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길과 지뢰를 피해 털고 일어나 만나는 <3n의 세계> 박문영 작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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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길과 지뢰를 피해 털고 일어나 만나는 <3n의 세계> 박문영 작가 인터뷰

신한슬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정말 웃기지 않았던 농담들. 돌아보면 참 따스했던 순간들. 자꾸 돌아보게 되는 어린 날의 매듭들. <3n의 세계>는 이처럼 30대가 되어서야 몸으로 느끼게 된 것들에 대해 찬찬히 돌아보는 에세이와 생활툰의 경계에 있는 책이다. 박문영 작가는 20대에서 30대로, 미혼에서 기혼으로, 수도권에서 지방으로 이동하는 동안 남겨보는 '허름한 표류기'라고 적었다. 너와 나의 30대의 세계를 담담하게, 하지만 있는 그대로 기록한 박문영 작가를 <핀치>가 인터뷰했다.

<3n의 세계> 중에서

 <3n의 세계>가 나오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조이 디비전이라는 영국 밴드를 많이 아실 거예요. 뉴오더의 전신으로 소개되곤 하죠. 조이 디비전은 음지, 뉴오더는 양지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 없지만 컴컴하고 폐쇄적인 사운드를 만들던 이들은 한 멤버의 죽음을 계기로 이전보다 밝은 음악을 하게 됐는데요. 10대에서 20대 초의 저 역시 어두운 것만이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발화법을 잘 소화할 수 없었어요. 유머와 아이러니로 드러낼 수밖에 없는 진실은 차차 다루게 된 것 같아요. 

좋아하는 식물 중에 구골나무가 있는데요. 모든 개체가 그런 건 아니지만, 이 친구들은 성장기에 잎이 뾰족했다가 어느 정도 자라난 후엔 잎사귀가 동그래져요. 외부자극에 대해 방어력을 높였다가 숨을 돌리고 나면 각을 줄이는 거죠. 

인간 다수의 생장기도 구골나무와 비슷한 것 같아요. 논픽션에 가까운 에세이를 어떻게 쓸지 주저했지만 30대의 일원으로 입을 열어보자 생각했어요. 공포와 염증이 치솟던 날과 온기로 마음이 놓였던 날들을 조촐히 엮어보자고요.

작업복을 입고 누워 있는 표지 속 ‘골골’의 포즈가 인상 깊어요. 편안해 보이면서 어딘가 무기력해 보이기도 하고, 오래 있으면 허리에 안 좋을 것 같기도 합니다. 이 친숙한 자세로 표지를 고르신 이유가 있을까요?

정면 바스트 컷도 그려봤는데 무섭다는 분들이 있어서, 전신 컷이 표지로 확정되었어요. 디자이너분이 의도하신 건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림 배치를 보고 골골이가 투명한 경사로에 기댄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들더라고요. 

표지는 여러 감상이 가능할 것 같아요. 말씀대로 편안하면서도 무력한 모습도 맞아요. 침울한 시기를 보내는 분에게는 골골이가 사선으로 한없이 미끄러져 내리는 것처럼, 잠을 푹 주무신 분이 보면 골골이가 잠깐 쉬는 것처럼 보일 것도 같아요.

‘골골’이라는 캐릭터는 책 속에서 작가님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데요. ‘골골’을 고양이 얼굴로 표현하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가장 큰 이유는 갖가지 입력 정보로 눈이 시릴 때, 고양이 얼굴이 시각 공해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겠죠. 잠들기 전에 동물 동영상을 자주 보는데 심신이 완전히 이완되면서 세상에 이런 존재들이 있어서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철저히 귀엽고 감동적인 영상에 따르는 감상이긴 하지만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도 있어요. 골골이 얼굴이 제 얼굴과 다르니까, 작업이 덜 무섭더라고요.

<3n의 세계> 중에서

 <3n의 세계>를 읽으며 아주 자세하고 구체적인 일상의 기록이라는 점이 무엇보다 마음에 닿았습니다. 예를 들면 남에게 들었던 사소하면서도 따스하고 좋은 말을 이 책을 읽는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전해지도록 당시 상황과 함께 구체적으로 서술한 부분이 좋았어요. 보통 고통스러운 기억은 생생하게 오래 가지만, 슬프게도 사소하고 따뜻한 기억은 잊혀지기도 하잖아요. 

20대부터 30대로 넘어가는 이 시기의 구체적인 기억을 모아 놓으신 비결이 있을까요? 일상을 메모하거나 일기를 쓰시는 편인가요?

이상하게 미세한 걸 잘 기억하는 편이에요. 그림일기는 10년 넘게 써온 것 같아요. 누군가 이런 기록이 다 뭐냐고, 너무 징그럽다고 넌더리를 낸 적도 있는데요. 세상을 연역적으로 대하기 어려운 저는 이런 수집을 통해서 환경과 나름의 관계망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일기장이 무거울 때는 아이폰 메모장과 블로그 비밀게시판을 이용해 단상을 남기곤 해요. 적어두지 않으면 곧장 사라지는 생각들이 많고, 그런 씨앗은 기억해내려고 할수록 멀어지더라고요. 

예전엔 이런 의문이 있었어요. 일기를 채우기 위해 하루를 다 쓰는 건 아닌가, 매일의 후기가 반드시 유의미한가, 뭘 쓰긴 쓰고 있다는 자족감이 해로운 건 아닌가, 픽션을 만들 기력을 여기 다 쏟는 건 아닌가, 일기장이 사라지면 나도 소멸하는 건 아닐까. 

물론 일에 치이거나 여건이 안 될 때는 일기가 중단되기도 해요. 혼자 남기는 글과 그림에 독자와 마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걸 픽션으로 활용하기 위해 쓰는 것도 아니에요. 다시 들춰보는 일도 거의 없어요. 그런데 아무 소용 없는 기록을 남긴다는 게 제겐 스트레칭처럼 중요한 것 같아요.

<3n의 세계> 중에서

책에 실린 글이 저에게는 모두 일러스트 같은 느낌이에요. 대부분의 일러스트는 순간을 포착해서 그려 놓잖아요. 20대에서 30대로 건너가며 치러가는 고단한 일상 가운데, 작더라도 앞으로의 인생에서 놓치기 싫은 소중한 정서나 생각을 잘 꺼내서, 그것을 만난 순간과 함께 포착한 느낌입니다. 

그림을 그릴 때와 글을 쓸 때, 작업하는 과정이나 방식이 어떻게 다르신지, 혹은 비슷하신지가 궁금해졌어요.

우선 그림도 글도 처음 착상 그대로의 결과물을 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건 글로 써야겠다, 저건 그림으로 드러내야겠다, 같은 분리를 명확하게 하는 편은 아니에요. 판단이 뒤바뀌기도 하고요. 

다만 이야기가 조금 진척되었을 때 더 적절한 표현 매체를 떠올릴 수 있어요. 어떤 줄거리는 시각적인 요소가 많아 만화로 만들려고 했는데 이미지가 너무 센 장면을 지문으로 처리하다가 아예 소설로 바꾼 적도 있어요. 어슴푸레한 감정을 선명하게 보여줄 때는 글이, 선명한 감정을 어슴푸레하게 보여줄 때는 그림이 나았던 것 같아요. 

글, 그림 작업 과정의 공통점이라면 앞발로 새 문서와 포토샵 레이어를 만들 수 있는 고양이들이 있으니, 파일 저장을 수시로 해야 하는 점이랄까요. 덧붙여 두 작업 모두 인풋이란 핑계로 딴짓을 하다 만들게 돼요. 저는 컴퓨터를 켜자마자 단번에 할 일 폴더를 여는 유형이 아니라서요. 충분히 서성인 후에는 별다른 요령이나 고효율 장비 없이 아날로그 노동자 모드로 작업을 하는데요. 그림과 달리 글은 소음이 적어야 쓸 수 있어요. 그림을 그릴 땐 팟캐스트든 뉴스든 아무거나 듣는데 글은 사람 목소리가 들리는 공간에서 진도를 내기 어려워요. 서사까지 뚜렷하면 아무리 애를 써도 그 자장에 먹혀버려요.

박문영 작가

10년 전만 해도 저는 30대 여성에 대한 혐오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대표적으로 ‘여자는 25세부터 꺾인다’는 끔찍한 말이 있었습니다. 작가님은 우리 사회가 ‘3n살 한국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어렵게 대하는 것도, 쉽게 대하는 것도 온통 마음에 안 들어요. 여성을 이해할 수 없는 대상으로 치부하는 게 그런 응대의 전제라고 생각해요. 웃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웃으면 무례해지니까요. 

특히 3n세부터의 여성은 본인 예상과 다르게 주관이 있어 보이니까 쭈뼛거리며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의견과 인격은 태어나 살아가는 사람 모두에게 있다는 사실을 외우라고 하고 싶어요. 여성을 사이즈, 마인드, 초이스로 대하는 자들의 수는 많고 그 역사도 길죠. 그만큼 성적 물화도 집요하고 다채롭게 이뤄지고요. 너는 되고 나는 안 돼? 이걸로 만족하라고? 기분 한 번 긁힌 걸 왜 우주 전체가 다친 듯이 구는데? 3n, 4n, 5n세부터 평생에 걸쳐 진행되는 여성들의 시작점을 뭉개고 눙치는 태도는 그래서 계속 비판해야 할 것 같아요.


한편 주변의 시선보다는 3n살 여성 스스로의 생각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핀치>에는 <80년대생 미즈킴씨>라는, 각자의 인생을 살아나가는 평범한 3n살 여성들의 연쇄 인터뷰 시리즈가 있어요. 그 시리즈의 공통 질문을 작가님께도 여쭤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에서 3n세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어떻게 적으시겠나요?

세상을 이해하는 만큼 세상에게 이해받지 못하지만, 이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3n의 세계>를 3n세를 통과한 사람들은 귀엽게, 3n세가 아직 안 된 사람들은 낯설게 읽어주길 바란다고 쓰셨습니다. 그렇다면 같은 3n세인 사람들이 이렇게 읽어주었으면, 하는 부분이 있을까요?

과한 욕망이지만, 3n세 분들에게는 책이 전우처럼 느껴지면 좋겠어요. 함께 흙두렁길과 지뢰를 피해 방공호에 도달한 기분이면 바랄 게 없어요. 역경과 고난은 또 펼쳐지겠지만, 엉덩이의 모래를 털고 일어날 때 말없이 눈만 봐도 저릿할 듯해요. 웃음도 터질 것 같고요.

생활과 유리된, 다만 빛나고 덧없는 것들이 그에게 우연하게, 필연하게 가닿는 날이 있길 바란다.

책 중에서 이 문장이 인상 깊어요. 미래는 불안하고 사치는 죄가 되는 서민의 일상을 사는 몸으로, 그런 ‘빛나고 덧없는 것들’에 위로 받았던 순간이 떠올라서요. 작가님이 특히 아끼는 ‘빛나고 덧없는 것들’이 있다면 몇 가지 소개해주시겠어요? 

빛나고 덧없는 것들의 목록은 장대하니 그런 순간을 선물했던 행동들을 소개해볼게요. 

같이 할 수 있는 일로는 친구와 강변에서 가오리연 날리기, 초등학생들과 배드민턴 치기, 의견이 전혀 다른 사람과 며칠이고 토론하기 등이 있고요. 

동행 없이 주로 혼자 하던 짓은 이런 거에요. 왕복표만 끊어두고 목차는 미정인 여행 가기, 좋아하는데 곧 망할 수도 있는 출판사의 책 사들이기, 간단한 업무 메일을 질릴 때까지 퇴고하기, 대신 목소리를 내주는 단체를 위해 정기 후원하기, 세련되지 않고 값도 꽤 나가는 독립잡지 구입하기, 데스크에 앉아있는 작가가 은밀히 뿜어내는 자의식을 견디며 전시 보기, 모자란 자본으로 어떻게든 머리를 맞대 만든 영화 관람하기, 공항에 앉아 출입문 구경하기, 비디오방 가기, 잠수함 타기, 난해한 뮤직비디오 줄창 보기, 시인의 말이나 작가 후기 오래 읽기, 아무 버스에나 올라 종점 근처의 자판기 코코아 한 잔을 마시고 돌아오기.


마지막으로 대한민국의 3n세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한 마디 격려를 남긴다면?

자신의 의지와 무관했던 불행을 창피해 하지 마세요. 그 조건을 공격하는 사람이 후진 겁니다.

<핀치>에서 <3n의 세계> 박문영 작가와 함께 '여성의 몸으로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마련했어요. 박문영 작가를 직접 만나, 일상을 기록하는 비결을 물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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