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명의 애인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5. 우리 앞의 블랙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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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의 애인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5. 우리 앞의 블랙홀

승은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사와 민을 만났다. 두 사람은 내 대학 동기이자 20대를 함께 보낸 오랜 동료다. 춘천에서 강연이 잡혀서 오랜만에 연락을 했는데, 마침 시간이 맞아서 약속을 잡았다. 몇 년 만에 만난 두 사람은 스무 살에 처음 만난 그날처럼 반짝반짝 웃으며 나를 반겼다. “오~ 퐁~ 성공했어~” 역시 놀림도 빠지지 않았다. 나는 두 사람에게 뒤에 앉지 말고 맨 앞자리에 앉으라고 보챘고, 두 사람은 알았으니 절대 발표 같은 건 시키지 말라고 당부했다. 두 시간의 강연이 이어지는 동안 사와 민은 피곤한 내색 없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날 강연 주제는 상상력이었다. 내가 상상하지 못하는 타인의 세계를 상상하기, 내 경계를 넘어서 어떤 모습으로든 살아갈 수 있는 상상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강연이 끝나자 두 사람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다가왔다. 강연 잘 들었어. 나 엄청 오랜만에 이런 자리에 와서 괜히 긴장했다고~ 하소연이 이어지다가 불쑥 민이 물었다.

“참, 네 애인들은 잘 있어?”
“그럼. 우주랑 지민 다 잘 있어. 민이랑 사는 만나는 사람 있어? 한 명이야 두 명이야?”

내 질문에 민은 놀란 눈으로 나를 봤고, 사는 “하나도 없다, 이 지지배야”라고 답했다. 나는 현장 정리를 돕고 갈 테니 먼저 애막골 술집에 가있으라고 했다. 애막골은 내 20대가 묻어 있는 거리다. 학교-집의 무한 반복이 직장-집의 무한 반복으로 이어졌던 무료함을 그 시절 우리는 주로 술로 풀었다. 나는 술을 못 마셨기에 술자리를 빙자한 밤 문화를 즐겼다는 말이 정확하겠다. 금요일만 되면 우리는 뾰족한 하이힐을 신고 밤거리를 누볐고, 술잔을 기울이면서 꽉 막힌 세면대 같이 해소되지 않는 가족, 직장,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의 연애 상대를 만나기도 했고, 이별한 뒤에 오열하는 서로를 다독이기도 했다.

비혼? 연애? 

술집에 도착하니 어느새 테이블 구석에 놓인 빈 소주병 두 개가 눈에 띄었다. 왜 이렇게 술을 빨리 마셨어! 내 물음에 눈이 조금 풀린 민은 사가 자꾸 술을 강요했다고 고자질한다. 옆에 앉은 사는 이게 얼마만이냐며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어떻게 지냈어. 잘 지냈어? 평범한 안부 인사를 시작으로 긴 이야기가 이어졌다. 먼저 민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사 말이야. 최근에 데이트 폭력을 당했어. 한 살 어린놈이었는데, 정말 입에 담기도 힘든 말을 사에게 했어. 헤어지자고 하니까 한밤중에 사네 집에 찾아와서 난동 부리고. 난리도 아니었어. 걱정돼서 내가 며칠 동안 사네 집에서 함께 있었어. 경찰서에 갔는데, 경찰이 오히려 사한테 뭐라고 하는 거야. 증거를 제대로 제시하라고. 원하는 게 뭐냐고. 그때 사 정말 많이 울었어. 사가 대체 뭘 잘못했어? 그놈이 잘못한 건데 왜 사한테 뭐라고 하는 거야?

듣는 내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사는 그 사람과 한 동네에 살아서 무섭다며 진지하게 이사를 고민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나는 사에게 고생했다고,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사가 잘못한 게 아니라는 말을 반복했다. 이어지는 민의 이야기. 민에게는 두 살 터울의 동생이 있다. 결혼한 지 3년 된 동생은 최근 민과 민의 부모님이 사는 집에 들어왔다. 남편의 폭력 때문이었다. 그간 동생은 남편의 폭력을 홀로 견뎌왔는데, 경찰이 출동할 정도로 심각한 폭력을 겪은 뒤에야 가족에게 사실을 알렸다. 내가 도착하고 얼마 후, 민의 동생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동생은 지금 남편의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지금 우리 집도 형편이 어려운데 언제까지 자신과 아이가 부담을 줄 수는 없다는 이유였다. 민은 말렸으나 동생은 완고했다. 끊어진 전화기 앞에서 민은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잘 지냈냐는 안부 인사조차 무례하게 느껴지는 밤. 나와 사와 민은 울다가 웃다가 다시 울면서 술잔을 비웠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그냥 연애 따위 안 하면 안 돼? 나랑 가까이에서 살자. 우리끼리 잘 살자!”고 말했으나 “너는 둘이나 만나면서 우리보고는 만나지 말라고? 이거 완전 이기적이네”라는 타박을 들었다. 20대에 그랬듯, 그날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레 비혼 다짐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비혼이면 뭐하나, 결혼을 안 해도 안전하지 않은 걸. 연애는 하고 싶은데, 결혼은 하고 싶지 않고. 연애는 하고 싶은데, 폭력을 당하기는 싫고. 전혀 연결되지 않아 보이는 두 갈래의 길은 너무 긴밀하게 연결되어 보였고, 우리의 대화도 그만큼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헤어지기 전, 민이 말했다.

아까, 강연 보는데 나 왠지 울컥했어. 너는 옛날부터 책도 많이 읽고... 달랐잖아. 오늘 네 얘기를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하는데 멋있더라. 그리고 아까 우리한테 애인이 몇 명이냐고 물었잖아. 그거 나 처음엔 당황했거든. 생각해보니까 그 말이 맞는 거야. 애인 있어? 없어? 있으면 몇 명이야? 이 질문이 뭐 어때서.

새벽, 다시 고양시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나에게 두 사람은 편의점에서 커피와 비타민 음료를 잔뜩 안겨주었다. 피곤하니까 이거 꼭 마시면서 돌아가. 따뜻한 마음 앞에서 코끝이 찡해졌다. 우리는 인사를 나눴다. 잘 가. 우리 무사하자. 무사하게 지내다가 계절 지나기 전에 만나자.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강연이 끝난 뒤의 후련함이나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즐거움을 음미할 새 없이 나는 블랙홀 같은 생각에 빨려 들어갔다. 오늘 나는 강연에서 섹슈얼리티의 자유, 다양한 사랑의 가능성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차별이나 폭력을 당하지 않을 권리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폴리아모리로 산다고 당당하게 커밍아웃도 했다. 내가 서있는 강단은 안전한 자리였다. 내가 뱉은 가능성은 사와 민의 세계에 닿을 수 있나. 그 가능성은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걸까. 그런 생각이 들자 세계가 두 조각으로 쩍하고 갈라지는 것 같았다. 합의, 평등, 인권, 자기결정권. 모든 옳은 언어가 피피티 화면 속에서나 살아 숨 쉬는 것만 같아 참을 수 없이 가볍게 느껴졌다.

일러스트 이민 

'합의'

“내 여자가 그러면 패버려야지.” 호감을 갖고 연락하던 사람에게 사가 폴리아모리 이야기를 꺼내자 상대는 망설임 없이 이렇게 말했다. 사는 바로 그 사람과의 관계를 정리했지만, 앞으로 그런 사람을 만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할 수 없다고 했다. 나 역시 무수하게 아슬아슬한 연애를 통과했기에 너의 세계와 내 세계가 무 자르듯 간단하게 단절되는 건 아니었으나, 지금의 내 세계가 일종의 특권에서 기인한 건 아닐까하는 생각은 떨칠 수 없었다.

왜 이 시대의 사랑은 위험을 수반할까. 지금의 나는 어떻게 그 위험을 잠시 비껴갈 수 있었나. 더듬어 보면 내 위치가 보인다. 우주는 내가 인문학카페를 운영할 때 손님으로 찾아와서 처음 나를 만났다. 지민은 내가 한동대에 페미니즘 강연을 하러 갔다가 만났다. 폴리아모리라는 말을 들었을 때, 두 사람 역시 ‘패버리고 싶다’까지는 아니었어도 불편한 감정을 가졌을 거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내 이야기에 귀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마 나를 평등한 하나의 인격체로 보고, 내 언어와 생각을 존중하려는 태도가 몸에 뱄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 내가 가진 문화자본이 더해졌을 거다. 내 위치, 경제적으로는 불안정하지만 적어도 ‘쓰고 말하는 사람’이라는 위치는 내 발언권에 무게를 실었을 거다. 내 위치가 지금의 사랑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언젠가 폴리아모리 커뮤니티에서 ‘합의’에 대한 팽팽한 논쟁이 있었다. 남편에게 공개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을 폴리아모리라고 말하는 기혼 여성은 정말 폴리아모리인가, 에 관한 논쟁이었다. 한 쪽에서는 폴리아모리는 ‘합의’인데 말없이 다른 상대를 만나는 건 불륜의 정당화라고 말했고, 한 쪽에서는 이런 사람 때문에 제대로 폴리아모리를 하는 사람이 욕먹는다고 했다. ‘합의’만이 폴리아모리의 기준이 되었을 때, 개개인이 처한 현실의 맥락이 쉽게 지워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논쟁이었다. 합의의 토대를 질문하지 않으면 논의는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 경제력이 남편에 비해 불안정한 기혼 여성의 경우, 폴리아모리를 밝히는 일은 곧 생계의 위협이 될 수 있다. ‘감히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이유로 아내 폭력과 살해가 빈번한 환경에서 안전하게 폴리아모리를 의논할 수 있는 기혼 여성은 얼마나 될까. 협상력의 토대가 공평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계적인 합의 원칙을 따를 경우, 폴리아모리는 권력을 가진 몇몇만 누릴 수 있는 트로피가 되어버린다.

혼자 살아도 괜찮을 수 없다면

언제부턴가 나에게 폴리아모리는 다자 간 연애만을 주장하는 사랑법이 아니게 되었다. 혼자 살아도 괜찮을 수 없다면 평등한 관계는 가능하지 않다. 일대일 관계가 안전할 수 없다면 폴리아모리도 안전할 수 없다. 평등한 협상력은 어떻게 주어질 수 있나. 안전하게 소통할 토대는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 질문을 따라가면 폴리아모리는 평등과 같은 말이 된다. 개개인의 사회적 경제적 위치와 성차별이나 폭력에 대한 문제제기까지 나아간다. 기울어진 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토대를 바로 잡기 위한 노력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취직과 퇴직을 여러 번 반복하고, 마지막 퇴직 이후 일자리를 못 구한 민은 스스로를 밥충이라고 부른다. 자기는 집에서 밥 먹을 자격도 없다며 자조적인 말을 한숨처럼 뱉는다. 민의 부모님은 형편이 넉넉하지 않다. 한참 비혼을 결심하다가도 민은 결국 결혼을 통해 부모님 집을 나오게 되진 않을까 걱정하며 자신 없는 표정을 지었다. 사는 10년 째 어린이집 교사로 일하고 있다. 경력은 10년 차인데, 사의 월급은 200만원을 조금 웃도는 수준이다. 사가 직장 생활을 하고 6년 동안 꼬박 부어서 모은 몇 천 만원의 적금은 고스란히 부모님의 빚으로 빠져나갔다. 술기운이 올라온 사는 이런 말을 했다.

나 이대로 괜찮을까 모르겠어. 내 동생 얼마 전에 결혼했잖아. 넓지 않아도 원룸이 아니라 거실이랑 방이 나뉜 집에서 사는 거 보니까 부럽더라고. 나는 결혼이 진짜 안 맞는 걸 알거든? 근데 아무리 일해도 원룸에 월세로 살고,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니까 자꾸 마음이 흔들리는 거야. 근데 우리 언니도, 엄마도 결혼해서 행복하지 않은 걸 나는 봤잖아. 그러니까 웃긴 거야. 그게 답이 아닌 걸 알아도 자꾸 끌려가게 되는 거. 근데 난 정말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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