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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의 탈혼기 8. 위자료를 받기 위해 결혼한 여자

Jane Doe

석 달 뒤 나는 다시 B와 함께 관할 지방법원에서 만나야 했다. 나는 법원에서 보내온 문자가 알려준 시간보다 10분 정도 일찍 도착했다. 사람들은 붐볐고 언뜻 보기에는 어수선했지만 이 모든 일들은 규칙이 있었다. 마치 대학 병원에 검진을 받으러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곁눈질로 이 곳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훑었다. 혹시라도 오늘 마음이 바뀐 B가 이 자리에 오지 않을까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 아직 B는 오지 않았다. 원래 일찍 오는 사람은 아니니까. 나는 불안한 마음을 누르려 애썼다.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졌다. 설마 마음이 바뀐 것은 아닐까. 혹시 이 일을 까먹은 것은 아닐까. 나는 계속 문을 보고 앉아있었다. 한참 뒤...

언니, 우리 이민갈까? 2. 내가 선택한 지옥

유의미

지난 3월 15일,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총격 테러가 발생했다. 이민에 반대하는 인종차별주의자의 테러였다. 50명이 사망했고 또 50명이 다쳤다. 테러범은 이슬람 사원을 공격했고, 많은 무슬림 교도들이 희생됐다. 같은 날, 내가 지내던 오클랜드에서도 폭발물로 의심되는 가방이 발견됐다. 이번 사건과 무관하다는 기사를 봤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다음 날 시내에 나가니 평소와 달리 이상할 만큼 백인들밖에 안 보였다. 주차장에서 깨진 유리창을 보고 덜컥 겁이 났고, 길에서 나를 뚫어지라 쳐다보던 백인 남성이 무서웠다. 그날 외출을 하기 전에 수없이 고민했지만, 이럴 때일수록 의연하게 일상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나오자...

A의 탈혼기 7. 내 잘못이 아니었다

Jane Doe

그래도 내가 그때까지 그와의 결혼 생활을 유지하면서 적어도 한 가지 위안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나는 B에게 맞지 않았다. B는 내 손목을 잡고, 억지로 나를 꽉 안아 일어나지 못하게 한 적도 있었고, 물건을 집어던진 적도 있었고, 나를 협박한 적도 있었고, 소리를 지른 적도 있었고, 자살하겠다고 한 적도 있었다. 그래도 적어도 B는 나를 때리지는 않았다. 그때 폭력이라는 것이 상대를 때려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미리 인지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겨우 아이가 태어난 뒤에야 깨달았다. B의 행동이 아이에게 위협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나서야 나는 그를 그대로 둬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다시 줍는 시 마지막. 이소호가 이경진의 입술을 열고 말을 불러 일으킬 때

신나리

3월 12일 화요일 아침에 집을 나서며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아침에는 엄마와 아빠가 또 큰소리를 내고 싸웠다./내가 스물 아홉이나 먹어서 이런 일기를 쓰다니 참 내 인생도 안 됐다./나는 엄마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어린 시절 그녀는 스스로에 대해 잘 몰랐던 거야./그래서 자신에게 맞지 않는/아주 나쁜 선택을 했다./그리고선 지금까지 처벌을 받고 있다./그 이후의 불행에 대해, 그녀는 시정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똑같이 살고 있다./이건 한심하고 멍청한 일이야./이런 생각을 해본 건 처음이다. 나는 집에서 작업실로 걸어가며 홀로 했던 생각을, 그날 오후 일기장에 적었다. 이것은 용납될 수 없는, 아무...

A의 탈혼기 6. 탈혼을 결심하다

Jane Doe

아이가 태어나고 난 뒤 나의 삶은 180도 달라졌다. 한참 아이를 돌보다 시계를 보면 완벽히 생소한 숫자가 보였다. 갓 태어난 아이는 좀처럼 시간을 맞춰 잠을 자지 않는다. 당연히 아이를 보는 나 역시 시도 때도 없이 깨어있어야 한다. 아기가 잠시 잠에 들면 아직 완벽하게 회복되지 않은 몸을 일으켰다...

A의 탈혼기 5. 나가 계시라고 할까요?

Jane Doe

그 상황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그때 누구라도 엉망이 되어버린 집 모양을 보고 이 상황을 알아차려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사람들은 내가 쓰러졌다는 사실에 집중했을 뿐 주변을 둘러볼 여유는 없어보였다. 난생 처음 들것에 올려졌다. 주변에 다행히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누구라도 나를 알아볼까 두려워 몸을 바짝 웅크렸다. 그 모습을 보고 구조대원들은 놀라며 내게 물었다. “괜찮아요? 많이 아픈가봐요.” 우습게도 나는 이 상황이 너무 부끄러웠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더 깊이 몸을 웅크렸다. 마침내 들것에 눕혀진 내가 구급차에 올랐다. 제발 나는 나 혼자만 구급차에 타길 바랐다. 하지만 그들은 ‘보호자’인 B를 나와 함...

다시 줍는 시 29. 여성의 고통은 어떻게 시가 되는가2 : 김소연과 고통으로 삶의 중심에 다가가기

신나리

여성의 고통은 어떻게 시가 되는가. 고백하자면 나는 이 문장을 받아들이고 종이에 쓰기까지 긴 망설임의 시간을 보냈다. 가능하다면 여성과 고통을 멀리에 두고 싶었으니까. 서로 가장 먼 곳에 두 단어가 위치했으면, 하고 바랬으니까. 나는 여성을 고통과 연관된 존재로 생각하는 일이 여성을 고통에 종속시키고 여성을 피해자의 위치에 눌러 앉힐까봐 무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장에 용기를 내보기로 한 것은 여기 두 명의 시인 때문이다. 박서원과 김소연. 두 사람의 목소리는 너무 가슴 아파서 외면하기가 불가능하고, 또 고통을 이야기하는 사람의 글을 고통을 제외하고 설명하는 일은 거짓말 같았다. 그래서 써본다. “여성의 고통은...

A의 탈혼기 4. 애가 무슨 죄가 있겠어요

Jane Doe

나는 재정을 포함해 결혼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그보다 더 많이 책임지고 있었다. 나는 가장이었다. 그러나 남편의 가족들 오직 B가 남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전통을 들먹이며 그들을 받들어 뫼시기를 요구했다. 그 순간 이후 나는 그의 가족을 싫어하게 되었다. 그렇게 집에 돌아 온 뒤,&...

A의 탈혼기 3. '잠깐만 맞춰주자'고?

Jane Doe

늦은 새벽이었다. 다음 날 회사에 가려면 빨리 자야 했다. 하지만 나는 서서 한참을 고민했다. 난장판이 된 집을 당장 치우는 게 맞는 것인지, 이 상황을 그대로 두고 집에 돌아온 그가 반성하게 해야 하는지. 지금 생각하자면 꽤 하찮은 고민이었다. 일단 나는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그 꼴을 계속 보고 있으면 또 화가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웅크렸다. 나는 웅크린 채로 대체 무엇이 이렇게 잘못되었는지를 생각했다.더 이상 양보할 수 없었다. 책임져야 할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게 된다. 거기에 무책임한 어른을 하나 더 책임지고 산다는 것은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우리는 지금과 달라져야...

다시 줍는 시 28. 여성의 고통은 어떻게 시가 되는가1 : 박서원과 고통으로 세계와 자신을 파멸시키기

신나리

시인 박서원은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89년 그는 잡지 『문학정신』에 「학대증」 외 7편의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등장한다. 이후 총 5권의 시집, 『아무도 없어요』(1990), 『난간위의 고양이』(1995), 『이 완벽한 세계』(1997), 『내 기억속의 빈 마음으로 사랑하는 당신』(1998), 『모두 깨어있는 밤』(2002)을 차례로 출간한다. 그런데 다섯 번째 시집의 출간 이후 그는 문단에서 자취를 감춘다. 긴 시간이 흐른 뒤인 2016년, 문단에는 그가 이미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그리고 신문 기사를 통하여, 박서원이 2012년 5월 16일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음이 알려진다. 이후 2018년,...

임신일기 36주차. 왜 자꾸 눈치를 보래

ND

2018년 8월25일 분만방법에 대해 오래 고민해왔다. 비교적 산후 회복이 빠르다는 질식분만을 하고 싶은데, 침대에 무력하게 누워 분만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모르게 정신 없이 동의서에 서명을 휘갈기고, 회음부 절개를 당하고, 피를 줄줄 흘리며 아기를 내뱉듯 낳는 건 하고 싶지 않다. 내 분만의 주체는 언제나 '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출산의 목표는 아기를 낳고 건강히 살아남는 것이다. 진통의 고통이 적었으면 하고, 분만과정을 남편과 함께 하고 싶다. 진통을 혼자서 겪고 혼자서 호흡에 맞춰 힘주는 나를 남편이 그저 바라만 보는 게 아니라, 분만 중에 남편의 실제적인 도움으로 끝내 함께 이루는 분만을 원한다. 진통과 분만의 순간...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그리고 로맨틱하게

유의미

결국, 왕자님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어릴 때 읽은 동화는 모두 그렇게 끝났다. 나중에는 책을 끝까지 읽지 않아도 결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주인공의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왕자님을 만나 행복하게 산다.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던 신데렐라는 파티에서 왕자님을 만나 팔자를 폈고, 독이 든 사과를 먹은 백설공주도 왕자의 키스로 목숨을 구한다. 아, 인어공주는 이웃 나라 왕자님을 사랑하다 물거품이 됐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녀들에게는 모두 왕자님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공교롭게도 다들 이성애자였나보다. 동화뿐만이 아니다. 영화 속 여주인공은 모두 남자를 사랑했다. 노래 가사에서도 애니메이션에서도 소설에서도 심지어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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