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관련 보도 사진 중 가장 동물적인 순간은 무엇일까? 국회선진화법이 제정된 이후 과거의 풍경이 되어버린 몸싸움부터 이야기해 보자. 국회 몸싸움은 얼핏 보기에는 대단히 동물적이지만 사실 절차와 과정이 있는, 일종의 전쟁이다. 전쟁은 모름지기 인간의 일인 법. 공격과 방어로 갈라져 전술을 구상하고 총력을 다해 법안 발의를 다하는 것은 동물적이기보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일이다. 국회에서의 몸싸움은 한창일 때 언론의 주목을 받기 위하여 불필요한 돌발행동을 하는 정치인이 있을 정도로, 대단히 문명에 기반한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진정 동물적인 순간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고 정치는 인간이 하는 일이라는 이야기를 전제로 깔고 이야기해 보자면, 진정 동물적인 순간은 정치인들이 마주쳤을 때다. 만나서 인사를 나누고 악수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이나 동영상에서 유권자는 그들의 관계를 추론할 수 있다. 서로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누구의 영향력이 더 큰지, 둘 중 누구에게 더 편한 순간인지 등등. 정치인도 사람이기 때문에 제스처에 묻어나 버린다. 정치가 인간이 하는 일이지만 않았어도 모를 수 있었겠지만 인간이 하는 일에 그것이 안 드러날 수는 없다. 찰나의 순간에 진실의 편린이 살짝 흩뿌려질 때, 유권자는 그 사진에서 서사를 읽어내는 것이다.
심상정은 그 점에서 각별한 정치인이다. 심상정의 보도 사진을 보고 있다 보면 심상정이 군소 정당의 정치인이라는 걸 잠시 까먹게 된다.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노동운동가 출신으로 한평생 진보 정당에서만 정치를 해 왔다. 진보 정치의 간판 스타, 다시 말해 가난한 집 맏이라는 뜻이다. 인지도가 떨어지고 당세가 약하다 보니 국회 내부에서는 비교섭단체의 설움을 딛고 일을 해야 한다.
교섭단체와 비교섭단체란 무엇인가? 국회 교섭단체란 국회 운영에 관한 논의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며 타이틀이다. 20석 이상 의원을 둔 정당이어야 국회 교섭단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교섭단체가 되고 나면 우선 정당에 국고 보조금이 풍요롭게 나온다. 돈이 있어야 정당이 지향하는 가치를 세상에 펼치기 위한 기반을 만들 수 있다. 모든 활동의 기반인 자원이 생기는 것은 물론이요 국회의원 의정 활동의 주된 업무인 상임위원회를 구성하는 논의에 참여할 수 있다. 하물며 언제 국회를 어떻게 열 것인지부터 본회의나 대정부질문 순서와 발언 시간까지 정할 수 있다. 교섭단체 대표는 국회에서 40분짜리 ‘연설’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왕왕 주어지지만 비교섭단체 대표는 15분짜리 ‘발언’을 할 수만 있다. 의원이 된 것으로 천하를 다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국회 안에도 차별은 존재한다.
좌절하지 않는 사람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통합진보당, 진보정의당, 정의당에 이르기까지 심상정은 단 한 번도 교섭단체에 있어 본 적이 없다. 이는 1996년 노동법 날치기 개악에 영향을 받아 의회에 들어가야겠다는 각오로 세워진 1997년 건설국민승리21에서 1999년 민주노동당으로 이어지는 진보 정당의 정치인들이 연이어 겪어 왔던 설움이다. 교섭단체 진입장벽이 유난히 높은 대한민국에서, 양당제 구조를 무너뜨리자던 진보정당 20년 약자의 역사는 원내에서도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심상정은 제도적 한계에도 무너지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그 점이 심상정을 각별하게 만든다. 심상정은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좌절은 곧 그가 상징하는 인물이 목소리를 잃는 것이다. 정치인 심상정의 반석이다. 그는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영유아를 자기 5촌 조카처럼 보이게 할 정도로 친근한 인상을 지녔지만 동시에 한때 20만 금속노조 조합원의 투쟁을 이끄는 금속노조 쟁의국장이었다. 반쯤 농담 삼아 인민무력부장이었다. 그런 심상정이 보스형 남성 정치인들과 만나서 악수하는 모습은, 심상정이 속한 당의 위세를 잠시 잊게 만들 정도로 강인하고 여유롭다.
누가 보스 타입인지 아닌지 어떻게 구분할까? 인간 보스 리트머스지 김무성과 만난 사진을 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요즘은 여러 모로 정치적 소외 계층의 길을 걷고 있지만 그래도 한때는 ‘무성 대장’이라 불리던 상도동 막내 김무성은 전형적인 보스 기질의 한국 남성 정치인이다. 그는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서열을 은연중에 확인하려 한다. 다. YS 옆에 '어깨'가 있는 줄 착각하게 만들었던 커다란 덩치에다 특유의 위압적인 태도까지 더해져 툭하면 오만불손하다는 평을 듣는 김무성이다. 그 박근혜와도 ‘아씨와 머슴’이 아닌 ‘왕자와 공주’ 같은 동지적 관계를 이끌고자 했기에 친박 실세에서 밀려났다고 하지 않았는가.
심상정은 그 김무성과 함께 있을 때도 편안해 보인다. 다시 말하자면 김무성마저도 심상정과 함께 사진에 찍힐 때면 덜 유해해 보인다! 분명히 김무성인데도, 누가 위고 누가 아래인지 확인하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바로 '서열질'을 무효화하는 심상정 매직이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강하든지간에, 나 또한 노동자와 여성과 사회적 약자의 대표고 너는 나를 존중해야 한다고 인생을 바쳐 주장해 온 여자의 태도다.
비록 김무성이 '김무성이기에' 심상정에 대해 "아줌마 같은 푸근한 인상을 가진 분인데 정의감이 강하다" 라고 평할지언정 그렇다. 김무성이 여성을 대하는 태도는 참으로 "김무성"이다. 여성 공천 30%를 보장해 달라 '요청'하는 모 여성 단체 대표나 같은 정당의 여성 의원들을 대하는 태도에 비하면 김무성이 심상정과 함께 하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위압하지 않는다. 존중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싸우는 여자, 심상정
심상정은 이런 일화가 수도 없이 따라다닌다. 심상정 초선 시절 재경위원장이었던 김무성은 심상정의 요구 사항을 전부 수용하여 민주노동당 비례 초선이던 심상정의 별명이 한때 재경위 부위원장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당시 재경위 소속이었던 유승민 역시 심상정에 대한 존경을 숨기지 않는다. 국회 칭찬 릴레이 영상이 대표적이다. 칭찬하고자 하는 의원으로 심상정을 꼽으며, 재경위 시절 질의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진보에 저런 사람이 있다니 참으로 다행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심상정은 그 동영상이 시작할 때 피식 웃으며 "되게 부끄러워하는데?"라고 촌평한다. 그 존경에 대해서는 노동운동의 상징인 특유의 팔뚝질을 선보이며, "이거만 잘하는 줄 알았다가 질의를 잘하니까 놀란 거죠." 라고 말한다. 한 방 먹이는 일쯤이야 예사롭다. 그렇게 한 방 먹은 사람들이 열두 광주리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테니까. 사퇴할 거냐고 섣불리 찔러 보았다가 곧바로 질문을 취소하겠다고 말한 손석희처럼 말이다.
하다못해 이명박 전 대통령도 심상정 매직을 피해 갈 수 없었다. 그는 대통령 당선인이 되자마자 당시 민주노동당 비대위원장이었던 심상정을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당시 이명박 당선인은 여성가족부와 보건복지부의 통폐합을 추진하고 있었다. 반면 심상정의 17대 국회 의정 활동은 대단히 여성주의적이었다. 성인지예산안은 물론이요 각종 여성 정책을 전면으로 내세웠다. 심상정은 당 내 여성세력화를 위해 분투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당시 민주노동당 여성 당원들에게 여성주의를 내세우면 득표에 불이익을 받지 않겠느냐는 고언을 듣고도 "또" 여성주의자 선언을 했던 심상정이 건넨 말은 옮길 가치가 있다. 대선 레이스에 오른 유승민이 여성부 폐지를 내건 요즘 같은 시국이면 더더욱 그렇다. 이 지면을 빌어 소개한다.
힘 있는 부처는 힘을 더 막강하게 해주고, 사회적 약자를 다루는 부서는 힘을 줄이는 '강익강 약익약'을 걱정하는 이들을 만났다.
여성이기 때문에 우선 섭섭했다.
여성이 대접받는 사회야말로 진정한 선진사회이고, 여성의 권리와 사회적 역할의 강화는 대한민국 미래를 위해서도 중요하다.
여성부는 폐지가 아니라 확대돼야 한다.
(부처) 폐지로 간 것은 시대적 흐름에도 역행한다.
대다수 여성이 '차기 정부가 여성을 포기하는 것 아니냐'는 오해가 있을 수 있다.
- 2008년 1월 17일 '오마이뉴스'
당시 비례 초선이던 심상정의 맹렬한 비판에, 대한민국에서 가장 밥을 복스럽게 먹는 사나이는 "(대통령 선거에서) 여성표를 많이 받아서 당선됐다"며 회피했다. 이렇듯 비교섭단체의 비례 초선이 대통령 당선인에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심상정을 심상정으로 만든다.
심상정은 한국 남자들에게 싸우는 여자가 무엇인지 각인시키는 인물이다. 싸우는 여자는 결코 만만하지 않고 함부로 업신여길 수 없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게 해준다. 심상정은 무성적인 존재로서 '겨우' 동급 인정을 받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 여자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야 마는 사람이다. 여자는 인간이고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삶을 걸어 싸워 왔다.
심상정의 삶에서 "노동운동"과 "여성운동" 은 분리되지 않는다. 애초에 심상정이 주도했던, 한국 전쟁 이후 최초의 정치파업인 구로동맹파업 역시 여성 노동자들이 해낸 것이다. 심상정은 그렇게 싸우는 자리마다 가고 싸우는 여자와 연대한다. 참여정부 시절부터 지금까지 싸우고 있는 '지상의 스튜어디스' KTX 승무원 노조의 승리를 기원하며 종려나무 가지를 보낸 것은 낭만적이면서도 든든한 일화다.
자생적 여성주의자
어느 여성주의자는 심상정에 대해 '자생적 여성주의자' 라고 평한다. 어떤 여자들은 자생적으로 여성주의자가 된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부당함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자기 자리에서 싸워 나간다.
스물두 살 심상정도 그랬다. 대학교 3학년 때였다던가. 여학생휴게실에서 쉬고 있었는데, 심재철이라는 남자 선배가 노크도 없이 벌컥 들어오더니 외투를 아무데나 던지고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 순간 심상정은 외투를 그의 가슴팍에 처박고 그를 여학생 휴게실에서 내쫓아버렸다. 한참 피가 끓던 심상정이 여자를 우습게 아는 남자를 대하는 방식은 그랬다.
그 심재철은 위세 좋은 운동권 남자 선배였고, 심상정은 "여자는 피를 흘린 적이 없다" 같은 소리를 듣던 운동권 여자 후배였다. 심재철은 몇 주 후 서울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되었고 심상정은 여성 운동가를 키우지 못하는 운동권 서클들을 비판하며 학내 여성들과 함께 최초의 서울대 총여학생회를 만들었다. 남자 운동권들을 열 받게 만들고 여자 운동권들을 이끄는 선배가 되었다.
어떤 여자들은 명예남성이 될 수 없다. 얼마나 남자들 사이에서 일하든지간에 명예남성이 되지를 못한다. 여성을 정당하게 대우하라고 외치기 때문이다. 심상정도 그런 종류의 사람이다. 2007년 민주노동당 대선 경선에 나설 때는 여성주의자임을 "또" 선언했고 2017년 정의당 대선 경선에 나설 때도 여성주의자임을 전면에 내걸더니 첫 번째 공약으로 "수퍼우먼 (강요)방지법"을 내걸었다. 데이트폭력 방지법으로 "클레어법" 을 도입하겠노라 말하는 것은 물론이었다. 심상정은 여성주의자고, 싸우는 여자답게 배포가 크다.
'여성주의자 심상정'으로는 그렇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