너를 임신했을 때, 혹은 양육할 때 무엇을 잘못해서 네가 이렇게 되었냐는 반응을 보인다. 바로 이런 반응에, 어머니의 잘못이 아니고 그 모든 것과 상관없이 ‘나는 그냥 이렇게 태어났다’고 말할 때 생득의 논리가 의미 있다. 다른 상황에서 생득의 논리는 별 의미가 없다.
사실은 질문이 잘못됐다
결국 선택 아니면 생득이라는 질문 구조 자체가 문제다. 반퀴어 혐오 집단의 생득 논리에서 인간은 당연히 이성애자로 태어나기에 성소수자는 생득일 수 없다. 성소수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선택했고 그렇기에 원래의 이성애자-비트랜스로 고치고 바꿀 수 있으며, 동시에 네가 선택했으니 성소수자를 향한 사회적 차별도 네가 선택한 것이고 네가 감당할 문제라는 논리가 가능해진다. 즉 모든 사람을 이성애-비트랜스로 가정하고 이성애규범적 사회 구조를 자연스러운 질서로 규정한 상태에서 ‘너는 타고났니 선택했니’라고 질문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페미니즘의 성역할 양육 vs 생득 논쟁은 성소수자 선택 vs 생득 논쟁과 긴밀하게 교차한다. 우리가 타고났는지 선택했는지가 도대체 왜 그렇게 중요한가? 타고 나면 어떻고 선택했으면 또 어떠한가. 선택했으면 혹은 타고났으면 차별과 억압을 감내해야 한다는 발상이 설득력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심각한 문제 아닌가?
생득 vs. 양육/선택과 같은 양자택일의 질문 구조가 갖는 문제는 차별과 억압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이성애규범성, 이성애중심주의, 즉 모든 사람은 남성 아니면 여성으로만 태어나고 이성애자여야 하며, 그렇기에 여성은 여성스럽고 남성은 남성스럽고 둘의 음양 조화가 잘 이루어진 사회가 좋은 사회라는 억압 논리가 은폐된다는 점에 있다. 차별 기제를 은폐하고 억압 구조를 자연화하는 질문은 타인을 향한 혐오를 순수한 호기심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나의 삶을 불가능하게 한다. 퀴어 페미니즘에서 질문을 다시 질문하고, 질문에 내재한 차별 구조를 살피는 작업을 중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