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가 시작하자 낯설기만 한 글래스고에서 일상생활이라는 것이 생겼다. 학교에 가고 밥을 먹고 작업실에서 작업하는 것, 카페를 가기도 하고 수업이 없는 날에는 서로 만나 맥주를 마시는 것. 한국에서 살던 삶과도 별로 다를 것 없었지만 새로운 곳에서 새로움을 경험하는 와중에도 이런 익숙한 것들을 나도 모르게 계속 찾았던 것 같다.
일상을 풍부하게 만드는
나만의 장소
카페에 가는 것도, 작업할 때도 잠깐이라도 카페에 가는 걸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글래스고에서도 마음이라도 편하게 공부하고 작업하기 좋은 카페를 찾아다녔다.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고르면 셰이크로 만들어주는 아이 카페(i Cafe), 애플파이와 아이스크림이 맛있는 틴더 박스(Tinder box)를 가장 좋아했다. 두 곳 다 학교 근처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데 내가 살던 기숙사에서 걸어서 15분 정도의 거리라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나 학교가 문을 열지 않는 휴일에는 무조건 이곳에서 작업을 했다. 힘들기만 한 영어 공부도 외우다시피 준비해야 했던 발표 수업도 좋아하는 곳에서 하면 덜 힘들 것이라는 믿음으로 좋아하는 장소를 찾았다.
내가 이 학교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개인의 작업공간을 각각 준다는 것이었다. 개인이 불편한 것뿐만 아니라 학생들끼리도 만날 시간이 수업 시간밖에 없어 서로 알아갈 기회가 적었다. 글래스고에서 내가 아는 사람은 대부분 학교와 관련 있는 사람이었다. 작업실에서 만나 서로 과제를 하며 대화를 하고 밥을 먹었던 친구들과 가장 친해진 걸 보면, 작업실에서 작업한 시간이 내 작업을 완성하는 시간뿐만 아니라 서로서로 고민을 말하고 고민하고 답을 찾아가는 모든 과정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곳에 모여 대충 책상을 붙여 탁구를 하기도 하고, 저녁 9시에도 모두가 작업실에 모여있던 날에는 맥주 한 병씩을 사와 마시며 작업을 하기도 했다.. 점점 시간이 지나 작업실에 모두 모여 작업을 할 정도로 친해지자 우리는 작업실을 나가 글래스고 이곳저곳을 다녔다. 날이 좋은 날에는 야외 카페에서 작업하기도 하고 밥을 먹으며 놀러 갈 계획과 방학 때 함께 여행을 갈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학교 근처,
새로운 맛
글래스고에서 집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고 학교에 내 작업 공간이 생기자 그다음 고민은 먹는 것이었다. 사실 기숙사에서 살게 되면서 정말 기본적인 조리 도구만 샀기 때문에, 처음에는 조리가 필요 없는 음식, 예를 들면 샌드위치, 시리얼, 오트밀과 같은 음식만 해먹었다. 또 영국은 우리나라에서는 하도 음식이 맛없는 나라라는 의식이 강해서 그런지 나도 딱히 영국 음식에 대한 기대가 없어서 뭘 먹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친구들과 이곳저곳을 다니며 다양한 가게에서 여러 음식을 시도해봤다.
내가 글래스고에서 편견을 깬 음식은 중국 음식과 인도 음식이다. 생각보다 중국 음식의 종류는 매우 많았고 한국에서는 본 적 없는 음식들이 메뉴판에 빼곡했다. 인도 카레는 글래스고에서 먹었던 맛과 한국에서 먹은 맛이 완전히 달랐다. 새로운 음식도 좋았고, 새로운 맛들도 좋았다. 새로운 것이 천지인 글래스고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갔다.
공부하고 있는 GSA(Glasgow School of Art)에서 가까운 음식점인 싱글 엔드 (Single-End)는 브런치 메뉴와 샐러드, 그리고 빵을 파는 곳이다. 학교와 가깝다는 이점이 있어서 학기가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반 친구들을 가장 많이 만났던 곳이기도 하다. 직접 빵을 만들고 매일 매일 다른 스페셜 메뉴가 있는 이곳의 샌드위치와 계란 요리는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다. 또 채식주의자나 비건인 친구들에게도 다양한 선택지가 있어서 이곳에서 우리는 자주 만났다. 학생들도 좋아하는 곳이고 주말의 늦은 점심시간에는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로 동네에서 사랑받는 가게다.
첫 학기는 학교에서 수업하는 건물과 우리 과의 작업실이 조금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작업실 바로 밑에는 영국의 대표 음식인 피쉬 앤 칩스와 피자를 파는 옥스포드(Oxford)라는 가게가 있었다. 처음에는 ‘이름도 스코틀랜드에서 말도 안 되게 옥스퍼드라니….’ 라는 생각과 가게를 들여다보면 동네 사람들이 지나가다 들려 포장해서 가는 곳이라 흔하디 흔한 가게라 생각했는데 내가 먹었던 피쉬 앤 칩스 중에서 제일 맛이 좋았다. 영국에서 피쉬 앤 칩스의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번듯한 레스토랑에서 와인과 함께 비싸게 팔기도 하고 우리나라의 분식집처럼 언제든 들려 먹을 수 있게 저렴한 가격에 팔기도 한다. 이곳은 저렴한 가격에다가 학교 근처에서 유일하게 밤늦게까지 영업을 하던 곳이라 작업실에 늦게까지 남은 애들끼리 모여서 종종 피쉬앤 칩스 파티를 열었다. 피쉬 앤 칩스 뿐만 아니라 한국 음식으로 치면 순대와 같은 하기스(Haggis) 튀김, 소시지 튀김, 피자 튀김과 같은 다양한 튀김을 팔았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대부분 스코틀랜드 전통 음식인 하기스 튀김을 시켜먹었는데 나는 튀겨도 색이 새카만 하기스도 하기스 튀김도 도저히 먹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기스처럼 생소한 음식도 많았고 말만 들으면 시도할 생각조차 못 하는 음식들은 꽤 있었는데, 이런 내 편견을 깨준 음식 중 하나는 벅스 바(Buck’s Bar)라는 펍에서 팔았던 인기 메뉴 칙 앤 와플(Chick and Waffle)이다. 말그대로 튀긴 치킨과 구운 와플을 함께 먹는 메뉴인데 처음에 왜 치킨을, 하필이면 와플이랑 먹느냐는 질문을 하자 그럼 맥 앤 치즈 와플을 시킬 수도 있다고 신나게 말하는 친구의 말을 잊지 못한다.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맛있다! 치킨도 맛있고 와플도 맛있어서 같이 먹으면 더 맛있는 음식이었다. 한창 유행하던 단짠의 맛을 느낄 수 있고 한번 먹는다면 당신도 분명히 이 맛에 중독될 것이다. 이곳을 안 후 글래스고에서 저녁에 친구들과 가장 많이 갔던 음식점이다. 목요일에는 밴드의 라이브 음악도 들을 수 있어서 항상 목요일에는 사람들이 북적북적했다.
번화가, 근사한 곳
가끔은 친구 생일을 맞아, 또 방학을 앞둬서 서로 여행이나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근사한 곳을 갔다. 가격보다는 분위기가 좋고 음식의 가성비를 따지기보다 평소에는 먹어보지 못한 음식들을 먹기 위한 장소. 가격이 비쌌기 때문에 자주 갈 수는 없었지만, 생소한 재료들로 만든 음식들과 글래스고에서도 비싼 해산물을 먹을 수 있는 곳들이었다. 옥스 앤드 핀치(Ox and Finch)는 타파스가 주인 음식점이라 여러 음식을 시켜서 서로 나눠 먹을 수 있어서 대부분 친구의 생일에 서로 모여서 축하를 했던 곳이다. 구운 가리비와 푸아그라 파테, 돼지고기 볼살과 같은 다채로운 메뉴가 있다. 그래서인지 이곳에는 목요일부터 주말까지 저녁에는 반드시 예약해야 자리를 잡고 먹을 수 있다.
또, 투 팻 레이디스(Two Fat Ladies)라는 곳이 있다. 영국의 가정식을 파는 곳이었는데 생선 케이크와 그날 잡은 생선이나 가리비 요리들이 스코틀랜드에서 많이 먹는 사이드 음식이 함께 나와서 조금 더 영국 음식에 가까운 맛을 느낄 수 있다. 축하할 일이 있을 때 그리고 어떤 날을 기념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장소들이었다.
글래스고의 번화가는 학교 근처의 도심인 시티 센터(City Centre)와 주택가인 웨스트 엔드(West end), 크게 두 곳으로 나뉜다. 시티 센터에는 우리가 익숙하게 아는 대형 브랜드나 프랜차이즈 음식점이 모여 있어서 모든 일을 해결하고 좀 편리하게 쇼핑할 수 있다. 반면에 웨스트 엔드에는 개인 카페들과 오래된 가게들이 많이 모여있다. 영국을 하면 떠올리는 빈티지 샵들도 이곳에 많이 모여있다. 더 글래스고 빈티지 코(The Glasgow Vintage co)는 웨스트 엔드에 있는 빈티지 샵 중 하나인데, 가격도 싼 편이고 학생 할인도 해줘서 자주 들렀던 곳이다. 꼭 옷을 사지 않더라도 이 가게의 큰 유리창에 며칠 마다 한 번 씩 옷과 가게의 장식을 바꿔서 오고 가며 보는 재미가 있었다. 재밌었던 것은 빈티지 샵에서 옷을 보며 ‘이건 그 친구에게 잘 어울리겠다’ 했던 옷을 며칠 후에 정말 그 친구가 사서 입고 오고는 했다는 것이다.
이 빈티지샵 근처에는 페이퍼 컵(Paper cup)이라는 작은 카페가 있다. 주말 평일 가릴 것 없이 브런치가 유명한 곳인데 주말에 가면 자리 찾기가 정말 어렵다. 나는 이곳의 팬케이크를 무척이나 좋아했고, 과제와 발표가 너무 지치고 작업이 잘 풀리지 않고 교수님과 의견이 달라 힘든 다음 날에는 친구와 거의 암묵적인 약속처럼 이곳에서 팬케이크를 먹었다. 음식뿐만 아니라 작은 가게에서, 작은 테이블에 손을 올리고 작은 의자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친구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면 어제는 정말 힘들었지만, 오늘은 의외로 살만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또다시 작업하고는 했던 곳이다.
이곳에서 15분 정도 쭉 걸어가면 켐버 앤 존스(Kember & Jones)라는 브런치와 직접 만든 빵을 파는 카페가 있다. 2층이 있는 가게라 식사를 사람이 훨씬 더 많고 주말 아침에 빵을 사러 온 사람들이 줄을 서서 빵을 사는 곳이다. 2층에 앉아 빵을 사러 온 사람들을 구경하고 사람들이 대화하는 중간중간 큰 창으로 햇살에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 주말이라는 단어에 정말 잘 맞는 가게였던 것 같다. 싱글 엔드(Single-End)와 비슷하게 빵을 만들고 브런치를 파는 곳이지만 위치가 달라서 서로 다른 가게의 분위기를 만들었다.
공원에서 즐기는 피크닉
좋아했던 음식점이 많은 글래스고였지만 누군가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식사를 묻는다면, 그 어떤 음식점도 아닌 공원에서 했던 친구들과 피크닉을 꼽을 것이다. 글래스고의 여름은 한국의 가을 날씨와 같았다. 햇살이 내리쬐지만 시원하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글래스고의 여름에 우리는 캘빈 그로브 공원에서 피크닉을 했다. 서로 각자 만들 수 있는 음식을 가져와서, 음식을 할 수 없다면 사 와서 모인 이 자리는 내가 갔던 그 어떤 음식점보다 기억에 남는 순간이었다.
서로가 가장 잘 만들 수 있는 음식을 가져온 이 날에 누군가는 에그 키쉬를, 누군가는 빵을 구워서 공원 잔디 위에 앉았다. 나는 한국에서도 좋아했던 음식인 만두를 열심히 튀겨서 비빔 만두를 해갔다. 서로 다른 음식과 술이 모여서 우리는 백야 때문에 밤 10시가 넘어서야 해가 지는 그날에도 공원이 깜깜해질 때까지 웃고 떠들었다. 노래를 들으며 얘기를 나누고 곧 다가올 3개월가량의 긴 여름 방학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우리는 밤새 얘기했다. 영어로 대화는 아직도 어색했고 가끔은 처음 듣는 단어들이 있었지만, 모두가 하나하나 설명해주며 대화는 끊기지 않았다. 아직도 나는 글래스고의 여름을, 이날을 가장 좋아한다.
아마도 좋아하는 음식도 또 그에 대한 이유는 모두 다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추억의 맛이기 때문에 또 누군가는 정말 맛있어서 또 누군가는 음식을 먹은 그 순간이 특별했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이 글래스고의 음식점은 음식뿐만 아니라 함께 나눴던 대화, 같이 있었던 친구들에 대한 추억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떤 음식을 좋아한다는 의미는 당신이 경험했던 그 순간을, 또 어쩌면 누군가와 나눴던 그 시간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에게도 물어보고 싶다. 당신이 지금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가? 당신이 글래스고에 온다면 어떤 음식들을 좋아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