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9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남북의 모든 군사적 적대행위를 끝내기로 합의했다. 청와대는 ‘사실상의 종전’이라고 덧붙였다. 평화의 기쁨으로 공론장이 들썩이는 이번 방북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문재인 대통령 일행이 평양에 도착했을 때, 기다리고 있던 빨간색, 노란색, 분홍색 한복을 입은 환영인파였다. 다소 촌스러울 만큼 원색에 가까운 북한의 한복은 남한 사람들의 향수를 자극했다. 과거 남한에서도 ‘귀한 손님’이 올 때마다 한복을 입은 여성들이 공항에, 도로에 늘어서곤 했다. 하나의 민족이라는 감각이 한복을 통해서 재현된 것이다.
평양 공항에 한복을 입은 여성들이 늘어섰던 같은 때, 한국계 미국인인 배우 산드라 오의 어머니가 한복을 입고 에미상 레드카펫에 올랐다. 산드라 오는 아시아계 여성으로는 최초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이를 뒷받침한 것이 그녀의 어머니가 선택한 붉은색 한복이다. ‘드디어 한국이 미국에 도착했다’는 한 한국계 미국인의 말처럼, 여기서도 한복 입은 여성은 민족을 상징하는 기표로 작동했다.
한복을 입은 '여성'
이처럼 여성들은 공식 석상에서 한복을 통해 한국인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김정숙 여사도 부부 동반으로 공연을 관람할 때, 한복을 입고 나타났다. 한복을 입은 여성은 평양의 공항에서, 미국의 레드카펫에서 한국적인 것을 재현했다. 이때 한복을 통해 민족적 기호를 수행하는 것은 언제나 여성이라는 점을 생각해보자. 산드라 오의 아버지나 문재인 대통령은 양복을 입었다. 공식 석상에서 한복을 입는 것은 산드라오의 어머니나 김정숙 여사처럼 주로 나이든 여성, 흔히 ‘어머니’라 불리는 여성들이 많다. 이산가족 상봉에서도 늘 할머니들은 한복을 차려 입으신다. 할아버지들은 한복을 입지 않는다. 이는 한복을 입은 어머니처럼 민족적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한복은 언제나 적제적소에서 정치적인 역할을 수행해왔다. 이 한복을 입은 어머니와 대칭을 이루는 것이 아버지와 아들이다.
지난 남북정상회담 당시 한국의 인터넷에서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을 아버지와 아들처럼 묘사하는 이미지들이 큰 인기를 끌었다. 다정한 아버지와 아들의 한때를 연상시키는 산책 장면이나 서로 끌어안는 장면 등은 팬아트로 연결되기도 했다. 이처럼 남북한 정상을 가족화하는 상상력은 국가를 가족에 빗대어 설명해왔던 오랜 전통에서 발원한다. 헤어진 아버지와 아들이 만나 서로 화해하고 다시 왕래하기로 선언하는 장면은, 아버지 역의 남한과 아들 역의 북한이라는 역할을 통해 완성된다. 경제적으로 북한을 압도하는 남한은 이제 한반도의 가부장으로서 거듭날 수 있게 되었고, 눈물의 화해는 남북한의 지난 70년의 서사를 멜로드라마로 승화시킨다. 이 과정에서 여성들은 돌봄과 모성을 재현하는 역할을 맡는다. 리설주 여사와 김정숙 여사의 ‘퍼스트레이디 외교’ 역시 가족적 모먼트를 연출한다. 이들은 아동병원, 음악회, 영재교육원 등을 찾아 어린이를 비롯한 젊은 세대와 만난다. 남성 정치인들이 회담을 할 동안 여성들은 병원이나 사회복지시설 등 돌봄이 필요한 곳을 찾는다. 이렇게 남북한의 정상은 하나의 가족적 이미지를 연출한다.
대통령 아버지,
영부인 어머니
국가를 어버이로 상상하는 젠더화된 국가 질서에서 대통령은 아버지, 영부인은 어머니가 된다. 문재인 대통령의 첫 출근 장면이 남편을 배웅하는 아내를 후경화하면서 등장한 것은 이러한 ‘정상가족’이 회복될 것임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부부는 행복한 가족 이미지를 통해 많은 인기를 끌었다. 선거 당시 유력한 대선주자의 아내였던 김정숙 여사는 정기적으로 광주를 찾아 보육시설을 방문하여 아이들에게 간식을 만들어주고 ‘동네 목욕탕’을 찾아 지역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이는 ‘낮은 곳에 임하시는’ 영부인 정치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행동은 가장 ‘정치적인’ 행위로 읽힌다. 정치 영역에 있는 여성들에게 ‘돌봄’, ‘애민’이란 공식 회의에 참석하는 것보다 더 정치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지난 선거에서 심상정 후보조차 남편과 아들을 등장시켜, 자신이 좋은 어머니임을 어필했던 것을 기억해보자. ‘여성’과 ‘정치’는 늘 모성을 경유해왔다.
그 결과 공화국의 아버지는 ‘정치적인 일’을 하고, 공화국의 여성들은 ‘탈정치적인 일’을 한다는 구도는 흔들리지 않는다. 가족화된 방식의 ‘여성’ ‘정치’는 젠더화된 정치 질서를 공고히 하며, 차별금지법이나 성평등정책 등의 젠더 이슈들을 편의적으로 탈착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래서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가족화되지 않은 정치적 상상력이다. 저출산대책도, 주택정책도, 복지정책도, 가족을 탈구축하고 공동체를 재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국가와 국민의 관계 역시 대통령의 ‘애민’에 기대지 않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