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버스를 만난 건 그의 출근 직전이었다. 그는 저녁 근무 조여서 늦은 점심을 먹은 뒤에 시간을 낼 수 있었다. 그가 때때로 긴장하며 질문마다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반면, 답변은 짧고 간단했다. 대화 중 여러 번 다시 물음을 던져야 마침내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처음에 자기소개를 해달라고 하자 유니버스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페미니스트이면서 커피 체인점에서 일하는, 신념을 팔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유니버스에게 신념을 판다는 건 포기와 타협을 의미한다. 버려지는 많은 소모품과 부재료를 볼 때, 일상에서 동료들의 폭력적인 언행을 묵인하거나 불의를 보고도 그냥 넘기는 순간에 특히 그렇게 느낀다.
저는 평범하게 초, 중, 고등학교를 공부하면서 지냈어요. 재수해서 사회대에 입학했고, 그게 제 인생 최고의 전환점이었죠. 제 삶의 지향성이나 어떤 신념이 세워진 곳이 바로 대학이었습니다. 남들은 대학이 의미 없다고 하지만, 저에게 대학은 새로운 이야기가 넘치는 곳이었고, 저의 이야기를 비로소 할 수 있는 곳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대학에 오지 않았다면 저의 삶이 억압으로 가득했을 거로 생각합니다. 저 혼자서는 결코 깨지 못할 억압으로요.
열심히 학교에 다녀서 수료했고, 지금 커피 체인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진로가 확 바뀌었는데, 그래서 이 상황이 더 어려워요. 겨우 몸에 맞는 옷을 입었는데, 다시 옷에 맞는 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죠.
Q. 어제는 뭐 했는지 얘기해주세요.
A. 어제는 휴무라서, 일어나서 비염 때문에 병원에 갔어요. 집에서 나가기 싫었지만, 독일에 간 친구한테 보낼 택배가 있어서 어차피 나가야 했어요. 치료받고 우체국 들러서 국제 택배를 처음으로 접수해봤어요. 되게 어렵고 비싸더라고요. 집에 와서는 요즘 돈을 너무 많이 쓴 것을 한탄했어요. 월급까지 강 같은 거리가 남았는데 내 삶은 이제 어쩌나. 반찬을 꺼내서 저녁을 챙겨 먹고, 냉동실에 있던 아이스크림을 먹으려고 하는데 너무 안 녹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녹이며 누워있다가 잠들었어요. 두시간쯤 자고 중간에 일어나서 샤워하고 다시 자려고 했는데, 잠이 잘 안 와서 고양이도 만지고 앞으로의 인생도 걱정했어요. 2018년의 나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 내일은 난 무엇을 하나, 그런 생각을 하다 잠이 들었습니다.
하루살이 말고,
20년 후를 상상할 수 있는 삶
Q. 평일이었는데, 유니버스에게는 휴일이었나 봐요.
A. 네. 원래 쉬는 날이 랜덤으로 한 주에 두 번 있거든요. 스케줄 나오는 거에 따라 좀씩 달라요. 근데 어제는 운 좋게 투오프(2-off)를 받아서 연속 이틀을 쉬었어요. 여기서 일하기 전에 주말이면 토요일 일요일 연속으로 쉬던 것처럼, 오랜만에 그렇게 쉬니까 기분이 이상하더라고요. 나는 일요일 같았는데 사람들에겐 단지 목요일이잖아요. 남들 쉴 때 일하고 남들 일할 때 노는 게 좋을 줄 알았는데, 역시 남들 놀 때 노는 게 좋은 것 같아요. 남들과 다르면 흐름이 깨지더라고요. 특히 연말에는 크리스마스나 12월 말일처럼 다들 들떠서 놀고 있는데, 저는 그 사람들을 바라보고만 있는 시간이 많았어요. 기념일이나 명절에는 나도 쉬고 싶은데, 나는 일을 하고 있으니까. 저는 사실 만날 사람도 별로 없긴 하지만 그냥 휴일을 예상할 수 있는 직업이 좋은 것 같아요. 휴일을 예측할 수 없다는 건 계획을 세울 수 없어서 하루살이 같은 기분이에요.
Q. 그랬겠어요. 그러고 보니 해도 바뀌었고. 앞으로의 삶의 방향을 조금씩 생각하게 되는 시기인 것 같아요.
A. 네. 새해에는 좀 더 또렷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어쩔 수 없는 건 포기하되, 포기에 익숙해지는 사람이 되지는 말자고 다짐했어요.
Q. 또렷한 사람이라. 어렵네요. 삶의 목표나 신조 같은 게 있나요?
A. 20년 후를 상상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어요. 여기는 선배들이나 동료들이 다 저랑 나이가 비슷해요. 많아도 삼십 대 후반. 롤모델도 없고 미래가 상상이 잘 안 돼요. 앞으로 진로를 결정할 때는 돈 외에도 긴 시간을 이 일과 함께할 수 있는지를 꼭 생각해보려고요. 그러려면 내 인생에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일인지도 중요한 것 같아요.
Q. 유니버스에게 의미가 참 중요한가 봐요.
A. 여성의 삶은 그런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자질이 있어도 여성이라 장벽에서 걷어차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줄곧 저임금을 받고 승진에도 제약이 있으니까, 의미라도 찾을 수밖에 없어요. 의미까지 없으면 왜 일을 하며 사는지 스스로 설득이 안 되니까요.
Q. 지금의 일에는 그다지 만족하지 않아 보이는데, 그럼 나중에는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요?
A. 하고 싶은지는 좀 고민인데, 저는 그냥 50대의 활동가가 될 것 같아요. 사실 주변에서 접한 나이 든 여성의 모습들이 많지는 않아요. 집회나 기자회견에서 발언하는 분들의 모습이 머리에 떠오르는 전부에요. 열심히 읽고 이야기하고 그런 모습들이요. 그래서 저도 그럴 것 같아요.
Q. 활동가면 어떤 활동가요? 지향하는 바가 있나요?
A. 그냥 여성운동을 하고 싶어요. 제 삶과 가장 닿아있으니까요.
화사하고 밝고 찬란하고 빛나고 아름답지 않은
Q. 오늘의 인터뷰 주제에요. 살면서 ‘나는 ~답지 않다.’라고 느낀 적이 있나요?
A. 저는 ‘20대 여성’답지 않은 것 같아요. 미디어에서 말하는 20대 여성은, 화사하고 밝고 찬란하고 빛나고 좋은 수사들이 가득 따라붙잖아요. 심지어 아름답고. 그런데 제가 겪는 20대는 혼돈의 카오스에요. 슬픔과 우울, 포기와 순응의 연속, 뭐 이런 것이라… 답지 않다고 하면 20대 여성답지 않은 게 가장 먼저 생각나네요.
Q. 서울에서 청년 여성으로 사는 삶에 관해 어떻게 느끼는지 듣고 싶어요.
A. 음, 사실 서울, 청년, 여성 모두 저랑은 다 안 가까운 것 같아요.
Q. 의외네요. 서울에 살고 있으신데, ‘서울’도요?
A. 서울에 살긴 사는데 주거가 불안정하거든요. 터전이 불안하니까 막상 서울이라고 하면 거리감이 들어요. 청년도 마찬가지예요. 청년이라고 하면 좀 힘차게 ‘으쌰으쌰’하는 분위기인데 내가 경험하는 청년은 또 다르고. 여성이야말로, 저는 여성에 소속감을 느껴본 적이 별로 없어요. 당연히 여성인가 싶긴 하지만, 나를 여성으로 분류해서 여성의 입장에서 이야기하자면 뭐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Q. 여성 운동이 가장 삶과 맞닿아있다고 하신 건 다른 맥락인가요?
A. 아 그건 ‘여성’보다는 페미니즘 운동을 말한 거고, 제가 여성으로 대표되는 것과는 좀 달라요. 저는 페미니스트 동지들에게 깊은 동지의식을 느끼고, 함께 있을 때 가장 안정감 있고 편안하고, 제 신념이 페미니즘을 지향하기에 운동하는 거지, 여성이라는 집단을 제 삶과 강렬하게 동일시하기 때문은 아니에요.
Q. 마지막으로 요즘의 사소한 고민 하나만 얘기해주세요. 반드시 사소해야 합니다.
A. 아 제가 요즘에 집을 구해야 해서 대출을 받으려고 하는데, 그 조건이 단독세대주여야 하거든요. 별로 사소하지 않은가요?
Q. 네 좀 거창하네요, 하하.
A. 아 그러면, 다른 거. 저희 고양이 양치를 시켜야 할 텐데, 고양이가 난폭하거든요. 난폭하다기보다는 겁이 많아서 방어적인데, 그래서 제가 못해요. 내가 돈이 많으면 양치 선생님을 불러서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결국 제가 돈이 없어서 고양이 이빨도 다 썩으면 어떡하나…
Q. 고양이와 함께 사는 기분에 관해서도 듣고 싶어요.
A. 늘 위안이 되고, 마음 한쪽이 짠해요. 더 좋은 걸 먹이고 싶고, 더 좋은 스크래처라도 놔주고 싶은데 못 그러거든요. 언젠가 얘네들이 없을 때를 생각하면 어떻게 사나 막막해요. 지금에야 제 품 안에 있지만, 나중에 고양이 별로 돌아간다면… 당장 내 새끼들 먹여 살리기 위해 낙동강 오리 알 되지 않게 지금 힘들어도 일해야죠. 사실 그거에요. 제가 돈 벌고 일하는 이유.
처음부터 하고 싶은 건 별로 없었고, 할 수 있을 것 같은 건 활동가여서 그걸 꿈꿨던 유니버스. ‘정말 활동가를 하는 건가?’ 하는 망설임에 다른 길을 기웃거려보고 싶었다. 엔터테인먼트와 서비스업에서 잠깐씩 일해보니, ‘역시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사는 것 같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직업 활동가는 신념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맞닿을 수 있는 일이기에, 지향에 어긋나서 괴로운 건 좀 덜하지 않을까 기대한다. 그러나 그는 덧붙인다. ‘물론 별로 안 그럴 수도 있겠지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