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안 할거에요? 직장 동료가 묻는다.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더 복잡한 거짓말을 피하기 위해서는 그런 거 관심 없다고 해야 할 것만 같다. 나이를 몇 살 더 먹자 친구들이 하나둘 결혼을 한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꿈꾸는 표정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알콩달콩 예쁘게 살아가는 모습을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너는 그런 거 관심 없잖아. 친구들은 내가 결혼을 별로 안 하고 싶은 줄 안다. 젊은 날의 내가 ‘사랑은 이데올로기고 연애는 성역할 수행’이라고 바락바락 우기던 게 기억에 남아서 그럴지도 모른다. 예전엔 정말 결혼을 꿈꾸지는 않았다. 자유로운 삶이 좋았고,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보는 게 즐거웠다. 우리 엄마도, 엄마...
한 사람과 지속해서 깊은 교류를 하는 것이 좋다. 누군가와 함께 재즈 페스티벌에 가고 싶을 때 고민 없이 제안할 사람이 있는 게 좋다. 뜬금없이 어제 읽은 책의 감상을 말하고 싶고, 상대가 내가 오래전부터 그 작가를 좋아했다는 걸 아는 채로 들어주면 좋겠다. 일터에서 영혼을 갉아 먹힌 일을 얘기하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알아듣는, 어제도 그저께도 나랑 얘기했던 사람과 연속성 있는 대화를 하고 싶다. 새로 산 니트가 내게 잘 어울리는지 봐주고, 갑자기 시간이 맞으면 같이 밥을 먹고, 예쁜 핸드폰 케이스를 발견하면 사다 주고, 오늘따라 유난히 고양이가 귀여우면 사진 찍어서 보내는 사람이 있으면 사는 게 조금 덜 외로울 것 같다....
애인과 몇 달간 집을 바꾸어 살아본 적이 있다. 서로의 집에서 출퇴근이 더 편리했고, 고양이를 애인이 대신 봐줄 때였다. 나는 급하게 움직이느라 당장 필요한 옷 몇 벌과 화장품, 신발 두어 개, 노트북만 가방 몇 개에 나눠 들고 갔다. 어차피 서로 왔다 갔다 할 테니, 일단 이사부터 가고 중간에 필요한 게 생기면 한 번 더 가져오려고 했다. 그 집은 구한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들여놓은 게 없었고 휑하니 텅 비어 있었다. 기본적인 세면도구와 식기 몇 개, 청소도구는 있었지만 그게 다였다. 가구도 침대와 냉장고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살아서 엉망진창인 내 집보다 훨씬 아늑하고 깔끔했다. 분위기를 망치지 않기 위해 옷을 가지런히 개켜두...
나는 겁이 많다. 그래도 이제 어른이 되어서 바이킹도 탈 수 있다.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겁이 너무 많아서 바이킹을 보면 얼른 타버린다. 해버리면 별로 무섭지 않은데, 하기 전까지 떨고 있는 게 가장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식으로 번지점프도 했다. 한 번도 주춤하지 않고 하나 둘 셋 하자마자 뛰어내렸다. 한번 망설이면 그때부터는 정말 무서워져서 울면서 도로 내려올 것 같았다. 무섭다는 생각이 들기 전에 얼른 해버려야 한다. 가장 무서운 건 무서워하면서 떨고 있는 순간이고, 막상 해버리면 하나도 무섭지 않다. 그렇다고 인생도 그렇게 용감하고 바람직하게 살진 않는다. 삶에서도 무서운 게 있으면 빨리 해치워버리긴 하는데, 문제...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피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 나에게는 바로 가사노동이다. 물 한 잔만 마셔도 컵을 씻어야 한다. 음식을 배달시켜 먹어도 쓰레기는 버려야 한다. 내가 하지 않으면 누군가는 내 컵까지 씻고 내 쓰레기까지 버려야 한다. 컵이 저절로 싱크대에 들어가 씻는다거나 쓰레기가 제 발로 현관 밖으로 걸어나가는 일은 없으니까. 오늘도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어제 저녁에 먹고 식탁 위에 올려둔 치킨 뼈를 치웠고, 콜라병을 납작하게 눌러 봉투에 넣었다. 아침에 마신 주스 컵과 시리얼 그릇을 설거지하고 속옷과 수건을 빨아 널었다. 냉장고에 있던 날짜 지난 요구르트와 반쯤 남은 케이크를 버렸다. 밥을 새로 하고 즉석 짜장 소스를 전자레인...
11시 55분, 교과서를 덮고 오른발을 책상 밖으로 미리 뻗는다. 5분 뒤 점심시간 종이 울리면 제일 먼저 뛰어나가기 위해서다.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그날도 급식실에 일등으로 도착했다. 그런데 그날의 점심시간은 유독 초조했다. 제일 먼저 밥을 받아놓고도 먹는 둥 마는 둥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친구들은 어디 아픈 건 아니냐며 나를 걱정했다. 그 다정함이 새삼스럽게도 소중해서 괜히 슬퍼졌다. 조금 뒤에도 너희는 여전히 나에게 다정할까? 처음으로 커밍아웃을 하는 날이었다. 나는 두려웠다. 모두 한순간에 나를 경멸하게 될까 봐 친구를 잃어버릴까 봐 겁났다. 동성애자에 관한 이야기를 해본 적은 있지만, 우리와 관련 없는 사람들 얘기였...
나는 보여지는 것에 신경 쓴다. 그러나 예쁘면 다 되는 사회, 못 생기면 안 되는 사회에 반대한다. 여성의 몸을 함부로 판단해 등급을 나누는 것에 반대하지만, 아름다운 외모가 곧 자원과 권력인 시대에, 부지런히 몸을 가꾸고 관리하라는 요구를 외면할 만큼 용감하지는 않다. 사회가 요구하는 미의 기준이 남성의 시선인 것도 알고 있다. 일하거나 싸우기에 좋은 활동적인 몸이 아니라 공주처럼 얌전히 있기에만 적합한 몸이 유행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남자와 여자가 뒤바뀐 이갈리아에서 힘센 남자보다 키 작은 남자를 예쁘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나도 이 절망적인 사회의 일원이기에 내 눈에도 그게 더 예쁘다는 게 문제다....
안녕? 우리는 싸우다가 만났지. 세미나에서 집회에서 혹은 SNS에서,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기업과 국가와 때로는 가부장제와 이성애주의와 싸웠어. 그리고 우리는 더 잘 싸우기 위해서 또 싸웠지. 우리의 전략은 이래야 한다고, 우선순위는 이런 거라고, 업무 분담은 어때야 한다고 싸웠어. 어제까지 우리는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이자 같은 뜻을 가진 동지라고 느꼈다가도, 오늘은 또 태어나서 이토록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외쳤어. 때로는 호모포비아보다 네가 더 미웠어. 그 사람들에겐 애초부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잖아. 그런데 너는 나와 같은 목표를 바라보며 함께 성장하고 있었잖아. 우리는 비슷한 가치를 추구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