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클라리타,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교외의 베드타운. 인구 20만에 열두달 내내 영상 18도씨 이상을 유지하는 쾌적하고 따뜻한 곳. 살기 좋고, 조용하고, 찍어낸 듯한 집들이 이어진 곳. 이곳에서 부동산업을 하며 평범하게 살아가던 부부, 쉴라와 조엘. 그런데 어느 날, 쉴라가 갑자기 좀비가 된다. 아무 이유도 없이, 아무 맥락도 없이! 이제 신선한 사람 고기가 아니면 먹고 싶지 않은 쉴라와 어쨌든 그를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조엘, 그리고 부모의 변화를 눈치 챈 딸 애비의 우당탕탕 비밀과 모험.
정말 아이러니한
좀비가족코미디
넷플릭스 드라마 <산타클라리타 다이어트>의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주인공이 좀비이지만 <워킹 데드>로 대표되는 ‘좀비물’이라고 보긴 어렵다. 보통 ‘좀비물’은 좀비 집단이 인간을 위협할 정도로 많은 아포칼립스에서, 인간이 그에 대항해 어떻게 살아남을지가 서사의 중심이다. 그러나 <산타클라리타 다이어트>는 완전히 반대다. 아직 아포칼립스는 오지 않았고, 산타클라리타는 여전히 겉보기엔 조용한 교외 중산층 도시다. 그 속에서 쉴라만이 좀비가 되었고, 인간 틈에서 좀비인 쉴라를 ‘먹여 살려야’ 하는 가족의 고군분투가 이어진다.
<산타클라리타 다이어트>는 수많은 아이러니로 이루어져 있다. 쉴라는 이론적으로 ‘죽었기’ 때문에 살아있는 사람들의 자제력이 없다. 심층심리 이론으로 따지면 하이퍼에고가 죽었고 리비도가 충만하다고 해야 할까. 충동적이고, 육감적이고, 에너지가 넘친다. 쉴라는 살아있을 때보다 더욱 생기가 넘친다.
하지만 인간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결코 들켜서는 안 될 쉴라의 비밀. 조엘은 돌아버릴 것만 같은 이 비밀을 호기심 많은 교외 이웃들로부터 지키기 위해 항상 ‘필사적인 웃음’으로 얼굴을 팽팽하게 긴장시키며 살아간다. 평범한 인간인 척 하려고, 최대한 ‘정상’으로 보이려고 온 힘을 다하는 조엘의 얼굴. 나는 이 얼굴이야말로 현대인의 얼굴이라고 느낀다.
조엘은 그 와중에도 충동적이고 식욕이 넘쳐나는 쉴라에게 최대한 협조하기 위해 애쓴다. 쉴라의 ‘먹이’를 구하려면 사람을 죽여야 하는데, 그래도 무차별 살인자는 되고 싶지 않아 죄책감을 덜고자 죽을 만한 사람을 고르려고 애쓴다. 나치추종자, 성차별주의자, 소아성애자, 인종차별주의자… 검증 과정도 쉽지는 않고, 유인하는 방법도 생각보다 실전이 어렵다. 그럼에도 어찌어찌 죽어 마땅한 사람들을 쉴라에게 데려다 주면, 쉴라는 기쁘게 목덜미를 물어 뜯는다. 일종의 카타르시스까지 느껴지는 장면이다.
쉴라는 자신의 비밀에 대해 조엘보다는 덜 예민하다. 물론 들통나면 큰일나는 일이지만, 어차피 누구나 강박적으로 평범해야만 하는 조용한 교외 중산층 도시에서 누구나 비밀 한 가지 쯤은 갖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고 쉴라가 자신의 ‘비정상성’을 마음껏 만끽할 수만은 없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 애비가 얽히는 순간, 쉴라 역시 조엘과 비슷한 ‘필사적인 웃음’을 지은 채로 정상성을 연기한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달라졌을 때
‘사람을 먹는 좀비’. 이보다 더 비정상적일 수 없는 존재. 나의 가족이 갑자기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가족은 가족. 식성은 좀 바뀌었다 해도 가부장제 의식을 통해 선언했던 부부 간의 의리, 딸에 대한 책임감, 그런 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질 순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산타클라리타 다이어트>의 주인공들은 최대한 정상가족을 유지하려고 발버둥친다. 그 모습이 애잔하고, 필사적이고, 우스꽝스럽다. “가정이 파괴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무슨 일이 일어나도 가족이 파괴되지 않는 게 문제다”라고 했던 여성학자 정희진의 말이 떠오른다.
우리는 가족 단위로 기능하는 현대 자본주의 세상에 너무나 익숙하다. 혼자 산다면 모를까, 만약 가정을 만든다면 거기 충실하겠다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마음 먹는다. 그렇게 살아야 좋은 사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우리의 행복도 거기 있다고 생각한다. <산타클라리타 다이어트>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여느 화목한 가정들 못지 않게 서로의 행복을 찾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발버둥치는 현대 사회의 모습이다. 개인적으로는 <모던 패밀리>보다도 생생한 현대 가족의 얼굴이라고 느꼈다. 어떨 때는 소름 돋을 정도로 가족 단위로 고립된 현대 사회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물론 쉴라는 이제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그로 인한 가족 간의 단절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놀랍게도 <산타클라리타 다이어트>는 이 점을 정확히 짚는다. 쉴라는 조엘과 애비를 ‘물어서’ 자신과 같은 존재로 만들고 싶다고 제안한다. 어차피 죽어 있으니 죽지도 않고, 먹이는 지금처럼 어떻게든 조달하면 되고, 내가 ‘해봐서 아는데’ 이 편이 훨씬 낫다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쉴라는 외롭다. 자신만 이런 존재라서, 평범한 인간인 조엘과 애비를 괴롭히는 것 같아 속상하기도 하다. 그러나 조엘은 현재의 자신을 유지하고자 한다.
이 장면은 청각장애인 자녀를 원해서, 일부러 5대째 청각장애인인 남성의 정자를 기증받아, 결국 청각장애인 아이를 출산했던 청각장애인 레즈비언 부부를 떠올리게 한다. 그들은 일부러 장애가 있는 아이를 낳았다며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청각장애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며,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은 장애가 아니라 ‘차이’일 뿐이다”라고 반론했다(<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그들은 들리지 않는 세계가 들리는 세계보다 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 세계를 공유할 수 있는 가족을 원했던 것일지 모른다.
조엘은 쉴라를 사랑하고, 쉴라의 ‘좀비로서의 삶’이 이어지도록 정말 분골쇄신 몸과 마음을 다 바치지만, 끝내 쉴라의 세계를 공유하기를 거부했다. <산타클라리타 다이어트>는 가족 간의 지나치게 끈끈한 정을 그리는 듯하다가도 이런 점에서 냉정하다. 결국 부부란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 탄생하는 것이기에 자기 자신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원래 쉴라가 조엘처럼 ‘인간’이었기 때문에, 조엘은 쉴라를 반드시 예전 상태로 ‘되돌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점도 있다. 하지만 쉴라는 그렇게 생각하지만은 않는다. 이 드라마가 계속해서 ‘왜 인간인 게 더 나은데? 왜 그래야만 하는데? 그게 뭐가 그렇게 소중한데?’라고 쉴라의 입을 빌어 끝까지 질문을 밀어붙이는 게 무엇보다 재미있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질문하는 쉴라 역시 한 때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인간인 척 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이겨내며 조엘과 애비의 곁에 있다. 그래서 드라마는 이어진다. 슬프게도 넷플릭스가 이 시리즈를 캔슬해 버렸기 때문에 시즌 3까지.
쉴라가 사람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고어한 장면이 꽤 나온다. 나중에는 ‘말하는 머리통’ 캐릭터까지 나온다. 나는 여성 인간으로 보이는 좀비가 훨씬 덩치 큰 남성 범죄자들을 말 그대로 ‘씹어먹는’ 장면이 통쾌했지만, 징그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피하는 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