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시카고>에서 내가 언제나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셀 블록 탱고도, '오, 우리 둘 다 총을 향해 손을 뻗었죠!'도 아닌 피날레다. 공연 내내 공간을 꽉 채우던 재즈 밴드도, 감옥을 연상시키는 배경과 소품도 모두 금색 술로 무지막지하게 가려지고 번쩍이는 무대 위에 등장하는 것은 오직 벨마와 록시. 합을 맞춰 나란히 춤추는 둘은 오랜 시간 싸워 지켜낸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고 온 몸으로 말한다.
을지로의 바 '신도시'에 오후 다섯 시 경 사전 인터뷰를 위해 들어섰을 때, <Laugh Louder(아래 래프 라우더)>의 출연진과 기획진은 테이블을 밟고 올라선 채 바로 그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금색 술을 천장에 붙이고 있었다. 무대가 될 공간 양 옆에는 커다란 스피커가 두 개 세워져 있었고 빈 공간에는 의자를 하나 둘씩 늘어놓았다. 관객은 70여명. 티켓은 텀블벅 펀딩을 오픈한 지 24시간이 조금 지나 매진되었다. "그래서 오히려 친구들이 티켓을 못 샀다니까요." 윤이나가 말했다. 오늘의 공연을 위해 샀다는 의상을 갖춰 입은 주인공 둘이 포토그래퍼 김지연의 카메라 앞에 섰다. 오케이, 더. 오케이, 더. 당당한 포즈를 취하는 코미디언들의 얼굴에선 자신감이 넘쳤다.
<래프 라우더>는 지난 3월 8일에 열렸던 <왜안돼페스티벌>에서 시작됐다.
<래프 라우더>를 공동기획한 헤이메이트의 기획자 황효진은 "<왜안돼페스티벌>에서 영감을 얻었다"며 "이렇게 잘할 수 있구나. 여성이 말하고 여성이 들으면 이렇게 잘 되는구나. 여성들끼리 통하는 농담이 분명히 있구나. 확신을 얻었고 여성 스탠드업 코미디 쇼를 기획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무대를 만들고 여성을 세우는 취지에는 긴 설명이 필요없었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멜버른에 있던 윤이나 작가가 합류했다. 그는 "원래 스탠드업 코미디언과 작가를 겸업하는 경우는 사실 꽤 흔하다"며 "스탠드업 코미디 대본을 쓰는 능력을 검증받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팟캐스트 <영혼의 노숙자>를 진행하는 Matt돼지는 처음 <래프 라우더>를 해 보자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너무 좋아서 거의 눈물이 그렁그렁했다"고 회상한다. 그렇게 입담을 자랑할 두 명의 출연진이 확정되었다. 티켓이 매진될 줄은 솔직히 알고 계셨죠? 물으니 물론이라고 답한다. "다만 언제 될까, 그게 저흰 궁금했던 거죠. 이렇게 빨리 될 줄은 몰랐고."
누구나 아는 이야기
단지 크게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
공연 시작은 저녁 여섯시, 관객들은 다섯시 반부터 입장해 객석을 하나 둘씩 채웠다. 머릿수를 굳이 셀 필요도 없이 여성 관객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여성이 말하고 여성이 듣는다. 언어가 실현된 공간의 힘은 특별했다. 첫 순서로 나선 윤이나의 '4차산업혁명의 시대, 기계는 어떻게 인간을 이기는가?'가 30분을 꽉 채우고 인상적인 마무리와 함께 끝날 때까지, 관객들은 농담 하나하나에도 호응했고 모두가 아는 '그렇고 그런' 얘기가 나올 땐 함께 야유하고, 함께 비웃다가도 곧 함께 숨이 차도록 웃었다.
"깍두기가 왜 이렇게 웃겨. 보다가 대본 다 까먹었어." 두 번째로 등장한 Matt돼지는 그를 보기 위해 찾아왔다는 팬들에게 분명히 보답이 되고도 남을 좋은 쇼를 펼쳤다. '미션임파서블: 한국에서 성욕 강한 여자로 살아남는 법'의 결론은 당신도 아는 그 답이다.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그 불가능을 어떻게든 극복해 보려고 몸부림치는 그의 눈물겨운 이야기이자, 비슷한 몸부림을 나이트와 클럽을 전전하며 겪었던 우리의 이야기다.
짧은 브레이크타임 후 2부에서는 관객들이 직접 무대에 올라 자신의 이야기를 공유했다. 사전에 참여하겠다고 신청한 관객이 없어서 기획팀은 걱정이었다지만, 1부의 코미디를 보고 함께 호응하는 분위기를 즐긴 관객들은 브레이크타임에 자발적으로 나서 주었다. 즉석 코미디언으로 나선 관객에게 주어지는 '새티스파이어2'가 굉장히 탐나는 상품이었음은 물론이다. 미리 작성한 대본이 없어도 문제 없었다. 그들이 마이크를 들고 망설일 때 관객은 함께 기다려 주었고, 적극적으로 말하기 시작했을 때 관객은 함께 웃으며 호응했다. 무엇보다 도저히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누구나 아는데 쉬쉬하는 이야기를 마이크 앞에 꺼내 보니 누구나 웃을 수 있는 이야기가 됐다.
웃기지도 않으면서
윤이나는 "웃기는 여자들이 터부시되고, 웃긴 여자는 매력이 없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남자들은 실제로 웃기지도 않으면서 웃긴 게 매력이라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여성 코미디언들이 더 많이 등장하고, 더 많이 TV에도 나오고, 더 많이 돈도 벌고, 더 사랑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Matt돼지는 "여성이 웃기다는 것만으로 이성적 매력이 없는 것처럼 말하는 데다가 외모에 대한 평가는 당연한 것처럼 뒤따라온다. 진짜 말도 안 된다. 박나래랑 기안84를 자꾸 엮으려는 걸 봐라. 누가 봐도 박나래가 아깝지. 세상에서 제일 아깝지. 그런 식으로 웃긴 여자들을 후려치고 소비하는 패턴이 틀에 박힌 듯 똑같다"며 "예쁘고 웃기고 당당하고 똑똑한 여성들을 막 대해도 되는 존재처럼 다루는 건 잘못됐다"고 짚는다.
정말로 그렇다. 우리는 웃기지도 않은 남성 코미디언의 불편한 농담에 어정쩡한 박수를 치는 날을 너무 오래 견뎠다. 같은 날, 블루스퀘어 아이마켓홀에서는 유병재의 스탠드업 코미디쇼 <B의 농담>이 열렸다. 윤이나와 Matt돼지는 '라이벌은 유병재'라고 농담 반 진담 반 섞인 얘기를 했다. <래프 라우더>를 보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B의 농담> 관람 후기를 보며, 나는 그 얘기가 더 이상 농담이 아니길 바라게 되었다.
여성이 웃긴다. 여성이 말한다. 여성이 듣는다. 큰 소리로 말하지 못하도록 금지당했던 이야기와 농담을 되찾고 함께 박장대소한다. <래프 라우더>는 그럴 수 있는 특별한 기회다. <래프 라우더> 팀은 "다음번에도 이 행사를 이어가고 싶다"며 "우리 전국 투어 하고 싶다!"고 공연 말미에 큰 소리로 외치고 모두의 박수를 받았다. 계속되는 <래프 라우더>를 기대한다. <래프 라우더>의 10회차, 30회차, 50회차, 100회차를 상상한다. 그만큼 늘어났을 우리의 웃음을 그려 본다. 그건 조금, 아니, 훨씬 더 견딜 만한 세상일 것 같다.
추신: 스탠드업 코미디는 역시 직접 가서 보고 듣는 것이 제맛 아니겠는가. 레퍼토리에 대한 스포일러는 의도적으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래프 라우더>의 첫 공연에서 터진 기념비적인 몇몇 명언만을 꼽아 보았다.
"이런 걸 반려기계라고 하는 거죠." - 윤이나
"길가는 여성에게 새티스파이어를 대주고 싶다. 이게 뭐다? 자매애다." - 윤이나
"걔가 원 투 쓰리 원 투 쓰리 하는데 내가 뭘 어떡해. 음 아 아 음 아 아, 그렇게 하는 거지." - Matt돼지
"걔네는 원 투 쓰리 쓰리 쓰리 쓰리 쓰리 쓰리 쓰리. 한국 남자는 원 투 투 투 투 투 투 투 투 투 쓰리. 가슴 못 빨고 죽은 귀신이 붙었나." - Matt돼지
"휘적휘적 해봤는데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 김예린(관객 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