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다룬 다큐멘터리는 의외로 호불호가 분명하게 갈리는 장르다. 아무래도 아름다운 자연 풍경에 차분하고 톤이 일정한 나레이션이 깔리다 보니 졸려서 못 본다는 사람들이 많다. 나 역시 피곤한 하루의 마지막 순간, 소파에 누워서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스르르 잠에 빠진 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연 다큐멘터리를 사랑한다. 이토록 다채로운 생명들이 필사적으로 살아가는 지구에서 인간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인간은 상상하지도 못했던 창의적인 행동, 화사한 빛깔, 절묘하게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생존 전략. 이보다 더 흥미진진하게 흘러가는 드라마도 없다. 그 중에서도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새들과 춤을>은 평소 다큐멘터리...
유성애자에게는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 매력적이고 믿을 만한 사람과 로맨틱한 관계를 시작하고 싶다는 욕구가 마구 솟아나는 순간이 있는 것 같다. 나에게는 스물두살이 그랬다. 사회의 압력 때문은 아니었다. 대한민국 전체가 여자와 남자 둘이 붙어 있으면 전부 이성애와 연관시키고, 연애 못하면 무조건 루저 취급하는 이성애 집착 사회였던 건 10대 때도 스무살에도 스물한살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때는 그다지 연애를 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매체가 이성애 연애 타령을 하는 와중에 아무 생각도 욕구도 없는 내가 이성애자는 맞는지, 유성애자는 맞는지 고민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너무나 연애가 하고 싶은 것이다. 성적인 욕...
“사랑에 빠지면 늘 무언가를 창조하는 느낌일까?” 오랫동안 로맨스 영화는 곧 클리셰 영화라고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직간접적으로 접했던 수많은 이성애 로맨스 영화들은 남자는 이렇고, 여자는 이렇고, 사랑은 이렇고, 마치 고정관념을 가르치는 교과서처럼 재미없고 비슷비슷했다. 오죽하면 로맨스 영화의 클리셰를 비웃는 것만으로도 영화가 한 편 나올 정도다(넷플릭스 <어쩌다 로맨스>). 사랑을 다루는 영화가 싫은 게 아니다. 판에 박힌 이성애각본을 전제로 한 사랑 영화가 싫었다. 신랑의 친구가 신부를 사랑해서 영상 좀 찍어 달랬더니 죽어라 신부만 클로즈업해서 촬영하고, 스케치북에 글을 써서 고백하고, 이런 게 멋있나? 설레나?...
산타클라리타,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교외의 베드타운. 인구 20만에 열두달 내내 영상 18도씨 이상을 유지하는 쾌적하고 따뜻한 곳. 살기 좋고, 조용하고, 찍어낸 듯한 집들이 이어진 곳. 이곳에서 부동산업을 하며 평범하게 살아가던 부부, 쉴라와 조엘. 그런데 어느 날, 쉴라가 갑자기 좀비가 된다. 아무 이유도 없이, 아무 맥락도 없이! 이제 신선한 사람 고기가 아니면 먹고 싶지 않은 쉴라와 어쨌든 그를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조엘, 그리고 부모의 변화를 눈치 챈 딸 애비의 우당탕탕 비밀과 모험....
메이크오버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나름대로 역사가 있는 장르다. 최악의 상황에 놓여있던 주인공이 전문가의 손길로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탈바꿈하는 신데렐라 스토리가 메인이다. 도저히 같은 장소 또는 대상이라 믿을 수 없는 ‘비포어’와 ‘애프터’ 화면이 점프컷으로 이어지면 시청자는 감탄한다. 한국에서 방영한 추억의 <러브하우스>나 최근 논란을 일으킨 <골목식당>도 이런 메이크오버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정말 웃기지 않았던 농담들. 돌아보면 참 따스했던 순간들. 자꾸 돌아보게 되는 어린 날의 매듭들. <3n의 세계>는 이처럼 30대가 되어서야 몸으로 느끼게 된 것들에 대해 찬찬히 돌아보는 에세이와 생활툰의 경계에 있는 책이다. 박문영 작가는 20대에서 30대로, 미혼에서 기혼으로, 수도권에서 지방으로 이동하는 동안 남겨보는 '허름한 표류기'라고 적었다. 너와 나의 30대의 세계를 담담하게, 하지만 있는 그대로 기록한 박문영 작가를 <핀치>가 인터뷰했다. <3n의 세계> 중에서 <3n의 세계>가 나오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조이 디비전이라는 영국 밴드를...
요즘은 짧은 호흡의 영상물이 좋다. 30분이 넘지 않는,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휙휙 보거나, 밥 먹을 때 배경으로 틀어놓기 좋은 작품들. 넷플릭스 드라마 <굿 플레이스(The Good Place>는 한 에피소드당 25분 이내로 이 조건에 알맞다. 그렇지만 방심은 금물. 나는 간단히 점심으로 먹을 파스타를 요리하면서 배경으로 이 드라마를 틀었다가 1주일 만에 시즌 3까지 돌파하고 말았다. 지금부터 <굿 플레이스>의 함정을 몇 가지 소개한다. 스포일러는 없다....
2010년 말 정도였을 것이다. 넷플릭스가 없던 시절, 잠 안 오는 밤이나 무료한 주말 오후를 순식간에 삭제하는 블로그가 하나 있었다. ‘감자의 친구는 연애를 하지’, 일명 감친연. ‘홀리겠슈’라는 아이디의 여성 운영자가 엄선한 망한 연애담과 망한 소개팅 썰이 업로드 되는 곳이었다. 처음 그 블로그를 발견했을 때 나는 헤테로섹슈얼 연애에 대한 강박과 집착이 공기처럼 은은하게 흐르는 남녀공학 사립 대학을 다니고 있었고, 호르몬은 넘치는데 자존감은 좀 부족한 20대 초반 여성이었다. 감친연은 그런 나의 구미에 딱 맞았다. 여자들끼리만 술 마시는 자리가 아니고서야, 아무도 대놓고 얘기하지 않았던 생생하고 솔직한 헤테로 연애담의 끝장을 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