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영문학자 1. 문학이론과 백인 남자의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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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영문학자 1. 문학이론과 백인 남자의 저주

숙희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너는 너무 조용해.”

박사과정을 시작한 첫 해에 내가 가장 자주 받은 피드백이다. 내게 이런 피드백을 가장 많이 준 것은, 별로 놀랍지 않게도 문학이론 수업을 담당한 남자 교수 J였다. 이쯤 되면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갈 것이다—J는 백인이다.

분명히 하자면, 박사과정에 진학하기 전의 나는 수업시간 동안 말이 많은 학생은 아니었다. 나는 쓸데없이 나서거나 주의를 내게로 돌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토론에 기여할 법한 건설적인 의견이나 타당한 의문이 없다면 굳이 진행 중인 논의에 끼어들지도 않는다. 그러나 나는 시간을 들여 생각을 정리하고 발표하는 것을 선호할 뿐이지, 하고싶은 말이 있거나 해야 할 발언이 있다면 가만히 있지 않는다.

하지만 J의 문학이론 수업에서 나는 여러모로 “조용한 학생”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당신의 수업에 “조용한 아시안”이 있는 이유

일러스트 이민

J의 수업에서 내가 조용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궁극적으로 내가 개입하고 발언할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문학이론은 보통 영문학에서 가장 학문적으로 철저하고 엄준한 연구가 요구되는 분야로 여겨지고, 이 때문에 학문의 정점이나 어떤 경지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그런 문학이론을 다루는 J의 수업에서 우리는 13주에 걸쳐 총 39명의 이론가의 글을 읽었는데, 그 중 여성 이론가는 13명, 유색인종 이론가는 5명에 불과했다.

심지어 그 5명 중 셋인 호미 바바, 에드워드 사이드, 그리고 가야트리 스피박(우리가 읽은 유일한 유색인종 여성 이론가)은 전부 탈식민주의 문학이론을 다루는 1주일 동안에 몰려 있었다. 또 한 명의 흑인 이론가 아킬레 음벰베는 인종과 생명정치학을 다루는 주간에 배정되어 있었다.

J가 생각하는 문학이론이 얼마나 백인남성중심적인지 투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이다. 필연적으로 인종문제를 다룰 수 밖에 없는 인종과 생명정치학, 탈식민주의 문학이론, 이 두 분야를 제외하면, 정신분석, 유물론, 구조주의, 역사주의, 젠더/페미니즘 이론, 퀴어 이론 등등의 전통적인 “순수” 문학이론은 백인, 그것도 백인 남성의 전유물인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유색인종은 결코 추상적이고 학문적으로 뛰어난 연구를 할 수 없다는 편견을 반영한다. 이 때문에 뛰어난 흑인 여성 학자들의 이론은 종종 문학이론의 계보에서 지워지거나 백인 학자들에 의해 도난 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주디스 버틀러가 흑인 여성 학자들의 아이디어를 훔친다는 것은 학계 유색인(POC, people of color) 사이에서는 가십거리도 아니다.

이런 편견을 반영한 J의 강의 계획서는 게으르기까지 했다. 백인이론가들의 경우 미국 학계에서 유행하는 이론가들과 가장 최신의 이론을 포함시킨 반면, 탈식민주의 이론을 다루는 주에는 가장 기본적인 탈식민이론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예를 들어 J가 포함시킨 가야트리 스피박의 에세이 “세 여성의 텍스트와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이 1985년에 출판된 반면, 로렌 벌란트의 책 <잔인한 낙관>은 2011년에 출판됐다. 이러한 강의 계획서는 유색인종 학자의 이론은 오래되고 뒤처진 것이고, 백인 학자의 이론은 새롭고 학계의 경향을 주도한다는 편견을 만들어낸다.

수업을 점령한 자들

일러스트 이민

백인남성중심적인 편견을 견고하게 재생산하는 J의 강의계획서가 무척 미심쩍었지만, 재학생들이 워낙 J에 대해 호평일색이었기 때문에, 나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 강의를 들으러 갔다. 호평을 한 재학생들이 전부 백인이라는 점을 간과한 나의 실수였다.

수업은 세 명의 백인 여자가 주도했다. “주도”라고 쓰고 “지배” 또는 “군림”이라고 읽으면 될 것 같다. 수강생 중 가장 학번이 높을 뿐만 아니라 목소리마저 제일 컸던 그들은 늘 같은 모퉁이 자리에 앉았는데, 수업이 진행되며 그들에게 질린 나와 동기들은 그들을 “모퉁이들(The corner)”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 “모퉁이들”은 수업시간에 말을 하기 시작하면 도무지 멈추지 않았는데, 교수인 J가 그들을 내버려두었기 때문에 예의 바른 그 누구도 그들의 말을 끊지 못했다. 무엇보다 세 백인 여자 모두 J와 수업을 들은 적이 있어 넷은 강한 친밀감을 표출했기 때문에, 그 와중에 그들의 말을 끊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만약 “모퉁이들”이 주도하는 토론 내용이 학문적으로 자극이 되거나 흥미로운 얘기였다면 나도 더 적극적으로 토론에 참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퉁이들”은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토론에 임했다. 그들은 방송분량을 독점하겠다는 욕심에 눈이 먼 연예인마냥 생각나는 것을 그대로 입밖에 냈는데, “자크 데리다의 글이 너무 어렵다”는 불평불만을 마치 그럴듯한 의견인 마냥 포장해서 40분간 이어갈 수 있다는 점만은 정말 대단했다. 빅 데이터를 활용한 네트워크 이론을 읽었던 주간에는 그들 중 한명이 이공계 전공인 자신의 피앙세가 네트워크 이론을 얼마나 비웃었는지에 대해 15분 가량 “발언”했다.

원래 백인들은 아무 말이나 해!

일러스트 이민

“내가 이상한 건가? 사실 나 혼자 미쳐있고 저들이 정상인 걸까?” 참다못해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는 유쾌하게 답했다. 

“원래 백인들은 아무 말도 자신 있게 해. 겉으로 보기엔 그럴싸해 보이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알맹이가 없어. 그러니까 딸도 자신 있게 해!”

그래서 나도 자신 있게 토론에 참여했다면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지 않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모퉁이들”은 자신감이 넘칠 뿐만 아니라 끈질기기까지 해서, 나 뿐만 아니라 내 동기 중 그 누구도 발언할 공간이 없었다. 수업 수강 인원은 14명이었는데, 수업시간에 들리는 목소리는 셋, 많아야 네다섯이었다. 동기 중에서 나와 함께 단 둘 뿐인 동양인이자 행동력이 넘쳤던 A는 이에 대해 J에게도 불평하고, 박사과정 디렉터에게도 불만을 제기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상황이 나아지기는 커녕, J가 A를 향해 적대감만 키우는 원인이 되었다.

수업의 모든 토론에서 인종이나, 인종과 젠더가 교차하는 지점에 대한 논의는 부재했다. 발언을 독점하는 세 백인 여자나, 유일하게 주도권을 쥘 수 있는 백인 남자가 이에 대해 침묵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대다수가 백인인 수업환경에서, 비백인이 발언권을 쥐고 인종에 대한 얘기를 하거나 토론 중 나온 발언이 왜 인종차별인지 설명하는 것은 엄청난 감정노동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러다 보니 나를 비롯한 다른 유색인종 학생들(그래봤자 넷 뿐이었다)은 점점 다른 수업 준비를 우선시하게 되었고, J의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일이 적어졌다.

“너는 수업시간에 너무 조용해.”

중간 페이퍼에 대한 질문이 있어 J의 연구실을 찾은 날 J가 나에게 한 말이다. 그는 이후로도 나에게 수업시간에 더 적극적으로 발언할 것을 종용했다. 나는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세 명의 백인 여자들은 끊임없이 토론을 독점할 뿐 만 아니라, 스피박이나 바바와 같은 유색인종 학자들을 무시하는 발언을 내뱉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미국과 보스턴에 적응이 끝나지 않아, 수업시간에조차 인종차별을 경험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순진했던 나는 매 수업마다 트럭에 충돌하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인종차별은 때때로 정말 사고 같아서, 예기치 않게 닥치고, 그 여파가 너무 커 반응해야 할 적절한 시기를 놓쳐버리고 만다. 수업시간에 앉아있는 것조차 고역인 상황에서, 두 마디 이상 내뱉는 것은 너무나 버거운 노동이었다.

관대한 백인 남자인 내가
조용한 동양인 여성인 너를 사하노니

일러스트 이민

학기말에 J는 모든 학생들에게 성적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피드백이 담긴 코멘트를 돌려주었다. J가 메일에 첨부한 코멘트를 열어보던 그 기분을 나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글자를 읽는데 심장이 너무 아프게 뛰고 손이 차게 식어 나는 그의 코멘트를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파일을 닫아야했다(이게 공황발작의 전조라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코멘트 전문을 본 것은 사실 아주 최근의 일이다.

“(전략…) 면담시간 동안 우리의 대화는 무척 즐거웠지만, 나는 수업시간 동안 너의 고집스러운 침묵에 굉장히 실망했어. 특히, 그래, 특히 내가 직접으로,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더 소심한 학생들이 발언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한 제스처를 취한 뒤에도 그래서 말이야. 네가 다른 학문적 전통에서 왔다는 것은 알고있어. 하지만 네가 내게 설명했듯이, 지금까지 교육 받아 온 수동적인 태도로 여전히 수업에 임한다면, 다른 학문적인 공간에 오는 목적을 잃어 버리는것이라 생각해. (…중략…) 하지만, 네가 좀 더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훈련을 한다면 (한 세미나 당 한번 코멘트 하라는 건 그렇게 큰 요구가 아니야) 네가 잘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나는 관대함을 베풀어 A-를 주기로 했어.”

J가 내게 준 코멘트는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 텍스트다. 서양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남성적”인 스스로를 상상하기 위해 그에 대비되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여성적”인 동양을 만들어 내는 것이 오리엔탈리즘의 작동법이다. 오리엔탈리즘 담론은 역사적으로 서구의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적 팽창을 정당화할 때 사용되었는데, 남성적인 서양이 신비화되고 낭만화 된 여성적인 동양을 탐험하고 정복한 뒤, 시혜적으로 “발전된 문명”을 나눠준다는 식이다.

백인 남성인 J가 동양인 여성인 나에게 “수동적인 태도”를 가졌다고 말할 때, 그는 이러한 차별적인 담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J 본인도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네가 내게 설명했듯이”라며, 자신은 내가 한 말을 반복할 뿐이라는 변명의 여지를 코멘트에 남겨둔 것이다.

물론 나는 J에게 내가 한국에서 “수동적인 태도를 교육 받아왔다”고 한 적이 없다. 나는 다만 내가 한국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미국 학계에서 이루어지는 논의 방향에는 아직 익숙하지 않다거나, 이론을 접근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을 뿐이다.

나는 상냥한 J의 첫인상을 믿고, 그가 나에게 조언을 줄 수 있다는 교수-학생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내가 취약하다고 느끼는 점을 공유했는데, J는 내 말을 비틀어 나에 대해 너무나 전형적인 인종차별이나 하고 있었다. 코멘트를 읽는 순간, 나는 너무 열이 받아 눈앞이 캄캄해진다는 게 어떤지 경험했다. 분노와 실망이 컸던 만큼, 그 날 받은 상처도 컸다.

아마 J에게 나는 영원히 조용한 학생일 것이다.

동양인에 대한 편견은 기억 왜곡도 일으키는 모양이다. 나는 수업마다 적어도 한 두 마디씩은 꼭 발언을 했는데, J는 그런 일이 없었던 것 마냥 코멘트를 적었다. 내가 조용하고 소극적이라는 그의 편견이 그의 귀를 막고 기억을 지워 버린다. 내가 얼마나 발언하는 지와 상관없이, 나는 언제나 그에게 조용하고 소극적인, 동양에서 온 여자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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