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잠이 들려고 하는데 핸드폰에 낯선 번호가 떴다. 평소에 각종 연체를 달고 사는 나는 습관적으로 모르는 전화번호를 피하는 편이다. 잠시 망설였지만 적어도 밤 11시에 독촉 전화가 오진 않겠지 싶어서 조심스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퐁~ 나야. 잘 지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누군지 알았다. 이십대 초반에 인권캠프에서 만난 동갑내기 친구 너구리. 내가 번호가 바뀌었냐고 묻자 너구리는 어떻게 번호도 모르냐고 서운한 내색을 보였다. 몇 년 만에 걸려온 야밤 전화가 반가워서 끊임없이 그간의 근황을 나눴다.
“나 두 달 뒤에 결혼해 퐁. 결혼식은 가족들과 조촐하게 할 거야. 혹시라도 축의금 걷으려고 전화했다고 생각할까 봐 미리 말하는 거.”
“와 결혼을 한다고? 진짜 진짜 신기하다. 축하해!!”
“신기하지? 나도 내가 결혼하게 될 줄 몰랐어. 아무래도 내가 만나는 사람이 나이가 있으니까 그쪽 집안에서 작년부터 압박을 하더라고.”
너구리도 나도 신기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웃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우리는 비혼을 결의한 사이였으니까. 당시 너구리는 소위 명문대에 다니는 중이었는데, 몇 번을 휴학하고 진지하게 자퇴를 고민할 정도로 한국 사회의 경쟁 문화에 적응하기 힘들어 했다. 나 역시 매번 부적응하는 사람이었기에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한 미래를 가늠하곤 했다. 서로의 연애 상담도 미주알고주알 나눴는데, 둘 다 결혼 제도에 비판적인 시선을 갖고 있었기에 적어도 결혼은 하지 말자고 입을 모아 말했다. 그런 너구리가 졸업하고 얼마 안 돼서 대기업에 입사한 것 까지는 알았는데, 들어보니 벌써 6년차 직장인이고 게다가 곧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애인들
한참 대화하는데, 너구리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네 애인들은 잘 지내고 있어?” 너구리는 글을 통해서 애인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나는 잘 지낸다고, 기회가 되면 미래의 아내와 함께 만나면 좋겠다고 했다. 수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런데 퐁, 나는 네가 걱정돼. 무리하는 것 같아서.”
“내가 뭘 무리해?”
“그냥, 네가 그렇게 사는 게.”
“(웃음) 내가 뭘? 그렇게 치면 나는 네가 더 걱정되는데……. 결혼, 쉽지 않은 선택이잖아.”
“내가 걱정된다는 건 내가 알던 스무 살의 너와 다른 선택을 하는 것 같아서.”
“스무 살? 나 그때 완전 망나니였어. 그때보다 지금 훨씬 안정적으로 살고 있는데?”
“그런가. 네가 그러면 됐지 뭐. 그런데 아무래도 아내랑 만나는 건 안 될 것 같아.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잖아? 아마 널 이해하지 못 할 거야.”
사실은 네가 날 이해하지 못하는 거 아니야? 묻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순식간에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애써 웃으면서 전화를 끊었다. 정적으로 가득 찬 방안에서 한동안 멍하니 누워있었다. 가치관이 다르니 너를 보지 못할 거야. 사람은 모두 다르잖아? 친구의 목소리가 맴돈다. 한때는 내밀하게 통했던 친구에게 지금 나는 가까이 해서는 안 될 위험한 무언가가 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익숙한 감정이었다. 결혼한 중학교 동창의 신혼집에 놀러간 날,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친구는 나를 보자마자 대뜸 말했다. “나 웬만하면 네 SNS 보고 좋아요 누르는데, 네가 폴리아모리인가 그런 글 쓸 때마다 좋아요 못 누르겠어. 우리 오빠가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서.” 그때도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죄?
한 번은 지민의 가까운 후배가 블로그에 이런 글을 남긴 적이 있다. ‘폴리아모리는 동성애처럼 죄다. 성적 방종이다. 죄를 죄라고 말하지 못하고 모든 걸 사랑으로 품으라고 하면 결국 모든 도덕적 기준이 사라지는 거 아닌가? 나는 죄는 죄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게 표현의 자유니까.’ 글을 남긴 후배는 지민의 친한 친구와 오랜 연인이기도 한 사람이었다. 지민이 친구에게 네 애인이 이런 글을 썼다고 보여주자 친구는 글에 관한 자초지종을 들려줬다. 친구가 지민과 내 관계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하자 그의 연인인 후배가 울면서 말했다고 한다. “오빠도 저러고 싶다는 거야?”
무리한다. 이상하다. 죄다. 무리한다. 이상하다. 죄다. 가치관이니 이해해라. 사람은 다를 수 있으니까. 실컷 상처주고 오히려 내게 다름을 받아들이라고? 당시에 묻지 못한 말들이 목구멍에서 아우성친다. 사람은 다를 수 있지만, 다른 걸 틀리다고 하는 거야 말로 틀린 거 아니야? 왜 내 사랑이 네 사랑에 위협이 될 거라고 생각해? 무턱대고 종교적 신념을 내세우는 거라면 신경도 안 쓰겠어. 그런데 말이야, 나는 네가 그렇게까지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게 납득되지 않아. 오히려 격한 반응 이면에 모종의 불안감이 느껴지는 거 알아? 내가 만나는 사람도 혹시 다른 사람을 만나겠다고 하면 어떡하지, 하는 마음 말이야. 오히려 내가 묻고 싶어. 그만큼 네 사랑에 대한 믿음이 없니?
연애 정상성을 질문하는 독립잡지 <계간홀로>에는 N개의 연애를 지향하는 다양한 목소리가 실려 있다. 자신을 에이로맨틱 에이섹슈얼(로맨틱 끌림과 섹슈얼 끌림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일랑일랑의 글은 나와 닿는 부분이 있었다. 주위 사람들은 글쓴이에게 네가 아직 좋은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 그러는 거라고, 언젠가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감정을 알게 되길 바란다며 원치 않는 사랑 강의를 늘어놓는다. 심지어 갑자기 화를 내는 사람도 있다. 왜 네 경험을 말해서 다수의 멀쩡한 사람이 느끼는 감정을 부정하고 계몽하느냐는 이유였다. 이에 대해 일랑은 연애정상성을 불편하게 여긴다고 해서 그 관계를 추구하는 사람을 비난하는 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묻는다.
많은 이에게 이해받지 못한 경험을 가진 소수자 입장에서 들려준 언어가 과연 동일한 무게를 지닐까? 내 지향성은 타인의 로맨스를 허상으로 만들 만큼 강하지 않다.
나는 일랑일랑의 마지막 문장에 진하게 밑줄을 그었다.
나는 다만 정상이라고 믿어왔던 관계를 벗어나 다르게도 사랑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을 뿐이야. 나에게 맞는 방식으로 사랑하고 싶었으니까. 나를 드러내는 일은 네 사랑을 위협하는 일이 아니야. 그리고 네가 걱정할 정도로 내 존재를 위협하는 일도 아니고. 정말 나를 위협하는 게 어떤 시선인지 생각해줄래? 그러니까 내 걱정 하지 않아도 돼. 나로 인해 네 사랑이 걱정된다면, 차라리 그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하면 좋겠어. 나도 네 걱정은 하지 않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