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d (Feminist) Scientist 시즌 2 6. 슈퍼우먼이 되지 않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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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 (Feminist) Scientist 시즌 2 6. 슈퍼우먼이 되지 않아도

하미나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지난 연재에서는 페미니스트로서 학계에서 살아남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구구절절 토로하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여성들 한 명 한 명이 ‘수퍼우먼’이 되는 일이 아니라 작당 모의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 작당 모의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첫째로 여성 한 명 한 명이 겪은 경험이 단지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그 뒤에 여성 전체라는 집단의 경험이 놓여있다는 것을 눈치채야 하기 때문이고, 둘째로 나는 ‘예외’일 것이라는 생각, ‘열심히 해서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너머야 공동의 연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성은 스스로에게나 다른 여성에게나 들이미는 도덕성의 기준이 높지 않나. 어렵게 형성한 연대 역시 크고 작은 불협화음을 겪으며 깨지기 쉽다.

더 열심히 하면 되겠지! 되나?

미국 UC어바인 교수 캐롤 새런 등(2018)은 2003~2007년 미국 내 4개의 공과대학에 재학 중인 여성 공학도에게 일기를 쓰게 해서 공학 분야에서 이들이 자신의 지위를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연구했다.

연구진은 여성 공학도가 공학 분야의 핵심적인 가치인 실력주의(meritocratic)와 개인주의(individualism)를 깊이 내재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페미니즘을 거부하고 있다고 보았다. 응답자 대부분은 ‘저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성차별을 직접 경험해도 이를 구조적인 불평등으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성차별 경험을 공학 분야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확장하지 않았다.

연구진은 여성 공학도가 페미니즘을 거부한다고 보았는데, 왜냐하면 연구에 참여한 여성 대부분이 페미니즘을 불평의 목소리로, (공학 분야 내 핵심적인 가치인 실력주의에 어긋나는) 특별대우를 요구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덧붙여 연구진은 여성 공학도가 자신이 페미니스트로서 패싱되는 순간 자신이 성취한 재능과 경험을 객관적으로 평가해주지 않을 우려가 있기에 거부한다고 말한다.

이외에 연구진이 꼽은 여성 응답자의 여러 특징 중 몇 개를 꼽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학생들이 성차별적인 발언을 직접 들을 때에도 자신은 예외일 거로 생각한다는 점, 또한 자기 확신이 부족하고 자신의 능력에 대한 의심이 내면화되어서 부정적인 피드백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다는 점.

실력주의는 보통 한 개인에게 집단(여성, 인종, 성적 취향, 성 정체성)에 대한 편견 없이 작동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정치적으로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입장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연구진은 실력주의, 예외주의, 젠더 본질주의처럼 공학 분야 내에서 제도적으로 지속되는 이데올로기가 여성 공학도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끼치고, 여성 공학도가 이를 수용하게 되면서 공학 분야에서의 성 불평등이 탈정치화되어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 연구는 2003년~2007년 연구라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고 아마도 현재 미국 사회 여성 공학도의 생각은 그때와 또 다를 것이다. 하지만 연구의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 무엇이? 바로 똑똑하고 능력 있는 여성이 겪는 불평등이 어떻게 차근차근 탈정치화되어가는지를 보여주는 데 있어서 말이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실력대로 해내겠다는, 그래서 예외가 되고 말겠다는 실력주의와 예외주의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슈퍼우먼의 비애

일러스트 이민

새런(2018)의 연구가 여성 공학도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면 주혜진(2014)의 연구는 여성 공학도가 졸업하고 난 뒤 직장에서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주혜진은 대덕연구개발특구에 근무하는 16명의 여성 과학기술인을 심층 인터뷰하고 이들이 조직사회에서 경험하는 인지 부조화와 대응 방식을 탐색했다.

인지 부조화란 자신이 이미 가진 태도와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 행동을 한 경우, 이 행동을 상황 탓으로 돌릴 수 없게 되었을 때 겪게 되는 심리적 불편함을 뜻한다. 과학기술 분야의 여성은 ‘과학기술은 남성의 일’이라는 통념이 지배적인 세상에서 여성으로 존재하고, 과학기술 분야에 종사하고 연구한다는 점 때문에 이와 충돌하는 인지 부조화를 경험한다.

한 개인이 인지 부조화를 경험할 때 해소할 수 있는 전략은 크게 세 가지다. 1)행위를 변경하거나, 2)인지 부조화가 발생한 요인을 부정하거나, 3)새로운 인지 내용을 추가하거나. 주혜진은 여성 과학기술인들 역시 인지 부조화가 발생한 요인을 부정하거나 새로운 인지 내용을 추가하는 전략을 택하면서 ‘상징적 자기-완성’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주혜진은 이 전략이 자기 효능감을 극대화하는 전략, 소위 ‘슈퍼우먼 신드롬’과 일맥상통한다고 말한다.

일도 잘하고, 회사 내에서 관계도 잘 맺으며, 가정 내에서도 완벽한 아내이자 어머니의 역할을 해내는 슈퍼우먼. 주혜진은 성공한 여성에 관한 이야기에는 ‘일과 가정의 조화로운 양립을 완벽하게 구현해낸’ 사례에 대한 언급이 유독 많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러한 담론은 일에서 아무리 성공했어도 가정에서 엄마와 아내 역할에 성공적이지 못하면 완벽하게 성공한 여성은 아니라는, 여성에게 부과하는 사회문화적 부담을 보여준다.

요컨대 주혜진(2014) 역시 새런(2018)과 비슷한 결론에 이른다. ‘슈퍼우먼’이라는 상징적 자기-완성‘은 긍정적인 자아 개념을 강화한다는 면에서 개인적으로는 의미가 있겠지만 공론화와 정치가 부재한 전략이다. 이에 실제로 인지 부조화를 유발한 근본 원인인 성차별적 태도와 과학기술 분야 조직사회의 구조적인 변화를 유도하지 못한다. 이는 곧 다시 개인적 차원에서의 상징적 자기완성 전략에 몰두하게 하는 악순환을 가져온다. 작당 모의를 계속해서 강조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불완전하고 불순한 여성이 사랑받기를

위와 같은 이유로 나는 너무 잘 난 여자뿐만 아니라 어딘지 좀 모자라고 바보스러운 여자도 충분히 사랑받고 이들을 용납하는 사회를 꿈꾼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님과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 같은 분을 떠올리면 정말 힘이 나고 황홀하지만, 동시에 이수근이나 기안84 같은 캐릭터의 여성이 등장해도 나름대로 사랑받고 꾸준히 돈을 벌며 자주 용서받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불순한 여자가 등장하기를 바란다. 완벽하게 도덕적이지는 않은 여자, 자신의 성공 혹은 욕망을 위해 기꺼이 손을 더럽히거나 누구의 기대도 충족시키려 하지 않는 여자가 활개를 치는 것을 보면 그때야 조금은 안심하며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그 과정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화가 나고 열이 받아도 차가운 언어로 말하는 연습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우선은 살아남아야 할 테니까. 

참고문헌

정인경. "과학기술 분야 젠더거버넌스: 미국과 한국의 여성과학기술인 정책." 젠더와 문화 9.1 (2016): 7-43.

Seron, Carroll, et al. "“I am Not a Feminist, but...”: Hegemony of a Meritocratic Ideology and the Limits of Critique Among Women in Engineering." Work and Occupations 45.2 (2018): 131-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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