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영문학자 2. 도플갱어 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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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영문학자 2. 도플갱어 매직

숙희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그래, 방금 A가 중요한 지적을 했지.

백인여자교수 S가 말했다. 마치 고요한 핵폭탄이 터진 것처럼, 아주 잠시 교실의 시간이 멈추었다. 방금 중요한 지적을 한 것은 A가 아니라 나였기 때문이다.

모두가 숨을 죽인 사이, 구식 창문형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만 교실을 채웠다. 누가 얘기 할래? 서로 눈치만 살피는 사이, 호명된 A가 싸늘하게 대답했다.

그건 내가 아니라 숙희가 얘기한 거야.

동양인이라고는 두 명 있는데

지난 화에도 언급한 바 있듯이, A와 나는 동기 중 단 두 명 뿐인 동양인 여자나 다름없다. “다름없다”는 표현을 쓰는 이유가 있다. 우리 기수에는 사실 동양인 여자가 셋이다. 나, A, 그리고 H. 수적으로 비백인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우리 기수는 “다양성(diversity) 기수”라고 불릴 정도였다. 우리 셋 모두 유색인종 중 가장 피부색이 옅은 동아시아계 여성이라, 사실 인종적으로 전혀 다양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한국계인 나나 대만계인 A와 달리 H는 백인혼혈이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아시안 여자로 정체화 한다. 동양인 여자로서 편견도 경험한다. 그럼에도 백인들은 나와 A를 동양인 여자들로 묶어서 생각하면서도, H는 별개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 H가 A나 나와는 달리 이름만 봐서는 동양인인지 아닌지 티가 나지 않고, 혼혈이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고 내가 백인들의 인식에 따라 유색인종 여자로써 H의 경험을 지우려는 건 아니다. 우리와 달리 H는 석사학위를 받은 뒤에 들어왔기 때문에 들어온 년도는 같았지만 나중에 다른 기수로 묶이게 되었다. 따라서 A와 나는 ‘우리 기수 중’ 단 둘 뿐인 동양인 여자라고 할 수 있다.

변명이나 하지 말든가

아무튼, 어딜 봐도 S가 수업에서 거의 단 둘 뿐인 동양인 여자인 나와 A를 착각한 상황이었다. 전형적인 인종차별이다.

교실의 모든 이들이 황망해 하는 사이, S는 어영부영 강의를 시작했고,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지도 그에 대해 사과하지도 않고 넘어갔다. 게다가 그 다음 주의 세미나에서 S는 굳이, 평소에 본인이 혐오해 마지않는 수업 중 딴소리를 하면서까지, 자신이 학부수업 도중 어떻게 두 명의 백인 여학생들 “니콜”과 “엘리자베스”를 헷갈려 했는지를 구구절절 나열했다.

자신은 결코 인종차별자가 아니라는 무언의 변명이었고, 그러니 너희가 겪은 일 또한 인종차별이 아니니 이해하고 넘어가라는 암묵적인 압박이었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하지만 “동양인은 모두 똑같이 생겼다”는 인종차별적인 편견은 엄연히 존재한다. 2019년에도 서구 미디어에서 여전히 동양인 배우나 모델들의 이름을 잘못 표기한다. 이런 현실을 감안했을 때, S의 변명은 공허하고 졸렬하다. 백인여자인 S가 백인 여학생들을 착각하는 것과, 동양인 여성인 나와 A를 착각하는 데에는 전혀 다른 권력관계가 작동한다. S의 변명은 명백히 일어난 인종차별을 부정하고, 그럼으로써 나와 A의 경험 또한 부정한다는 점에서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나는 발표 준비를 하기 위해 수업이 끝난 다음 S의 연구실에 가야했다. 집에 가는 방향이 같았기 때문에, A는 내가 S와 만나는 동안 연구실 앞에서 나를 기다리기로 했다. 우리 둘 모두 아주 잠시 S의 인종차별에 대해 잊고 있던 차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S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내 수업발표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질질 끌더니, 결국 “숙희와 A의 얼굴형이 비슷한데 너네가 항상 옆자리에 앉아서” 그 날 자기가 실수를 했다고 2주나 지난 일을 또 변명하기 시작했다. A가 열린 연구실 문 밖에서 모든 대화를 듣고 있다는 것은 모른 채.

A와 나는 얼굴형이 전혀 비슷하지 않다. 심지어 그 전까지 우린 나란히 앉은 적도 단 한 번 밖에 없었다.

연구실을 나온 나는 경악한 표정의 A와 함께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끝끝내 말도 안되는 변명을 하면서 자신의 인종차별을 부정하는 S의 태도가 너무 웃겼기 때문이다. 그 날 이후, 우린 S의 수업마다 나란히 앉기 시작했다.

백인여자 작가들은 집에 갇혀서
타인종의 존재도 몰랐을 거라고?

그 이후로 S와 별다른 일이 없었다면 “백인이 또” 하고 비웃고 넘어갔을 것이다. 남들에게 학교에 대해 불평할 때 나는 이 사건을 꼭 얘기하는 편인데, 이 일로 엄청난 상처를 받아서라기보단 이 사건이 많은 맥락 설명 없이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부정할 수 없는 인종차별의 예시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S가 나와 A를 헷갈려 한 것보다도 더 기운 빠졌던 것은, 인종에 대한 어떠한 논의도 거부하는 S의 태도와 수업 내용이었다.

S의 수업은 18세기에서 19세기 초 까지의 낭만주의 문학을 다루었다. 특히 메리 셸리-퍼시 셸리 부부와, 그들의 주변인들의 작품에 집중한 수업이었다. 소수의 작가에 집중한다는 점, 그리고 <프랑켄슈타인>으로 유명한 메리 셸리의 작품을 읽을 예정이라는 점에 나는 나름의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매 주 진도가 나갈수록 나의 실망은 커질 수 밖에 없었다. S가 그 어떠한 작품이나 맥락에서도 인종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것을 피했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작품에 대한 논의와 해석이 오직 인종만을 중점적으로 다룰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영국의 제국주의적 팽창과 식민통치가 가속화 된 것이 18세기인 것을 생각하면, 이 시대의 작품을 다루면서 제국주의에 대해 그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는 것은 웃기는 일일 뿐만 아니라 영국의 제국주의/식민주의적 역사를 부정하는 일이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하지만 S를 비롯한 너무나 많은 백인 영문학자들에게 영국, 특히 과거 18세기 및 19세기의 영국은 백인성과 동의어인 모양이다. 마찬가지로, 18세기 영국에 인종적 타자가 존재한다는 것도, 그래서 당시의 문학에 인종에 대한 비유나 직접적인 담론이 등장한다는 것도, 백인이 아닌 학자가 이 분야에 전문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도 이들에게는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다.

18세기와 19세기 영국 문학을 연구하며 인종에 대한 논의를 피하려는 학자들은 종종 작가들, 특히 메리 셸리나 제인 오스틴, 브론테 자매와 같은 백인 여성작가들은 사적 영역인 가정에서 집필 활동에만 전념했기 때문에 영국 밖에서의 식민통치나 인종담론과 같은 사회 문제에 무지했으리라는 신화를 만들어내곤 한다.

브론테 자매가 당대 사회와 완벽하게 단절된 시골에서 영국의 정치적 맥락과 무관한 소설을 쓴 천재들이라는 “브론테 신화”가 그런 상상의 한 예다. 유물론이나 역사주의적 읽기를 하는 많은 학자들이 이러한 신화가 허구에 불과하며 영국 식민주의의 영향이 국내의 가정에까지도 충분한 영향을 미쳤음을 증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믿음은 여전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반대 사례는 아주 많다. 18세기 영국의 여성운동을 대표하는 페미니스트 중 하나였던 메리 울스톤크래프는 1789년 5월, 올라우다 에퀴아노의 전기 <올라우다의 흥미로운 이야기The Interesting Narrative of the Life of Olaudah Equiano>의 리뷰를 출판한다. 당대 가장 유명한 노예제도 폐지 운동가 중 하나였던 에퀴아노의 전기는 그가 아프리카에서 납치되어 노예로 팔렸다가 스스로의 자유를 구매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다.

울스톤크래프트는 영국의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며 노예제와 (백인)여성 억압을 동일시하는 주장을 펼친다. 물론 백인 여성 또한 노예제의 착취에 가담하고 노예제로 인해 이득을 취한만큼, 둘의 억압을 동일시하는 울스톤크래프트의 주장은 문제적이다. 하지만, 그녀가 당대 사회의 인종 담론, 노예제 폐지 운동, 그리고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에 활발히 참여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울스톤크래프트의 딸인 메리 셸리 역시 작품에서 제국주의와 인종에 대한 논의를 빼놓지 않는다.

'애써' 인종 없는 <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의 대표작 <프랑켄슈타인>은 북극에서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선장 로버트 월튼에게 구조되며 시작한다. 이 때 월튼은 프랑켄슈타인이 그가 얼마 전 지나친 “다른 여행자와는 다르게” 유럽인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 “다른 여행자”는 물론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한 괴물(the Creature)로, 그는 “어느 미지의 섬에 사는 미개인”으로 묘사되어 인종적으로 타자화 된다.

후에 프랑켄슈타인의 회고를 통해 등장하는 괴물 창조 장면에서, 괴물은 노란 피부와 검은 머리를 가졌다고 묘사된다. 영문학자 앤 맬러가 지적하듯, 셸리의 동시대 독자들은 이것이 당시에 유행하던 인종구분법에 따른 “전형적인 몽골인” 묘사임을 알아차릴 것이다. 물론,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이것은 제법 낯익은 묘사다.

뿐만 아니라 이 괴물은 작중에 여성화 된 동양을 상징하는 등장인물, 터키 출신의 여인 사피(Safie)와 동일시 되기도 한다. 사피가 영국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영어와 더불어 각종 학문을 배울 때, 괴물 또한 숨어서 함께 교육받는다. “미개한” 인종적 타자가 “문명화 된” 백인성을 습득하는 장면이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이런 만큼 메리 셸리와 동시대를 살았던 비평가들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을 영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인종적 타자인 셰익스피어의 칼리반(Caliban)과 비교한다. 특히나 1990년대 초부터 200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영미권 학계에서는 <프랑켄슈타인> 내의 오리엔탈리즘이나 인종 재현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인종적 타자를 상징한다는 것은 정설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프랑켄슈타인>을 이야기하며 인종 얘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S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인종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끊임없이 주제를 바꾸고, 토론을 중단시킨 채 평소에는 잘 하지도 않는 강의를 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우리는 수업 시간 동안 <프랑켄슈타인>의 장르를 여행기로 읽을 수 있는지, 남편이자 시인 퍼시 셸리의 시가 어떻게 메리 셸리의 산문에 영향을 끼쳤는지, 밀턴의 영향이 그의 글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메리 셸리의 아버지이자 당대의 유명 철학자 윌리엄 고드윈이 미친 영향은 또 어디서 드러나는지, 또는 도시와 시골의 대립 양상에 대해서만 논의했다. 논의 절반을 고루한 백인남성들이 메리 셸리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토론하는데 쓰다니. 엄청난 시간, 공간, 기력 낭비였다.

한 번은 나와 A가 작정하고 ‘프랑켄슈타인과 마주한 괴물이 자신과 전혀 닮지 않은 창조자를 직면하고 자아 형성을 하는데에 실패하는 장면’에 대해, 라깡의 정신분석학과 거울상 이론에 기반해 토론하자고 주제를 던졌다. 당연히 프랑켄슈타인과 괴물 가운데 누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고 누가 그렇지 못한 존재로 배제되는가, 이것이 ‘인종적으로’ 어떻게 표현되는가 하는 부분이 핵심이다. 그러나 이 때에조차,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인종화 되고 타자화되는 것은 아주 최소한만 이야기 되었다.

“내가 느낄 수 없으니 존재하지 않는다”

기말 페이퍼를 쓸 때가 되자 S는 수강생 모두가 자신의 페이퍼 주제를 발표하게 했다. A와 나 모두 메리 셸리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종적 타자에 관심이 있었다. 정확히는 백인 남자 작가의 작품을 피하다 보니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A는 백인인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한, 타자화 된 동양인 괴물이 자신과 인종이 다른 창조자를 직면하고 어떻게 자아 형성에 실패하는지에 대해 앞서 했던 주장을 더 발전시키기로 했다.

나는 메리 셸리의 다른 작품인 <마지막 남자The Last Man>을 골랐는데, 이는 제목 그대로 정체 모를 역병이 휩쓴 지구에 최후로 남은 마지막 인간 라이오넬 베르니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나는 지구상에 단 하나 남은 인간인 베르니의 육체가 남성성과 여성성의 범주를 오가고, 인간성과 동물성의 경계를 허물 뿐 만 아니라, 서양과 동양의 인종적 경계 또한 넘나들며 궁극적으로는 서구가 정의하는 백인남성중심의 인간성(humanity)을 해체한다는 주장을 했다.

발표는 수강생 3명 또는 4명이 한 패널을 이루어 모의 학회처럼 진행했다. 발표 후에는 질문과 답변시간까지 있었는데, 이 시간 동안 S는 A의 페이퍼에 대해 가차 없이 비판했다. A가 그의 반응을 예상하고 수강생 그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선행연구를 준비해갔음에도 불구하고, S는 한사코 자신은 메리 셸리가 인종적 타자화를 하는 것이 느껴지지 않으므로 A의 주장이 설득력이 없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이 질문 또는 코멘트를 할 새도 없이, S는 끊임없이 A의 연구주제를 공격했다. 나중에 다른 수강생들이 A에게 페이퍼 주제를 바꿀 거냐고 물을 정도였다. A는 굴하지 않고 그대로 페이퍼를 썼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질의응답 시간 동안 A에게 기력을 쏟느라 나를 잊어버렸는지, 혹은 A와 나를 또 착각했는지 모를 일이지만 S는 당시 불안할 정도로 내게 피드백이 없었다. 그리고 나쁜 예감은 왜 틀리는 법이 없는지, 돌려받은 파이널 페이퍼의 마지막에 S는 또 “설득력이 없다”는 코멘트를 휘갈겨 놓았다. 페이퍼의 다른 부분은 흠잡을 데 없지만, 베르니 또한 인종적으로 타자화 되며 인종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한다는 주장은 셸리의 원작에서 가져온 증거가 빈약하다는 것이다.

페이퍼에서 나는 많은 장면을 근거로 인용했다. 예를 들어 베르니가 친우 에이드리언을 만나는 장면에서 에이드리언의 귀족적이고 영국적인, 따라서 가장 이상적인 백인에 가까운 외모와 비교하여 “야만적이고 미개한” 자신을 깨닫는 장면이나, 창백한 에이드리언과 달리 햇빛에 갈색으로 그을린 그의 피부가 강조되는 장면 등이다. 서양/문명/백인을 상징하는 에이드리언과 대조되어 베르니가 동양/야만/인종적 타자로 읽히는 장면이 있다는 것이 내 분석의 요지였다.

그런데 S는 이 장면들이 작품의 초반에만 밀집해 있다는 이유로 내 설득의 근거가 빈약하다고 했다. 초반에 이 장면들이 몰려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작품이 베르니의 회고로 진행된다는 점을 볼 때 오히려 작중 초기에 등장하는 이 장면들이 베르니라는 인물에게 중요한 장면들이며 이후의 모든 내러티브의 구성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한 반응이 아닌가. 무엇보다 너무나 많은 (백인) 영문학자들이 작품의 한 두 장면만을 가지고 저널에 논문을 싣고 책을 쓰는 상황에서 이 지적은 어이없기까지 했다.

S는 처음부터 설득 당할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2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종종 S와 마주친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아직 학교를 완전히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같은 공간에서 함께 발표를 듣기까지 해서, S는 어쩔 수 없이 나와 인삿말을 주고받아야 했다. 나는 그에게 인사할 때 마다 “잘 지냈어요, S?”라고 묻는다. S는 단 한번도 내 이름을 부르며 답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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