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나는 부치, 일반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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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나는 부치, 일반 스타일

유의미

[서울/25] 신촌에서 맥주 한잔해요. 머짧 두 명, 일스 한 명 있어요. 맥주 마시기 부담스러운 외모는 아님. 그대들도 그랬으면.

[경기/17] 키 150대 마르고 애교 많은 긴머리 일스 데려갈 예쁜 언니 없나? 빠른 오프, 사심 환영. 내적 외적 괜찮으면 동갑, 연하도 ok

[부산/31] 주말 쉬는 직장인. 부담스럽지 않게 천천히 알아가고 싶어요. 영화, 여행, 운동 좋아해요. 꾸밀 줄 아는 한글자 분들 연락 주세요.

레즈비언 전용 메신저에 등장할 법한 쪽지들이다. 내가 지금 가상으로 구성해본 것이지만, 이 메신저를 이용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슷한 쪽지를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애인이나 친구를 찾는 레즈비언들은 구구절절 외모와 성격을 명시한다. 이 메신저는 글자수의 제한이 있는 짧은 쪽지 위주의 공간이라 이 정도에서 끝나지만, 이전에 웹사이트를 이용하던 시절엔 더욱 세세하게 원하는 이상형의 조건을 한 페이지씩 늘어놓는 경우도 많이 봤다. 자기소개와 선호하는 상대에 관한 예시에는 ‘숏컷’, ‘긴 머리’, ‘단발’과 같은 머리 길이에 관한 언급이 빈번하게 들어간다. 그 외에도 화장을 하는지, 하이힐을 신는지, 옷을 캐주얼 하게 입는지 등 외모를 꾸미는 스타일에 관한 묘사도 많이 등장한다. 마른 사람을 원한다고 체형을 명시하기도 하고, 언니나 연하를 찾으며 나이를 언급하기도 한다. 아니 어쩜 다들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원하는 모습이 있는 걸까? 그렇게 엄격한 조건을 제시하면 과연 거기에 맞는 사람을 찾을 수나 있을까?

조심스러워서

연애의 가능성을 생각하고 만나는 관계니까 외모에 관한 언급은 그렇다 치자. 그리고 레즈비언의 연애는 이성 연애 상대를 구할 때보다 사진을 섣불리 교환하기가 어렵다. 여성과 남성의 데이트를 위한 앱이었다면 잘 나온 셀카와 함께, 취향이나 라이프스타일을 짐작할 수 있는 사진을 올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이성애자의 소개팅은 만나기 전에 잘 모르는 채로 일단 사진을 교환하기도 한다. 그러나 레즈비언으로 데이트 상대를 찾을 때는 우선 혹시 모를 아우팅을 걱정해야 하기에 조금 더 조심스럽다. 사진을 프로필에 올려두더라도 얼굴이 잘 드러나지 않게 찍거나, 관심 있는 상대가 있어도 이야기를 나눠본 후에 비로소 사진을 교환하고, 혹은 만나기 전까지는 사진을 보내주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더 세부적인 외모 묘사를 통해 상대가 어떤 모습일지 짐작하려고 하는 건지도 모른다.

또한, 잘 가던 모임에서 우연히 만나는 것이라거나, 아는 레즈비언 친구에게 데이트 상대를 소개받는 거면 그렇게 까다롭게 따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가 속한 모임에 오는 사람이거나 친구가 보고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소개해준 거라면 어느 정도 비슷한 사람일 가능성도 크고 말이다. 그런데 폐쇄적인 레즈비언 사회의 좁은 인맥 안에서 데이트 상대를 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결국, 온라인상에서 사람을 만나려다 보니 상상도 못 했던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런 경험 뒤에는 만남을 위한 글에 학력이나 소득 같은 세부적인 조건을 달기도 한다. 사회적 위치가 달라도 마음 맞는 사람이 분명히 있겠지만, 채용 공고도 아니고 그냥 내 사람 하나 찾자는 건데 적은 시도로 어서 비슷한 사람을 만나고 싶은 거다. 이성애자들의 결혼정보업체는 대놓고 연봉, 학력을 입력하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굳이 제도적 결혼을 하지는 않더라도, 파트너가 되어 인생을 섞으려면 보장된 동질성을 원할 수도 있다.

'성향'

이렇게 앞에 있는 것들을 천천히 이해한다고 해도, 여전히 낯설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관계에서 행동 양식까지도 명시하는 경우가 바로 그렇다. 원하는 상대가 질투가 많은지, 연락이 잘 되는지, 스킨십을 좋아하는지, 심지어 주변에 레즈비언 친구가 많은지 구체적으로 명시한 글들을 보면, 어딘가에 있을지 모를 데이트 상대를 찾는다기보다는 새로 시작하는 텔레비전 드라마의 캐릭터 설정을 적은 것처럼 보인다.

그 캐릭터 설정 같은 까다로운 조건에는, 외모와 성격, 관계에서의 역할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성향’도 포함된다. 성향은 매우 중요한 것 같은데 또 굉장히 모호하다. 머리가 짧고 관계와 섹스를 리드하는 부치와 그 반대인 펨으로 대표되는 것 같은데, 인간이 그렇게 하나의 특징만 있는 게 아니라 당연히 복합적이고 입체적이니까 그 분류는 젠더이분법 만큼이나 불완전하다. 그래서 스스로 무성향이나 부치와 펨을 오가는 전천으로 규정하기도 하는데, 문제는 또 부치와 펨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연애시장에서 잘 팔린다는 거다. 머리가 긴 부치, 머리가 짧은 펨, 겉으로는 펨이고 속으로는 부치, 속으로는 펨이고 겉으로는 부치 등으로 사족과 변형이 한참 따라붙는 걸 보면, 그 분류의 허구성이 잘 드러난다. 꼭 들어맞게 분류되지 못한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은 거니까 말이다. 그 외에도 뭐 섹스에서 주기만 하는 부치, 받기만 하는 펨인 걸 성향처럼 소개하거나, 원래는 부치와 펨이 주로 연애하지만 이에 구애받지 않고 비투비, 펨투펨을 원한다는 글이 꽤 보일 때도 있었다. 요즘은 부치, 펨이라는 단어보다는, 레즈비언인 것이 티 나지 않는 ‘일반 스타일’‘티 나는 부치’ 혹은 ‘머리 짧은’ 것이 성향처럼 쓰인다.

이성 연애의 각본, 동성 연애의 각본

이 모든 건 근본적으로는 꿈꾸는 연애 각본에서 내가 어떤 역할을 할지 정하고, 상대 배우로 적절한 사람을 캐스팅해야 하므로 일어나는 일이다. 아니, 그러면 이성애자들은 왜 성향을 나누지 않는 걸까? 남자들이 모두 부치 역할을 하고 여자들이 모두 펨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수동적인 역할을 하고 싶은 남자가 있고, 스킨십이나 만남을 적극적으로 주도하고 싶은 여자가 있다면, 이성애자들도 진작 성향을 구분해서 만나고 있었어야 한다. 낮에는 지고 밤에는 이기는지, 밤에는 지고 낮에는 이기는지를 얘기하는 게 유행할 때, 그게 이성애자들의 ‘성향’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해본 적도 있다. 그런데 그건 그 커플의 관계 내부의 특징이지 그 남자와 그 여자의 성격은 아니니까 성향과는 좀 다른 것 같다.

어쩌면 이성애자들의 연애에 성향에 관한 용어가 발달하지 않은 건, 연애 각본에 등장하는 캐릭터가 그렇게 다양하지 않아서인지도 모른다. 이성 연애는 모두가 똑같이 따라서 수행하지는 않더라도 외모도 데이트도 섹스도 어떻게 하는 게 보편적인지 그림이 그려지고, 어떻게 하는 게 더 매력적인지도 큰 틀에서는 알 수 있다. 적어도 오늘의 소개팅에 원피스나 스커트를 입는 게 좋겠다는 생각은 할 수 있지 않은가? 실제로 그걸 입지 않거나 조금 다르게 입더라도 말이다. 레즈비언의 데이트는 체크무늬 셔츠에 운동화를 신는 것부터 테니스 스커트에 하이힐까지 넓은 스펙트럼이 펼쳐진다. 그뿐 아니라 맨 얼굴로 나가야 좋아할지 화장을 해야 예의일지, 누가 식사를 대접하고 누가 집에 데려다주어야 할지, 이 사람과 섹스할 때 기브를 할지 테이크를 할지 각본을 아예 처음부터 고민해야 한다. 그래서 더더욱 데이트 상대를 구할 때부터 상상하는 연애와 그 배역을 맡을 사람에 관해 그림 그리듯이 정성껏 묘사해야만 원하는 로맨스에 한 발자국 다가갈 수 있다.

사실은 이성 연애에서도 연애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각자의 형편과 욕망에 따라 기존의 관념 속 연애 각본을 조금씩 변형하고 새롭게 합의한다. 연애 각본의 정석만을 그대로 정확히 실천하는 연애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연애란 이성애든 동성애든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환상 속 로맨스를 흉내 내는 일이다. 환상이 개입되어야 그게 로맨스가 되고, 판타지를 조금씩 현실에서 실현하는 기분을 느끼면서 소비하는 게 바로 연애의 재미니까 말이다.

레즈비언의 성향, 삶의 양식

그러나 레즈비언의 성향이 단순히 연애 각본에서의 배역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부치는 연애 중이 아니어도 부치이고, 오히려 성격이나 삶의 양식에 가깝다. 내가 처음으로 부치로 소개하고 부치가 되기로 했을 때, 하루하루는 연극 같았다. 그리고 내 연애마저도 그랬다. 감정이 거짓이었다는 게 아니라 데이트에서 내 역할이 낯설어 행동을 일일이 계산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사귀었던 부치들의 행동을 관찰했던 걸 조금씩 흉내 내면서, 소파 자리를 양보하고, 무거운 문을 먼저 열어주면서 나는 점점 부치가 되어갔다. 짧게 자른 머리를 왁스로 손질하는 법을 배우고, 진한 눈화장보다는 기초화장만 하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펨이라고 소개할 때는 하지 않아도 되었던 분위기 주도나 상대 에스코트를 하게 되었고, 식당에서 주문을 하거나 택시를 잡는 일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너는 절대 부치를 못 할거야.’ 했던 지인들의 말이 무색하게도, 새로 만나는 사람들은 ‘에이, 네가 무슨 펨이야. 누가 뭐래도 부치지.’하기도 했다. 부치들은 원래 그렇게 태어난 줄 알았는데, 사실은 나도 관찰하고 따라 하니까 성공적으로 부치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회적 승인은 나의 성격을 조금 더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방향으로 한 뼘 옮기는 데에 영향을 미쳤다.

나에게 부치가 ‘될’ 수 있었다는 건, 여성도 ‘된’ 것이라는 증거였다. 부치가 되자 신기하게도 머리가 길었던 시절에는 엄두도 못 냈던 일이 가능해졌다. 남자들 사이에서 함께 담배를 피우거나, 놀러 갈 때 무거운 짐을 자진해서 들거나 하는 일들이 그랬다. 머리가 길었던 시절 쓸데없이 호의적이었던 다른 부치나 남자들은 이제 나에게 도움을 주기 전에 머뭇거렸고, 거리나 지하철에서 공격적이던 사람들은 예전보다 눈을 덜 맞추고, 사소한 시비나 괴롭힘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연애 관계 밖에서도 내 삶이 달라진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던 조심스럽고 소극적인 성격은 사실 원래 그랬다기보다는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걸 수행하면서 점차 강화된 거였다. 그래서 성향을 구성하는 외모, 행동, 연애의 배역 등은 각각 완전히 분리해서 생각할 수는 없다.

또한, 외모와 성향은 여성 레즈비언으로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가부장제와 이성애주의 사회를 어떤 식으로 마주할지 채택한 전략과 선언을 드러내기도 한다. 사람의 주체성과 독립성이 머리 길이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성 역할 규범에 맞춰 꾸밀 때와 아닐 때 경험하는 세상은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스스로 ‘레즈비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연애는 삶이고 정치이다. 레즈비언임이 티 나는 부치를 연애 상대로 선호하는 사람과, 이성애자와 구분하기 어려운 일반 스타일을 선호하는 사람의 삶과 가치관은 다르지 않을까? 이렇게 외모와 성향이 많은 것을 담고 있는데, 어쩌면 연애할 사람의 머리 길이나 성향을 따지는 건 당연하다. 우리의 성향은 연애 상대를 찾는 키워드이면서, 부조리한 이성애 규범을 드러내는 힌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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