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지 않은 사람들 시즌 2 1. '공급자'답지 않은 한슬

생각하다인터뷰여성 청년

답지 않은 사람들 시즌 2 1. '공급자'답지 않은 한슬

유의미

일러스트레이터: 이민

‘답지 않은 사람들’은 동시대의 다양한 사람들의 세계를 여성주의적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이야기입니다. 틀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살아남아 존재를 증명하는 과정, 타협하며 지내는 사람들이 견고한 세상에 때때로 균열을 내는 방식, 기록되지 않아 주의 깊게 들어본 적 없는 일상적인 목소리에 관심이 있습니다. 서울에 사는 청년 여성들을 만나, 서로의 삶과 고민을 나누고 위로를 주고받으며 우리의 연결을 꿈꿉니다.

 


청년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경영학과 졸업하고, 스타트업처럼 대단한 걸 스스로 주체적으로 해야 할 것 같은 이미지인데, 저는 그런 청년 이미지에 부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 사실 잘 모르겠어요.

서울 송파동의 아담하고 조용한 카페에서 한슬을 만났다. 차분한 색상의 인테리어가 단정하면서도 감각적이어서 한슬과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들어오자마자 ‘청년’의 의미를 묻는 게 인상적이었다. 인터뷰를 시작하자 그 고요한 공간에 한슬의 아나운서 같은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시원하고 담백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이었다. 해야 할 말을 정확한 발음으로 명확하게 전달했다.

Q. 한슬은 어떤 사람인가요? 간단히 소개해주세요.

A. 어떤 사람이냐고 하면 성격을 말해야 할지 뭘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현재 상황은, 부동산 개발 회사에서 2년 5개월 동안 일을 하다가 그만두고 쉬고 있는 사람입니다. 다들 생소해 하던데, 땅을 사서 건물을 짓고, 지은 건물을 분양하거나, 상업 시설의 경우에는 임대하는 일이었어요.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Q. 그만둔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A. 일단, 지금은 살짝 좀 후회하고 있는데요. (웃음) 그만둔 이유는, 재미없고 이런 걸 떠나서, 좋은 일을 하는 것 같지 않아서요. 부동산이라는 게 아무리 좋은 취지로 새로운 공간을 만든다 해도, 결국은 자연을 훼손하든 원래 있던 원주민을 쫓아내든 하니까요. 아무리 땅을 새로 다지고 좋은 공간을 만들려 해봐도, 지속적인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같이 입사한 회사 동기가 여덟 명인데 네 명이 그만뒀어요. 각자의 이유가 있었지만 그만둔 친구들 보면, 부당한 걸 보면 겉으로는 맞춰줘도 마음 속에 분노가 쌓이는 사람들인 것 같아요. 절이 싫어서 중이 떠난거죠. 요즘 젊은이들 끈기 없다고들 하지만, 저는 조금 더 용기있는 선택을 했다고 생각해요. 물론 잘 버티고 있는 친구들도 정말 대단하고요.

Q. 어떤 부당한 일이 있었나요?

A. 저는 회사의 성차별, 성희롱을 참지 않았어요. 한 남자 대리님이 제 동기의 졸업식 사진을 보고 ‘(헤어랑 메이크업에) 돈 쓴 티가 나네.’ 한 적이 있어요. 제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서, 조용한 사무실에서 다 들리게 ‘너무 평가하시는 거 아니에요?’하고 한마디 했어요. 근데 아무도, 정말 아무도, 여자선배조차도, 반응을 안하고 그냥 그렇게 지나갔어요. 근데 한시간 뒤에 그 대리님이 제가 일하고 있는데 갑자기 제 의자를 발로 차는 거에요. 너무 당황했지만 그냥 웃으면서 ‘지금 뭐하시는 거에요?’ 했는데, 별 말없이 넘어가더라고요. 그때 그 한 마디라도 안 하면 그런 식의 성희롱적인 발언이 더 대물림될 거 같았어요. 제 말이 직접적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할 수 있는 걸 한것 같아요.

Q. 한슬님이 좋아하는 건 무엇인가요?

공간 정말 좋아하고요. 영화도 좋아하고. 요즘에는 책도 좋아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여성, 되게 좋아해요. 좀 전형적이죠?

Q. 전혀요! 공간을 좋아한다는 게 정말 특이한데, 무슨 이유가 있나요?

직업병의 일환일 수도 있고요. 저는 앞으로도 공간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살고 싶어요. 어떻게 보면 물리적으로는 면과 면이 만난 게 하나의 공간인데, 그 공간이 많은 가능성을 가지잖아요. 새로운 사람들이 관계를 형성하는 장이 될 수도 있고, 오감이 즐거워지는 장이 될 수도 있고, 관계를 맺든 새로운 생각을 탁 틔우는 요소가 됐든 콘텐츠를 담아내거나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공간이 좋아요.

처음 회사를 들어갈 때는 적당히 근무조건이 나쁘지 않은 상식적인 회사를 가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제가 공간을 이렇게 좋아하게 될지 몰랐어요. 주어진 일을 그냥 열심히 했고, 그렇게 열심히 하다가 제가 기획에 참여했던 공간이 실제로 딱 구현됐을 때, 정말 ‘아, 이거 평생 해야겠다.’ 느꼈어요.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공간에 대한 관심을 확장하면 도시에도 관심이 많아졌어요.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하고 있어요. 개인적으로 익선동을 불매하고 있어요. 부동산업자가 앞장서서 서울에 얼마 남지 않은 한옥마을을 개조해서 사실 원주민에게는 필요 없는 ‘핫플레이스’를 만들어버린 곳이거든요. 기존 한옥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보니까 소음 문제부터, 관광객들이 몰려와서 일상생활까지 원주민들은 불편함을 많이 느끼게 됐어요. 그럴싸한 논리를 붙여 좋은 취지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컨텐츠들이 꼭 익선동에서 이루어질 필요는 없던 것들이에요.

한국은 계획도시 형태가 많다보니 일단 땅을 개간하고 건물을 지으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들고 알아서 살겠지 하는 공급자 마인드가 강해요. 건물을 분양할 때도 공급자와 수요자가 만나서 계약하는 경제적인 측면만 부각되고, 임대할때도 원래 이 지역에 어떤 문화적 역사적 배경이 있었는지 모른 채 일단 땅을 개간하고 도시의 생태를 무너뜨려요. 예전에 젠트리피케이션을 다루는 기사에서 ‘치워지는 사람들’이라는 워딩을 봤는데, 딱 그거 같아요. 이게 부당하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국가가 땅을 소유해서 기준에 의해 안전하게 살 권리를 보장해주지 않는 이상 방법이 없는데 이건 현실적인 결론이 아니잖아요. 부동산이 한편으로는 저에게는 새로운 공간을 꾸릴 수 있는 기회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제가 새로 꾸릴 그 공간에 원래 계셨던 원주민들은 ‘치워진’ 거잖아요. 단순히 공간만 볼 게 아니라 도시까지 확장해서 사람과 공간과의 관계에 예민해져야겠다는 생각을 요즘에 많이 합니다.

Q. 삶의 낙이 있다면 뭔가요?

A. 삶의 낙이라고 하니까 되게 좋네요. 저는 역마살이 있는지, 매일 하루에 한 번은 꼭 나가야 하는 사람이거든요. 이건 어릴 때부터 좀 그랬어요. 집에만 있으면 닭장에 갇힌 기분이에요. 환기를 시켜도 답답하고. 요즘은 매일매일 운동을 하려고 노력해요. 집에서 2분 거리의 헬스장에서 요가랑 필라테스를 해요. 한동안 못가긴 했지만 오늘부터 다시 갈 거예요! 그게 제 삶의 낙이에요. 아, 그리고 요즘에 친구들이랑 책모임을 매주 일요일마다 해요. 그것도 삶의 낙이에요. 이번엔 ‘파우스트’를 읽고 있어요. 읽다 보니 괴테도 여혐러였지만요! 모임은 각자 독서 노트에 마음에 드는 책 구절, 같이 생각해볼 구절이랑 생각 간단하게 적고, 모여서 생각한 부분들 공유하는 자리에요.

Q. ‘~답지 않다’고 생각한 적 있어요?

A. 저는 청년이라는 말이 너무 이질적이에요. 나이상으로는 청년이 맞겠지만, 청년이란 단어에는 여성성이 배제된 느낌이라서.. ‘도전에 실패해도 괜찮아.’ 같은 말이 기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요.

Q. 여성에는 이질감을 안 느끼세요?

A. 네, 저는 여성이라고 생각해요. 어떻게 보면 전형적인 여성. 전형적인 여성이라는 게 슬프게도 그런 것 같아요. 성희롱당한 경험이 있고. 사실 이게 필수조건일 필요는 없는데. 한국 여성 대다수가 성희롱, 성차별 발언 안 들어 본 사람 없잖아요. 저 또한 그래요. 저는 한국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강해요.

Q. 서울에서 청년 여성으로 사는 것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A. 서울은 하나의 권력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하던 영화 워크숍에 차비를 왕복 십만원 이상 쓰면서 부산에서 왔다 갔다 하는 분이 있었어요. 대구에 있는 친구도 실제로 지방에는 그런 게 별로 없다고 하더라고요. 대외활동을 하거나 새로운 걸 경험하려면 서울에서 하는 게 더 수월한 거죠. 취업을 하려면 스펙을 쌓아야 하는데 그런 기회가 서울에 집중되어 있잖아요.

여성으로 산다는 건, 저는 화장실 구멍이 생각나요. 정말 사회가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작년에 불법 촬영 편파 수사를 규탄하는 ‘불편한 용기’ 시위가 있었어요. 그런데 웃기게도, 시위가 수사를 방해하는 사회 전체의 카르텔 이슈까지 확대댈수록 화장실에 있는 구멍들은 점점 더 많아지더라고요. 내가 이렇게 나가서 얘기하고 있고 아주 많은 여성들이 거리에서 조금이라도 가시화가 되도록 더 열심히 시위를 하고 있는데, 오히려 구멍은 더 많아진다는 게 참 씁쓸했어요.

얼마 전에는 오랜만에 친구랑 둘이 제주도 여행을 갔어요. 최근 삼년 정도 계속 여행을 남자친구랑 다녔거든요. 여자인 친구랑은 되게 오랜만에 간 건데, 무척 다르더라고요. 남자친구랑 다닐 땐 겪지 않아도 될 불쾌한 상황을 겪는다거나. 삼년 동안 그걸 잠깐 망각했어요. 내가 아무런 차별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할만큼. 갑자기 그 모든게 확 느껴져서 ‘아 맞다 이게 바로 여성의 일상이지, 난 잠시 남자친구라는 감투를 쓰고 있었구나’ 했죠.

Q. 남자친구와 페미니즘에 대한 입장 차이는 없나요?

A. 남자친구의 여동생이 페미니스트예요. 그래서 여동생한테 얘기도 많이 듣고, 본인이 많이 찾아보기도 하고. 그런 사람이라서 만났어요. 아무래도 그조차도 한국 남성이기 때문에 완벽할 수 없을 때도 있고요. 그럴 땐 그냥 제가 말해요. ‘너 되게 한남 같다.’하고. 그러면 되게 충격받아요. 자기는 항상 조심하려고 하는데 부족하구나 싶어서 반성하고요. 그러니까 제가 만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런 태도가 없었으면 아마 만남조차 고려하지 않았겠죠. 아, 근데 맨스플레인은 좀 하는 거 같아요. 자기가 아는거 있으면 1부터 10까지 다 알려주고 설명 하고 싶어하고. 그런 거는 그냥 전형적인 한국 남성이죠. 그래도 젠더나 차별과 같이 민감한 부분에 대해서는 ‘이건 아닌 것 같아.’ 하고 생각하는 포인트가 서로 비슷해요. 제가 이건 아닌 것 같다고 하면, 자기도 아닌 것 같다고 하고. 좋아하는 거, 취향은 다른데,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게 비슷해서 좋은 것 같아요. 하하.

한슬은 여성 간의 연대에 관심이 많다. 소외된 사람들과 사회적 약자를 생각하고, 정의롭지 않은 일을 보면 외면하지 않고 목소리를 낸다. 어떤 관계에서든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데까지 하는 게 멋진 사람이다.

제 닉네임도 ‘한남 슬레이어(slayer)’라는 뜻이에요. 사실 요즘은 저에 대해 알아가는 중인데, 지금 남자친구와 헤어지면 또 다시 남자를 만나는 건 별로 상상이 안 되고 아마 여성을 만날 것 같아요. 한국 남자가 위험해서 여성을 만나야겠다는 대안의 성격이라기보다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제가 여성을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점점 확신처럼 변해가요. 친구들한테 이 얘기를 했더니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에요. 아, 엄마는 좀 이상하게 보시더라고요. ‘뭔 소리야? 너 그런 퀴어 영화 많이 봐서 그런거야.’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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