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잠시 지내던 어느 날, 한 행사 뒤풀이에서 누가 내게 물었다.
“XX씨는 외국인들이랑 데이트 많이 하겠네요?”
“음, 해외에 있다 보면 아무래도... 그렇죠?"
그 사람은 가부장적인 한국 남성이 싫다며, 나는 항상 ‘갓양남’들만 만날 테니 참 좋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첫째로, 난 내 일과 생활방식의 특성 상 다양한 도시에서 살기 때문에 ‘한국인이 아닌 사람들’을 만나는 경우의 수가 많지 ‘양남’을 만난다고 한 적이 없다(페이스북에 올라온 내 친구의 사진을 가리키며 ‘미국인이다!’ 하던 친구의 어린 아들에게 왜 이 세상의 모든 백인이 미국인이 아닌건지, 경우의 수가 얼마나 수도 없이 많은지를 알려줄 때와 흡사한 기분이었다).
둘째로, 이 글의 주제이자 이 글을 쓰게 된 이유. 소위 ‘갓양남'이라고 해서 성차별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절대로. 아니, 오히려 젠더의 무게가 살짝 가벼워지는 매우 운 좋은 경우라도 나머지 한쪽 어깨에 인종이라는 무겁디 무거운 요소가 턱 하고 얹히는 경험을 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갓양남?
다양한 곳에서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 국내 여성들의 성토에 같이 울고 웃으면서 자꾸만 손톱 밑의 가시처럼 와 닿는 단어가 있었다. ‘한국 남성’의 대칭적인 위치에서 사용되는 ‘갓양남’. 여기서 ‘갓양남’은 가사와 육아를 여성에게 모두 일임하지 않고 합리적으로 분담하며, 몰래카메라를 찍거나 이를 자신의 성적인 욕구를 위해 아무런 죄책감 없이 소비하지 않고(그리고 무엇보다 이것이 ‘범죄'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며), 헤어지자는 연인에게 염산을 끼얹거나 차를 몰고 돌진하지 않는 데다, 여성을 성적 객체가 아닌 ‘사람'으로 본다 (써놓고 보니 이거, 앞에 ‘갓'이 붙을 정도로 대단한 게 전혀 아니라 문명사회 인간의 기본적인 자질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다시 한번 참담해진다). 이 단어는 비정상회담 같은 TV 프로그램에서 한국 남성인 진행자와 패널들과는 달리 성평등적 언어를 구사하고 관련 의견을 개진하는 백인 남성을 비교하는 스크린샷 같은 것들과 함께 종종 페이스북에, 트위터에, 여기저기에 등장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서 빨리 ‘탈출'해야겠다는 한국 여성들의 댓글이 쇄도한다.
‘갓양남'. 이 단어를 볼 때마다 나는 숨통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한국을 떠나면 여성혐오로부터도 탈출할 수 있을까요?’ 같은 댓글이 내 개인 블로그에 달리는 걸 볼 때도 그랬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자 이 글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성혐오가 없는 곳은 없다. 적어도 내가 보고 겪은 바로는, 그리고 지금도 고뇌하는 내 주변의 친구들과 지인들에게는 그랬다. 특히 아시안 여성이라는 위치는 여러모로 착취 당하기에도, 평가 절하 당하기에도 용이하다.
여성혐오가 없는 곳은 없고, 누구도 거기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것이 환상 속의 ‘갓양남'일지라도.
나는 이걸 내 연애사 및 주변에서 보고 들은 인종 간 연애에 관련된 일화 등으로 풀어 보려 한다.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여기서 자국 남성과 그 밖의 남성 간 우열을 가릴 의도는 전혀 없다. 어디의 누가, 어느 지역의 어느 나라 문화가 ‘그나마' 나은지 일일이 비교를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인류에 대한 희망과 삶의 의욕이 급속도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거창한 건 다 제쳐 놓고 한 아시안 여성의 하소연이자, 고발이자, 넋두리로 봐주셔도 좋겠다.
*이 시리즈에 등장하는 모든 이야기는 별개의 복수 사례를 하나의 사례로 통합하고, 등장인물의 국적 같은 상세 정보를 바꾸는 등의 수정을 가했음을 미리 밝힌다. 아래 이야기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각각 다르지만 모두 선진국 출신 백인 남성이며, 내가 직접 겪은 나의 이야기인 것도 있고, 내 지인이 겪은 이야기도 있다.
에피소드 1. 나 ‘옐로우 피버' 아니야
데이트를 지속하면서 조금씩 관계가 진전되고 있는 A. 여러모로 잘 맞고 같이 있으면 즐거울 뿐만 아니라, 현재 데이트를 하고 있는 다른 상대들인 B나 C보다 좀 더 젠더 의식도 나은 것 같고, 인종 문제에 대해서도 상대적으로 이해도가 높은데다 모르는 부분은 공부도 하려는 것 같다. 단순 데이트 상대에서 이제는 좀 더 깊은 관계를 생각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A도 마찬가지인지 조금씩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다. 그러다 각자의 지난 연인과 지난 연애들에 관해 이야기가 오가는 와중에 갑자기 A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는 말.
“혹시라도 네가 오해할까봐 그러는데 아시안은 네가 정말 처음이야. 바로 전 연인은 백인 이탈리안이었고, 그 전에는 흑인인 영국인이었어. 혹시나 네가 오해할까 봐.”
자신이 옐로우 피버(Yellow Fever: 아시아 여성들이 가부장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기에 순종적이고 얌전할 것이라는 편견과 좁은 질구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아시아 여성을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는 인종차별적인 사람, 또는 사상을 뜻한다. 출처: 페미위키)가 아니라는 걸 알리고 싶어하는 건 알겠는데, 줄줄이 그 전 연인들의 인종과 출신 국가를 하나하나 내게 알려주고 있는 A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복잡하다. 내가 그렇게 옐로우 피버 질색하는 티를 냈나.
옐로우 피버는 연애 시장의 배경을 전세계로 확대했을 때 여기서 아시안 여성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상징이다. 선진국 출신 백인 남성이 가부장적 시스템을 고수하고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에서 자라난 여성들이 자의로든 타의로든 가지게 되는 몇몇 특질(순종적, 여성적, 자기 주장 없음, 상냥함과 같은 형용사들로 주로 표현된다)을 탐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건강하지 못한 사회로 인해 개인에게 떠안겨진 요소를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적극적으로 찾아나서고 또 이용한다는 점에서 옐로우 피버는 여성혐오에 인종차별까지 더해진 전형적인 착취다.
에피소드 2. 태국 여자랑 만나는 거니?
그렇게 A와 사귀기 시작했다. B, C 같은 다른 데이트 상대에게는 진지하게 교제하는 남자친구가 생겼음을 이야기하고 축하를 받은 뒤 안녕(많은 경우 서구권의 남성과 데이트할 때 이거 하나는 깔끔해서 참 좋다). 지금껏 봐온 바로는 다방면에서 생각도 취향도 잘 맞고,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도 그리고 상대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도 있어 함께 하는 시간이 참 즐겁다. 그러던 어느 날, A가 가족들과 스카이프 영상 통화를 하는 걸 우연히 보았는데 어째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다. 물어봐도 되는 건가 고민하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보니, 잠시 망설이던 A가 한숨을 쉬며 하는 이야기.
아들과 아들의 연인이 함께 찍힌 사진을 본 A 어머니의 첫 마디가 ‘설마 태국 여자랑 만나는 거니?’였다고 한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이 한 문장에는 기껏 키워 놨더니 해외에 나가서 ‘태국 여자나' 만난다는 실망과 충격이 녹아 있었다. 저 사람들이 가진 ‘태국 여성'에 대한 인식이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 걸까? 알고 보니 A의 나이 많은 한 친척이 부인이 병으로 사망한 후 태국에서 미성년 여성을 돈을 주고 데려와서 자국에서 동거를 하고 있었다. 그 남성이 태국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그 여성 역시 A네 나라의 언어를 전혀 구사하지 못했고, 둘 다 영어도 하지 못해서 거의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그야말로 ‘돈 주고 데려온' 경우였고, 그 광경은 A의 가족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게다가 한창 당시 뉴스에 해당 국가 남성들의 동남아 섹스 관광이 연일 등장하던 터라, 그 거부감이 한층 더 했던 듯하다.
A는 일단 극심한 충격을 받은 자신의 어머니에게
- 현재 연인이 태국 여성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GDP가 얼마며
- 이 연인이 무슨 대학을 어떤 장학금을 받으며 나왔고 직업은 무엇인지 등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꽤나 정치적으로 진보적이라는 데다가 고등 교육을 받고 상당한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다. 태국 여성은 또 무슨 죄란 말인가. 억장이 무너지는 점이 한두 개가 아닌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말문이 막힌다. A의 표정도 좋지가 않다.
위의 일화에서 등장한 태국 여성이 경험한 결혼 이민을 Mail-order bride(메일 오더 브라이드)라고 한다. 국내 연애 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지지 못한 남성이 손을 뻗는 곳이 동남아권이라면, 서구권에서 경쟁력 없는 남성에게는 주로 러시아 및 동유럽권에서 오는 메일 오더 브라이드라는 선택지가 있다. 메일 오더 브라이드의 역사는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미국으로 건너가 개척지에서 부를 이룬 유럽 남성이 교회의 중개, 신문과 잡지를 통한 광고 등을 통해 본토의 여성을 개척지로 데려와(당시 개척지에는 아주 극소수의 유럽 여성이 살고 있었으므로) 결혼했던 것이 그 시초다.
20세기, 21세기에는 그 양상이 바뀌어 개발도상국에서 보다 나은 삶과 금전적인 안정성을 원하는 여성들이 서구권 선진국 남성의 주문을 통해 서구권으로 이주한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국제 결혼의 보급 및 인종 간 결혼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변하면서 슬라브계 여성 일색이던 이 카탈로그에 아시안 여성이 등장했는데, 아시안 여성의 경우 가장 큰 동기는 빈곤 상태에서의 탈출, 가족의 생계 유지 등이 있으며 가장 대표적인 국가는 필리핀이다. 아시안 여성 메일 오더 브라이드의 경우 대금을 지불하는 상대측 남성이 원하는 두드러지는 특질이 어린 나이와 처녀성 및 순종성이라는 점에서 기존의 슬라브계 메일 오더 브라이드와 차이가 난다.1)
많은 전문가들이 에이전시 등에 의해 ‘국제 결혼'으로 포장되는 이 메일 오더 브라이드가 인신 매매 및 노예 거래와 실상 별다른 차이점이 없음에 주목하고 있다. 미국 국무부의 한 보고서에 따르면 인신 매매 피해자의 80%가 여성이고 50%가 미성년자이며, 가장 큰 두 개의 카테고리가 바로 성노예(sex slave)와 가사 노동용 입주 노예(domestic servitude)다. 그리고 여기서 발견되는 대표적인 두 가지 특질로 피해자의 취약성 및 착취자의 기만을 들고 있다.
슬라브권, 그리고 아시아권 여성들은 현상 타개를 위해 고국을 탈출하고자 서구권 선진국 남성의 메일 오더 브라이드가 된다. 여기서 상대측 남성이 약속하는 갖가지 달콤한 약속과 재정적 안정성의 진위 여부를 가릴 수단 및 여성 본인의 육체적, 정신적 안전을 보장할 방법은 없다. 우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국내로 온 동남아권 메일 오더 브라이드의 죽음을 알리는 신문 기사들로 이미 이를 접하고 있다.
착취
이렇듯 여성혐오는 인종차별, 약자에 대한 착취를 통해 돌아가는 일부 시장 경제와 결합해 끔찍한 괴물로 진화한다. 피해자의 국적이나 착취자의 국적이 아무리 바뀌어도 본질적으로 이 착취는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결혼 중개사 Bien-Aller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 남성이 외국 여성과의 결혼을 원하는 이유로 꼽는 네 가지는 다음과 같다. 응답자의 32.1퍼센트가 꼽은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들 여성이 남성의 교육 수준 및 경제적 사회적 수준에 대해 관심이 덜하다는 것이었다. 23퍼센트의 응답률이 나온 두번째 이유는 이들 외국 여성이 순종적일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으며, 15.3퍼센트로 꼽힌 세번째가 이 외국인 여성이 그들의 생활을 좀 더 편안하게 해줄 것이라는 기대였다. 13.9퍼센트로 꼽힌 마지막 이유는 남성이 해당 여성의 가족들로부터 스트레스를 덜 받을 것이라는 이유였다.
- 'Why Korean Men Marry Foreign Women', 조선일보
앞서 등장한 일화에서 A의 부모님의 ‘오해'와는 달리 내가 태국인이 아닌 한국인이라서 ‘다행'인가? 겉으로는 그들이 태국인과 한국인을 전혀 구분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나는 일단 주로 착취 당하지 않는 국가의, 상대적으로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아시아 국가의 여성이니 천만다행인 것이고 이런 이야기들은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걸까? 다음 이야기에서는 다른 형태의, 좀 더 내밀하고 복합적인 아시안 여성의 전형화에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1) Amy Elson, Indiana University School of Law “The Mail-Order Bride Industry and Immigration:Combating Immigration Frau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