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도 차별과 편견, 그리고 위협은 실재한다. 하지만 그곳을 떠나온 곳은 문화도 언어도 인종도 다른 이방인이 되었다.
눈에 띄게 다른 인종으로 산다는 건 외로운 일이며, 너무나 쉽게 위험에 노출되는 일이다.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 무척이나 많았던 글래스고도 예외는 아니었다. 길을 지나가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니하오’라는 인사는 떠나올 때까지 익숙해질 수 없었고, 어디서 왔냐는 물음은 마주치는 모든 사람과의 첫인사와도 같았다.
특히 내가 유학을 갔던 시기는 한창 북한의 핵 문제가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었을 때라서 한국에서 왔다는 말에는 당연하게 북한, 김정은, 핵무기 이 세 단어가따라붙었다. 반복되는 질문에 남한과 북한이 어떻게 다른지, 남한이 어떤 곳인지 설명하는 데 지쳐 나중에는 그냥 맞다 북한에서 왔다고, 강을 건너 탈북했다고 대답하며 대화를 끝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로 아시아에 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나도 체코의 역사나, 스위스의 지역명이 정확히 몇개이고 어떤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일본과 한국이 다른 나라라는 것, 도쿄가 한국의 어떤 지역이 아니라는 것,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은 서로 다른 언어를 쓴다는 것 정도는 알아도 되는 거 아닌가. 아시아에 대한 무지는 곧 무지한 태도로 이어졌다.
귀찮음을 넘어서는 위협
친구와 가게에서 밥을 먹고 있을 때였다. 옆에 있던 아저씨가 아주 친절하게 웃으며 했던 질문은 왜 같은 아시아인인데 영어로 대화를 하냐는 질문이었다. 그 친구는 일본에서, 나는 한국이라는 서로 다른 나라에서 왔고 공통으로 쓰는 게 영어라 그렇다는 대답에도 꼬리를 물고 수많은 질문이 이어졌다. 그냥 아시아인이 영어를 하는 게 신기해보이는 걸까 싶었다.
왜 영어를 하냐는 질문부터 영어를 잘한다는 칭찬도 한국에서 영어를 배웠냐는 질문도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관심으로 느껴졌던 이유는 그냥 나라는 사람으로서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에서 왔는데 영어를 하는, 전혀 서양인처럼 생기지 않았는데 서양인의 언어를 쓰는 하나의 신기한 생물체에게 관심을 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동양인치고는 영어를 잘한다, 네 영어의 발음이 나쁘지 않다, 한국인들은 영어를 잘하는 편이다, 이런 말은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칭찬일까. 사실 이런 일은 너무 자주 있어서성가시고 반복되는 대답이 지겨울 뿐이지만, 때때로 인종 차별은 단순한 귀찮음을 넘어서는 위협이었다.
방학을 맞아 짧은 여행을 가기 위해 공항을 가는 날이었다. 새벽 4시 반에 집에서 떠나야 했기 때문에 우버를 불렀고 해도 뜨지 않은 밤에 여행용 가방을 싣고 공항으로 향했다. 운전기사는 어디서 왔냐 어디를 가냐며 말을 시작했고 피곤하지 않냐며 백미러로 계속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를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실 그냥 새벽이지만 대화를 좋아하시는 운전 기사분이구나 하고 그냥저냥 대답해주며 대화를 이어가는데 그는 피곤하면 좀 쉬라면서, 갑자기 자동차의 속도를 엄청나게 높이고 차선을 왔다 갔다 운전을 하며 알 수 없는 중동의 노래 볼륨을 최대치까지 높인 채 고속도로를 달렸다.
가끔 백미러로 보이는 그는 웃으면서 계속 위험한 운전을 했고 말도 안 되는 말로 노래가 좋지 않냐고 잠이 잘 오지 않냐고 소리를 지르며 물었다. 고속도로를 질주하며 덜컹거리는 차안에서 가사를 알 수 없는 노래를 귀가 터지게 듣고 앉아있으니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인지도 모르겠고 과연 내가 공항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지도, 안전하게 내릴 수 있는지도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가장 싫었던 건 노랫소리도 나를 보며 웃고 있는 운전기사의 얼굴도 아닌 내가 무사히 도착하기 위해서 내 돈을 내고 탄 우버 기사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공항에는 10분이나 일찍 도착했고 우버 기사는 끝까지 웃으면서 좋은 여행이 되라고 그리고 별점을 5개 달라고 꼭 그렇게 해주길 바란다며 여행용 가방을 내려주고 떠났다. 운전기사가 장난을 친 거겠지, 농담이었겠지, 재밌자고 한거 겠지라며 여행 내내 불쑥불쑥 생각나는 이 날의 새벽을 지워내려고 했다. 우버 기사를 신고할 방법도 있고 별점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집 앞까지 온 우버는 내 집 주소를 알고 어플에 적혀있는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또 글래스고에서 같은 우버 기사를 하루에 두 번이나 만난 적 있었던 나는 신고를 하거나 글을 남길 용기가 없었다.
무기력, 실망, 지침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둘이서 술을 마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번화가를 가로질러 걸어가는 중에 밖에서 담배를 피우던 남자 몇몇이 어디서 왔냐며 또다시 니하오 니하오를 연발했다. 나는 한국에서, 친구는 일본에서 왔기 때문에 그냥 무시하며 걸어가는 데 갑자기 후레쉬가 켜진 핸드폰을 눈 앞에 들이대면서 나는 홍콩에 가본 적이 있고, 아시아에 대해 아는데 중국어로 말해볼 거라며 핸드폰에 대고 말을 시작했다. 유튜브인지 인스타그램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촬영을 하면서 나와 내 친구를 못 가게 길을 막고 계속 얼굴에 휴대폰을 들이대며 말을 했다. 우리는 중국인이 아니라 중국어를 못하고 길을 가게 두라고 말을 했지만, 술에 취한 이들은 혼자 신나게 중국어를 떠들며 우리를 둘러쌌다. 계속되는 설명에도 비키라는 말에도 그 누구도 대꾸하지 않고 본인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신나게 했다. 결국 길을 지나가던 경찰이 시끄러운 중국어 소리에 무슨 일이냐고 묻고 나서야 우리는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내가 내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무기력함과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 없었던 순간이 경찰이 오자 순식간에 끝이 나는 그 과정을 보며 작아지는 기분을 느꼈다.
악의적인 인종에 대한 차별도 있었지만, 내가 그 나라의 국민이 아니라는 사실에 익숙해져야 하기도 했다.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으려고 하거나, 과도한 집세, 가스세와 같이 돈이 얽혀 일어나는 마찰들에 대해서도 대부분은 보상이나 법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도 해결해 줄 사람도 없다. 사실 변호사를 알아볼 수도 없고 기껏해야 상담소나 물리적 폭행이 있을 때나 경찰에 신고할 수 있지만 이조차도 명확한 답이나 처벌을 해줄 수는 없다고 말했다. 결국 어떤 상황에서도 모든 불합리함은 나의 몫이고 상대가 억지를 부려도 그걸 따라 갈 수밖에 없는 것, 그게 어쩔 수없는 현실이라는 이 상황들이 너무 잦아서 익숙해져야 했다. 매 순간 실망과 지침의 반복이었다.
길을 걸어가다 이유 없이 계란을 맞은 친구도, 언덕길에서 다리를 걷어차 넘어진 친구도, 네가 하는 영어는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주문을 못 받겠다고 나가라며 반강제로 쫓겨난 친구도 있었다. 음식점에서는 빈자리가 많음에도 꼭 화장실 앞으로 동양인 손님만 데려다 앉혀 놓는 경험도 수도 없이했다. 그 당시의 상황에 있는 것도 힘들었고 싫었지만, 이런 일을 겪으면서 누구도 도와줄 수 없다는 걸, 법으로든 어떤 식으로도 그들을 처벌할 수 없고 이 정도쯤은 그냥 넘어가야 한다는 사실이 더 외롭고 괴롭게 만들었다.
타당하지 않다
어쩌다 한 번, 어쩌다 있을 수 있는 일. 내가 겪었지만 바꿔 말하면 나만 겪었기 때문에 털어놓을 상대도 공감할 사람도 없다는 그 고독함. 까먹을 때쯤 한 번 있는 이런 일들은 끊임없이 내가 너무 예민한지, 이 상황이 옳은지 그른지 자기검열을 하도록 만들었다. 사실 동양인은 다 비슷하게 생겼으니 니하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거 아닐까, 술을 마시다 너무 신이 나서 그랬던 게 아닐까, 그냥 원래 다른 사람한테 관심이 많은 사람이어서 내가 어디서 왔는지 물어본 것 아닐까. 그들이 했던 행동에 대해 수많은 이유를 생각해서 그들의 행동을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였다고 생각하려 애썼다. 저 모든 행동에 매일 화를 내고 틀렸다고 하며 살 수는 없었으니까.
누군가는 위로하며 그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새벽에 혼자 택시를 타면 안 돼, 그러니까 술을 마시고 집에 가면 안 되지, 그러니까 새벽에는 그렇게 술집이 많은 번화가를 지나가면 안 되는 거야. 내가 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라는 건데, 그럼 이 모든 차별과 위협은 결국 내가 잘못으로 생기는 일인가? 그런 대답은 차별과 편견의 제일 좋은 이유를 만들어 준다. 네가 그랬기 때문에 차별받는 것이고, 네가 겪은 일은 네가 책임져야 할 리 잘못이라는 좋은 이유. 단지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받는 것을 넘어서, 그 어떤 차별에도 이유도 타당성을 붙여서는 안 된다. 인종이 다르다는 건 어느 한쪽이 틀렸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종차별을 받지 않으려면, 차별을 받지 않으려면 당하는 내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니까. 이런 일을 겪으면서 가장 바라는 건 다른 모두는 이런 일을 겪지 않는 것이다. 서로의 무사함과 평범한 하루를 바라야 하는 이 세상이 바뀌기를, 나아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