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영문학자 11. '사이다'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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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영문학자 11. '사이다'는 없다

숙희

일러스트레이션 킨지

정신적인 트라우마는 마음 뿐만 아니라 몸에도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뜨고 버텨야 하는 힘겨움이 몸에 켜켜이 쌓이다 보면 어느새 몸도 마음도 무거워지는데, 나도 모르는 새에 그 무게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나는 어느새 학교와 보스턴의 무게에 익숙해져 있었고, 그 힘겨움을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계속 이 학교에 남아있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의 전환, 보스턴을 떠날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마음의 무게가 덜어졌다. 몸도 덩달아 가벼워졌다.

억압에 무뎌지는 것, 그래서 자유를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는 것이 가장 무섭다.

백인이 아니면
맘 놓고 믿을 수 없는 제도

다른 대학원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받고서도 한동안 주위에 알리지 못했다. 석사학위를 무사히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나는 석/박사 통합과정에 입학했는데, 입학 초에 영문과에서는 중도에 석사만 받고 졸업하는 것은 쫓겨나는 것이 아닌 이상 불가능하다고 얘기했다. 학칙 어디에도 명시되어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다만 대부분의 석사과정이 펀딩이 없고 학비가 비싼 것에 비해, 박사과정의 경우 학비 면제를 받고 학교에서 돈을 받는 형태이다 보니, 이것을 악용해 펀딩을 받고 시작한 석/박사 과정에서 저렴하게 석사학위만 받고 떠나는 사람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인 듯 했다. 

그런데 지난 화에 언급한 대로 L교수님이 개인적으로 알아 본 바에 의하면, 석사만 받고 중간에 떠날 수 없다는 건 사실이 아니었다. 교수님이 아니었더라면 나나 A는 영문과의 거짓말을 곧이 곧대로 믿고 학교에 남았을 것이다. 석사학위조차 없이 3년 가까이 있었던 학교를 떠나는 것은 지나치게 아까운 일이기 때문에. 

하지만 교칙상 석사학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합격 사실을 비밀로 했다. 지난 2년 반 동안 교수들에게, 그리고 백인 학생들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제도가 얼마나 쉽게 개편될 수 있는지 지켜봤기 때문이다.

일러스트레이션 킨지

1년 차에 B학점을 네 번 이상 받으면 무조건 쫓겨난다더니, 백인 여학생이 그 상황에 처하자 규칙을 적용하지 않았다. 반면에 다른 아시안 여학생에게 똑같은 일이 일어났을 때, 그 학생은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물론 내가 모르는 다른 일들이 그 이면에서 벌어졌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동기였던 백인 여학생이 학교에 쫓겨날 위기에 처했을 때 개인적으로 시간을 내서라도 그 학생을 도왔던 학과장이, 다른 아시안 학생을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은 것은 분명했다(학과장은 여름방학 동안 꾸준히 그 백인 여학생을 만나 글쓰기 지도를 하고, 자신의 연줄을 이용해 저널 투고를 도왔는데, 훌륭한 성과를 내는 대학원생들조차 교수에게서 이런 정도의 집중된 관심을 받기란 쉽지 않다). 

나와 A는 새로 박사과정에 지원하면서 5월에 석사학위를 받게 될 예정이라고 적었기 때문에, 예정대로 석사학위를 받지 못한다면 새로운 학교에 무사히 입학하는 데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디렉터가 우리가 떠날 예정인 것을 지나치게 일찍 알게 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가 석사학위 받는 것을 방해할 지도 모르고, 그게 성공할지도 모른다는 조금은 편집증적인 의심 때문에 나와 A는 최대한 오래 비밀을 유지했다. 이렇게 과도하리만치 모든 상황을 조심하고 의심해야 한다는 것조차 매일 매일의 일상에 피로감을 더했다.

힘겹고 벅찬 선택?

나와 A가 떠날 예정이라는 것을 교수님 한 명을 제외하고는 영문과에서 아무도 몰랐기 때문에, 우리는 과의 정해진 절차를 밟는 척, 자격시험(이상한 나라의 영문학자 10. 위기탈출 넘버원 참조) 준비를 하는 행세를 하고 있었다. 4월 말에 A의 시험이 잡혀 있었고, 그 직전에 우리는 각자의 시험 위원회의 교수 세명과 디렉터에게 프로그램을 떠날 것이라는 요지의 짧은 메일을 보냈다. 그 날 나는 집에 돌아가 공식적인 해방을 축하하며 룸메이트들과 와인 파티를 벌였다. 그 와중에 A에게서 문자가 왔다. A의 이메일에 대한 교수 J(1화의 바로 그 J다)의 답신을 캡쳐한 사진이었다.

A에게. 지금은 힘겹고 벅찬 선택이라고 느껴지겠지만,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돌아보면 네가 옳은 선택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나는 너의 선택을 지지하고, 앞으로 네가 무엇을 하든 행운을 빌게. 

- J

문장에 주어가 없고 어딘가 말투가 어색한 것은 절대 내 번역 탓이 아니다. J의 이메일 자체가 모호하고 애매한 어조였을 뿐이다. 이내 A가 내게 전화를 걸었다. A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영문과 박사과정생인 룸메이트에게 이메일을 보여줬는데, J의 이메일이 얼마나 이상한 지 룸메이트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내게 토로했다. 백인 여성인 이 룸메이트는 J교수가 진심으로 A의 앞날에 행운을 빌어주고 있다고 믿는다는 소리였다.

“이거 이상한 거 맞지? J는 내가 학계를 영영 떠난다고 생각하는 거잖아. 그치?”
“응. 아니면 왜 달리 힘겹고 벅찬 선택이라는 둥 얘길 하겠어.”

나도 비슷한 이메일을 받았다. 나와 A를 혼동했던 교수 S에게서. 우리는 일부러 다른 학교로 간다는 사실이나 어느 학교로 갈 예정인지를 이메일에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굳이 교수들이 알 필요가 없는 정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데 이런 식으로 우리가 학계에 걸맞지 않아서,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족해서 학계를 떠난다는 식으로 생각하자 기분이 나빴다. 조금 유치하게 굴자면, 나나 A나 지금 있는 학교보다 훨씬 좋은 학교로 갈 예정이었기 때문에 더욱 기분이 나빴다!

이 와중에 디렉터에게서 연락이 왔다. 처음엔 잘 가라는 아주 짧고 형식적인 이메일을 보냈던 그는 이내 퇴직자 면접(exit interview)을 하고 싶다고 했다. 디렉터는 이 인터뷰조차 할 생각이 없었는데, 우리가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다른 유색인종 대학원생들이 압박을 해서 요청한 것이었다. 

퇴직자 면접은 보통 개인이 회사 등의 단체를 떠날 때 피드백을 주기 위해 진행되는데, 나나 A나 디렉터와 얼굴을 맞대고 앉아 얘기를 나누기엔 너무 지쳐있었기 때문에 서면으로 대신하겠다고 했다. 직접 만날 경우, 디렉터가 또 가스라이팅을 시도한다든지, 우리를 겁주려 할지도 모른다든지, 우리가 했던 얘기를 자기 편의에 맞춰 각색할지도 모른다는 계산도 있었다.

마이크로어그레션,
촘촘한 차별의 굴레

디렉터는 우리에게 박사과정을 떠나는 이유, 박사과정에서 좋았던 점(!), 제안할 점에 대해 “간략하게” 적어달라고 했다. 간략하게 쓴다고 쓰고 보니 내 서면 인터뷰는 3장이 넘어갔다. 그 동안 겨우 눌러둔 말들이 쏟아져, 해도 해도 할 말이 남아있었다. 그렇게 왜 내가 이 학교에 있을 수 없었나에 대해 구구절절 쓰다 보니, 이대로 그냥 떠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A는 서면 인터뷰를 디렉터에게 보내면서, 후임 디렉터인 교수도 참조인에 넣었다(현 디렉터가 이메일을 읽고 아무에게도 내용을 공유 하지 않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이어 학교의 윤리위원회와, 영문과가 속한 문과대학의 학장에게도 같은 내용의 이메일을 보냈다.

일러스트레이션 킨지

유학생, 혹은 미국 학교에 진학 중인 유색인종 학생 누구든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다(사실 젠더, 섹슈얼리티, 계층, 장애 등 소수자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알아야 한다). 학교 윤리 위원회, 평등 위원회, 인권 위원회 등 다양한 이름을 내걸고 존재하는, 소위 학생들의 권리와 안전을 위한다는 모든 위원회와 사무실들은 언제나 학교를 위해 존재하며 학교의 편에 선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윤리위원회에 연락을 넣으면서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윤리위원회는 두 시간만에 답신을 했고, 나와 A는 그 바로 다음 날 윤리 위원회와 면담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두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얘기를 나누었고, 교수들에게 받은 각종 코멘트를 캡쳐한 내용을 전부 전달했다.

인종차별에 대한 담론에서 자주 회자되는 표현 중에 마이크로어그레션(microagression)이라는 것이 있다. 직역하자면 미묘하고 미세한 공격인데, 의도와 상관없이 소수자에 대한 적대적이고 부정적인 편견을 드러내는 일상적인 언어나 행동, 제도적이고 환경적인 무시 등이 마이크로어그레션에 해당한다. 소소하고 촘촘한 인종차별을 굳이 이렇게 다른 말로 부름으로써 인종차별이 일어났다는 것 자체를 부정하려 할 때 쓰이기도 한다. 

그건 인종차별이 아니야, 마이크로어그레션이지.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그렇게까지 심한 건 아니니까”, “아직은 괜찮다”, “아주 나쁘지 않다”고 던지는 가스라이팅이기도 하다.

하지만 마이크로어그레션은 엄연히 인종차별(또는 성차별, 또는 호모포비아)을 토대로 작동하는 폭력이다. 내가 학교에서 당한 인종차별 중 많은 것이 이런 구분법에 따르면 마이크로어그레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문제는 이런 섬세한 차별은 증명하기가 무척 힘들다는 것이다.

윤리위원회와 같은 제도적인 공간에서 차별이 일어났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온전히 피해자에게 달려있기 때문에, 피해자들은 종종 자신이 겪은 트라우마를 타인에게 재현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재현하고도 차별이 아니었다고 가스라이팅 당한다. 당사자인 나와 A에겐 너무나 크게 느껴지고 숨막히는 일들이었는데, 타인은 “그럴 수도 있지,” “너무 예민한 거 아니냐”면서 대수롭지 않게 취급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 그래서 위원회에 기록을 남기며 나와 친구의 상처만 더 크게 남을지도 모른다는 점이 걱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시간에 걸쳐 지난 2년 반의 트라우마를 재현한 것은 남겨진 사람들, 그리고 앞으로도 이 공간에 오게 될 사람들을 위해서였다. 나는 보스턴에 직계 가족이 없고, 당장 이사를 할 정도의 경제적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학교를 떠난다는 선택지가 있었다. 그러나 내 주위엔 그런 선택지가 여의치 않은 사람들, 각각의 이유로 학교에 남기를 선택한 사람들이 있었고, 나는 그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노력을 하고 싶었다. 지금 당장에 아무 변화가 없더라도 나와 A와 우리 전에 있었을 수많은 이들의 파일이 쌓이다 보면 언젠가는 변화가 시작되고, 이 공간이 다른 사람들에게 더 지낼 만한 공간이 되었으면 했다.

'사이다' 같은
결말은 없어도

얼굴 보기 까다롭다는 문과대 학장에게도 금방 답신이 왔다. 마찬가지로 나와 A와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윤리위원회에 모든 정보를 넘겼으니 알아서 연락하라는 답변을 보냈다. 문과대 학장은 나이 많은 백인 남자인데, 여러모로 꺼림칙한 소문이 도는 남자였다. 그의 이메일에는 자신과 다른 여성 담당자를 동행한 채 만나자는 구체적인 언급이 있었는데, 친구들은 학장이 혼자서는 여학생들을 만나서는 안되는 비공식적인 보호관찰(probation) 아래에 있기 때문일 것이라 했다.

학교는 절대 우리 편이 아니고, 학계에서 벌어진 미투운동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용기 있게 성추행과 성폭력을 고발하는 생존자들은 종종 학교 측에서 지지는 커녕 묵살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소문과 가십을 음모론이라고, 허무맹랑한 과장이라고 비웃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존재하는 것만으로 이미 학교와 제도에 반하는 유색인종/퀴어/여성 등의 소수자 정체성을 지닌 학생들에게는 소문과 가십, 소위 말하는 귓속말 네트워크가 중요하다. 그렇게라도 해야 폭력과 억압에 조금이라도 덜 노출되기 때문이다. 학과장은 우리를 직접 만나 학교가 인종차별로 소송당할 가능성을 줄이고, 학교 차원으로 “뭔가를 했다”는 겉치레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았다.

'사이다'는 없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승리'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의 트라우마를 재현하고 또 재현해야 했던 수많은 면담과 이메일의 결과로 교수들이 내면의 성찰을 하며 자기 안의 차별과 편견을 돌아보고 학교의 제도적인 개편을 이끌었다면, 그래서 그들이 우리에게 눈물의 사죄를 하며 앞으로는 잘하리라 맹세했다면 아주 만족스러운 '사이다 서사'의 결말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변화는 종종 불만족스러울만치 느리다. 3개월 뒤에 나와 A는 여전히 그 학교에 남아 있는 가까운 교수님에게 연락을 받았다. 윤리위원회에서 고용한 사람이 “평등교육"을 위해 교수 회의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와 A의 정체를 불문에 부치느라 이 평등 교육자가 아주 애매모호하고 일반적인 얘기만 하다가 떠나는 바람에, 회의에 참석한 그 누구도 그 교육의 목적과 의의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얘기를 듣고도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A와 함께 그 상황의 아이러니에 대해 실컷 웃었다. 학교 내에서 어떠한 직접적인 변화가 당장은 없으리라 짐작하던 바이기도 했거니와, 이제는 학교에서의 경험에 대해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을 만큼 마음에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영원히 변화는 없을 것이라는 비관에 찬 것은 아니다. 변화는 어쩌면 머지 않은 미래에 올 수도, 나만 모를 뿐 이미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 당장 내가 절대적이라 느꼈던 학교를 떠나게 된 것, 그래서 제도에 구속되지 않는 삶을 알게 된 것부터 내 삶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동안의 일을 핀치에서 연재하게 된 것은 나에게 큰 위안이자 위로가 되었다. 한국어로 쓰기에 우리 학교에 있는 대부분의 이들은 읽을 수 없거니와, 내가 겪었던 일들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내 경험을 대변하는 언어로 서술할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었다. 게다가 눈치 보지 않고 얘도 인종차별주의자, 쟤도 인종차별주의자, 그리고 또 걔도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소리지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통쾌한 일인지. 

나는 지난 2년 반의 경험만큼 강해졌고, 이제는 자유를 상상하는 법을 안다. 그러니까 사이다는 없지만, 나는 더 행복한 삶을 찾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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