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말의 이야기다. 유병재가 한국 최초의 스탠드업 코미디라며 <B의 농담>을 공연하고 넷플릭스에서 그의 공연을 시청할 수 있게 됐을 때, 나는 한동안 그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들어간 넷플릭스에 접속할 때 대단한 피로감을 느꼈다. 그리고 간절히 빌었다. 저기요, 제가 넷플릭스를 통해서 접하게 된 스탠드업 코미디라는 장르를 좋아하긴 하는데요, 이 사람은 말고요. 제발요.
그의 시대, 그의 코미디
<어벤저스: 엔드게임>을 보면서도 온갖 비과학적 과학과 쫄쫄이를 입고 싸우는 백인 남성의 비현실성을 지적하지 않는 사람들이 <걸캅스>를 보며 여경이 범죄를 해결하는 건 비현실적이라고 여전히 울부짖는 2019년이지만, 그들이 느끼는 울화와는 상관없이 세상은 천천히 바뀌고 있다. 그 시대의 변화를 타고 현재 가장 빛나고 있는 코미디언 중 하나를 꼽으라면 누구나 박나래부터 꼽지 않을까. 박나래는 현재 <나 혼자 산다>를 비롯해 아홉 개의 예능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하고 있다. 그의 시대다.
그렇기에, 넷플릭스가 한국의 두번째 오리지널 스탠드업 코미디 스페셜의 주인공으로 박나래를 택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정일지도 모른다. 그는 <농염주의보>로 첫 스탠드업 코미디에 도전한다고 했다. 이에 기대가 반, 호기심이 반이었다. 기대는 당연히 그가 보이고 있는 엄청난 화제성에 입각한 기대였으며 호기심은 예능이 아닌, 편집된 TV 프로그램 속이 아닌 마이크 하나만 쥔 박나래는 어떤 모습일지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농염주의보>는 5월 17일, 18일 양일 한 번씩 공연했는데 5분만에 티켓이 전석 매진됐다. 무려 2500석이 말이다. 그만큼 관심은 뜨거웠다. 공연 당일도 마찬가지였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좌석에 사람들이 가득찼고, 관객석은 기대로 술렁이는 분위기가 손에 잡힐 것처럼 선했다. 막이 오른다. 그가 등장한다. 블루스퀘어 아이마켓홀이 환호성으로 가득 찬다.
코미디언 박나래가 무대에서 어떤 입담을 풀어놓았는지, 웃긴 순간과 펀치라인은 넷플릭스에서 추후 공개될테니 자세히 얘기하지 않으려 한다. 대신 <농염주의보>를 넷플릭스에서 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이들을 위한 일종의 예고편으로 그의 스탠드업 코미디에 있는 것 세가지와 없는 것 한가지, 없어야 했던 것 한가지를 꼽아보려 한다.
있는 것
야생의 박나래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서 그의 민낯을 거침없이 드러냈다지만, <농염주의보>에서 만날 수 있는 박나래는 민낯이란 단어가 부족하다. '야생'이란 표현이 적절하다. 입담도 입담이지만 그의 몸짓이 그렇다. 몸짓이란 말 말고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직접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다.
무대
이 부분은 당신이 스탠드업 코미디의 문법에 얼마나 익숙한지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요소다. '전통적인' 스탠드업 코미디에서는 보통 스크린과 프로젝터같은 보조장치가 등장하지 않는다. 스탠드업 코미디는 원래 그런 거니까. 마이크 하나만 무대 위에 덩그라니 존재하는 것. 하지만 스탠드업 코미디에 익숙하지 않은 국내 환경을 고려해서인지, 이야기를 보조하기 위해서인지 <농염주의보>에는 스크린이 있다. 무대 구성과 음향 효과, 소품도 있으며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지금까지 넷플릭스에서 봐온 스탠드업 코미디와 이러한 점들이 다르다.
수위
높은 인지도를 가진 여성 코미디언이 섹스와 연애에 관한 이야기를 이렇게나 끝도 없이 늘어놓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2019년 한국에서 <농염주의보>의 의의는 충분하다. 물론, 그가 시스젠더 헤테로이기 때문에 이야기는 이성애자의 연애를 다루며 그렇기에 대중적으로 '용납'되는 범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없는 것
올려치기
<농염주의보>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박나래의 이야기로만 채워져있다. 그 과정에서 조연으로 등장하는 남성들은 있을지언정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남성은 없다. 그들은 우스꽝스럽고 한심하며 안쓰럽다.
없어야 했던 것
여성혐오
안다. 스탠드업 코미디에서 때로는 민감한 소재를 일부러 끌어온다는 것을. 하지만 코미디에서 민감한 소재를 쓸 때엔 힙합에서 민감한 소재를 다룰 때와 같은 원칙이 하나 있다. 문제점을 비판할 것. 그런 점에서 박나래가 <농염주의보>에서 선보인 몇몇 농담은 분명히 여성혐오적이었으며, 동시에 대중적이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다룬다기보단 일종의 밈(meme)화 시켰다. ('명품백을 든 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